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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을 보러 갔을 때 나는 영화를 보고 어떤 말을 해야할지 어느 정도는 정해 두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7번방의 선물>의 연장선상에서 장·노년층의 삶에 대한 자긍심을 고무하는 촌스러운 가족주의 영화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판하고 싶었던 지점 역시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장·노년층이 편안하게 느끼는 서사가 어떤 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가를 왜 이와 같은 영화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가 하는 산업적 맥락에서 이야기해 볼 생각이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니 닥치고 보라는 말에도 반박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산이었다. <국제시장>은 한국사회의 권력 지형 변화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 정치적인 텍스트였으며 영화판에서의 조용하지만 강력한 보수세력의 역습과도 같은 영화였다.

<7번방의 선물> → <국제시장> : 장·노년층을 위한 영화들의 대두

영화산업은 전통적으로 젊은 층이 주 소비자였다. 그런데 산업이 고도화 될수록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영화를 잘 보지 않던 집단을 끌어올 필요가 생기게 된다. 연령적으로 보면 그들은 바로 장·노년층인데 <7번방의 선물>과 <국제시장>은 처음부터 그들을 노리고 만들어진 영화로 보인다. 노년층의 인구 비중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고, 청년세대의 임금수준, 실업률을 고려해 본다면 그들의 잠재 구매력은 높은 편이다. 구매력이 있는 쪽에 서비스가 집중되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장·노년층을 위한 영화라는 것은 영상과 서사가 그들의 마음에 어떤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7번방의 선물>은 일종의 자기변명의 영화였다. 류성룡이 분한 주인공은 바보지만 자신의 딸을 위해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이나 바보나 동물 같은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캐릭터는 대체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스크린 밖 존재의 욕망을 숨겨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 <아저씨>의 어린 여자아이의 욕망은 정확히 어른 여성의 욕망을 담고 있다. <아저씨>가 <레옹>과 유사한 구조임에도 눈에 띄는 점은 폭력 표현의 방식이었다. <레옹>의 폭력 표현이 총탄에 꽃다발이 휘날리듯 낭만적인 데 비해 <아저씨>의 그것은 살점이 잘려나가듯 현실적이고 잔인하다. 이 영화의 조용한 성공은 자신이 보호 받을 수 있다면 외부세계에 잔인해져도 상관없다는 남성중심적 한국사회에서의 여성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7번방의 선물>에서 스크린 속 바보에 감응하게 되는 이유는 자신의 모든 과거 행위들은 바보처럼 딸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항변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가족주의가 가장 응축된 구성원은 어린 딸이다). 영화를 보는 이들은 기꺼이 스스로 바보 속으로 뛰어 들어가 딸을 위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단순화 시켜 버리고 환상 속에서 죄의식을 얼버무려버린다.

단순화의 문제점은 은폐가 쉬워진다는 것이다. 마치 <국제시장>에서 베트남 전쟁을 요약하는 것의 위험성과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베트남은 가족을 위해 돈을 벌기위해 간 곳이었고, 그 속에서 6·25전쟁을 겪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본 것은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베트남전은 결코 그것으로 다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말이다. 역사적 사건을 철저하게 개체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면 정당화도 수월해지기 마련이다.

최근의 장·노년층들을 위한 기획 영화들을 보면 격동의 역사 속에서 복잡한 인생을 살아오신 어르신들에게 서사적 힐링 서비스를 제공해 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극우 세력이 위안부나 전쟁범죄를 다룬 역사를 '자학사관' 이라 부르며 역사 왜곡을 시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긍의 서사가 왜 문제가 되는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명량> → <국제시장> : 역사적 소재의 서사적 강점

<명량>은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 속 강렬한 드라마를 선택했을 뿐 딱히 장·노년층을 타겟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도 변화의 징후는 발견할 수 있었다. <명량>은 뛰어난 수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꽤 탄탄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화는 쉽게 선악을 나누거나 눈물을 짜내기 위해 섣부른 짓을 하지 않고 이순신의 영웅성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키지도 않는다. 영화 전체의 톤은 건조하고 이순신의 대사 역시도 난중일기의 것을 그대로 써서 어색한 순간이 있을 정도였다.

대신 영화는 누구나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극한의 절망적인 순간에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모든 서사적 역량을 집중한다. 생각해보니 명량해전을 그림에 있어 이보다 중요한 지점을 선택해보라고 한다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 오랜 시간 지속되었던 전투 장면은 단순히 스펙터클로써 기능하는 것이(영화 <국가대표>의 스키점프 신이 그 예라 볼 수 있다) 아니라 용기를 이끌어 내는 과정으로써 서사적 연속성과 가치가 있었다.

이처럼 냉철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명량해전'은 그 자체로서 너무나 강렬한 드라마를 가지고 있었고 이순신의 영웅성 역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흘러넘치는 역사적 소재를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에 있어 감독은 꽤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흥미로웠던 부분은 전투를 마친 직후 '우리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 했던 걸 알까?' '모르면 호로자식이지'라는 격군들의 대사였다. 사실 이 대사들은 영화의 일관된 톤이나 서사의 흐름과는 이물적인 장면으로 보였다. 이와 같은 장면은 왜 들어가게 되었을까? 위와 같은 대사의 기능은 장·노년층의 살아온 삶에 대한 립서비스로 보였다.

영화자본은 이와 같은 대사들이 그들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이는데 꼭 필요하다고 본 것 같고 감독은 이 대사가 영화 전체의 가치를 침해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 것 같다. 그러니 감독은 자본의 필요를 부담없이 받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국제시장'은 좀 더 나아가 기꺼이 이러한 자본의 필요를 모티브로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 낸다.

최근 영화계는 제작사의 힘보다 대형 투자 배급사의 힘이 강력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제작사의 노하우에 기대지 않고 투자 배급사들이 흥행을 위한 요소들을 파악하고 있고 제작공정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력 역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손들이 알까?'라는 대사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이 '차라리 이런 고통을 자식들이 겪는 것 보다는 내가 겪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라는 대사와 기능적으로 일치한다.

이는 영화 자본이 파악하고 있는 장·노년층들의 마음을 열기위한 절대반지 같은 것으로 보인다. <국제시장>에서 '저 잘 산 것 맞지요?'라고 되묻듯,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싶었던 장·노년층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려는 것이다. 이는 노년층이 스스로의 삶에 자부심을 느낄 수 없는 사회·정치적 정황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명량해전과 흥남철수작전

<명량>에서 보았듯 역사적 소재가 가지고 있는 서사적 강점은 명확하다. <국제시장>에서 첫 시퀀스에 해당하는 '흥남철수작전'은 그 장점을 상당히 잘 보여준다. 이 사건은 6·25 당시 중국의 개입으로 미군이 긴급히 철수해야 했을 때 미국전함이 군수물자를 비우고 피난민들을 태워 10만여 명을 철수시킨 실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선택한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노년층의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미국에 대한 강한 추종이 나름의 내적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잘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시장>은 역사적 사실에 힘입어 딱히 다른 가공을 하지 않고도 흥남부두에 던져진 주인공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영화는 미군이 한국 피난민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적 연민과 인간적 결단 등을 과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냥 촌스러운 영화와 촌스러운 척하는 영화와의 차이점이다.

소통의 영화인가 포섭의 기획인가

이 영화의 무서운 점은 나도 모르게 기성세대를 이해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데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970년대까지의 한국 사회가 과연 지금보다 살기 좋았는가 생각해 본다면 그렇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지금처럼 살기 좋은 세상에서 무슨 불평이냐라는 훈계에 대해 그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느낄 만한 감정이겠구나 하는 것을 영화를 보며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을 이해하는 것과 현안에 대한 과거지향적 선택을 지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지만 정서적 동의가 가진 힘은 크다.

몇몇 장면에서 눈물을 억지로 쥐어짜내려고 하거나, 노골적으로 노년층을 위로해주는 대사가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영화는 흥남부두, 피난시절, 재독 광부시절, 베트남전, 이산가족 찾기 같은 역사적 사건에서 공감할 수 있는 감정들을 잘 끌어내고 있고, 비교적 담담하고 유머러스하고 그려내고 있다. 오달수는 자칫 훈계조가 될 수 있는 영화를 구했고, 고집세고 무뚝뚝하지만 자식들에게 독설을 날리는 황정민의 캐릭터는 유머와 동시에 무조건적 희생을 받아들이는 헌신성의 전형에서 주인공을 구해낸다.

유머가 있다는 것은 캐릭터가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증거이다. 독일 광산의 환복소는 미학적으로도 꽤 훌륭한 장면이었다. 정주영이나 앙드레 김, 남진과 같은 유명인들이 지나쳐가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유지하기 위한 가벼운 흥행코드로써 이용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족, 책임, 인간애와 같은 보수적 가치가 가진 미덕들을 적절히 잘 전달하고 있다. 게다가 노인 황정민은 외국인 노동자를 얕보는 것에 분노하고, 전라도 출신 남진을 좋아하는 것처럼 합리적 보수의 스탠스를 취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천만이 한 영화를 본다는 것

한 영화를 천만 이상의 관객이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에는 스크린 독점이나 마케팅의 고도화, 획일적 인식체계 같은 여러 가지 환경적 요소가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스크린 독점은 자본이 실패하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이지 천만관객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모든 스크린을 도배하고 다른 선택을 없앰으로써 소문이 나기 전에 본전을 뽑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매체가 넘쳐나는 환경에서 무언가를 주지 않는 영화에 천만의 관객이 모여들지는 않는다. 천만관객은 모종의 보편성을 만들어 내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다변화된 사회에서 그러한 보편성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다양한 사회의 요구들을 두 개의 상징 안에 어떤 방식으로든 우겨넣고 결국은 하나로 통합해내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와 무척 닮아 있다. <명량>이 국가가 주도한 역사교육이 내포하고 있는 보편적 인식체계의 위력을 보여주었다면 <국제시장>은 대선과정에서의 빨간색 '새누리당'처럼 한쪽의 입장에 확실히 서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상대의 마음을 빼앗아 천만관객이라는 보편성을 만들어 내는 치열함을 보여주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돈을 벌기 위한 치열함이었기에 더 냉정하고 민감하게 우리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변화는 바로 우리 사회가 늙어가듯 영화관 역시도 조용히 늙어가고 있다는 슬픈 현실이다. 늙는다는 것은 결코 슬픈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한 사회의 꿈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국제시장>은 바로 그 촌스러운 지점이 더 세련되어질 것이라고 우리에게 예고한다. 이는 급속도로 활기를 잃어가는 한국사회가 고착화 되어가는 과정을 동시상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회가 꾸는 꿈을 선택할 수 있다면 현명함보다는 패기찬 것이 더 아름답고 지속가능하지 않을까?

허세 '쩌는' 청춘영화를 본 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 설명충 : 유머를 설명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사람을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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