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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덕주공 2단지 아파트(서울시 강동구)에 다시 가보았다. 떠난 지 여섯 달 만이었다. 30대 초반인 나와 아내, 세 살 먹은 아들은 이곳에서 전세로 살다가 올해 3월에 이사했다. 주택 재건축 정비사업 대상인 아파트였는데 이주 기간이 확정되었다는 안내를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일부터 10월 2일까지, 입주민들은 일곱 달 안에 고덕주공 2단지를 떠나야 했다.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2600세대 모두가 이주 대상이었다. 여섯 달 사이, 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지금 사는 곳에서 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다시 찾는 데 부담은 없었다.

이주 종료일까지 두 주 남짓 앞둔 아파트 단지 안은 조용했다. 세대 대부분이 떠난 듯했다. 단지 밖 큰길 쪽, 지하철역 가까이 있는 아파트 동 몇몇 베란다에 에어컨 실외기가 아직 달려 있었다. 주차공간이 모자라 인도에도 차를 세울 수 있도록 턱을 없애고 선을 그어놓은 아파트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지 안 도로는 차 없이 깨끗하게 뻗어 있었다.

반년 만에 다시 들른 신혼집

이주를 촉구하는 재건축조합의 현수막
 이주를 촉구하는 재건축조합의 현수막
ⓒ 이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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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살았던 233동 주변은 떠날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잡초가 수북이 자란 것말고는. 이미 낡은 아파트였기에 여섯 달 사이 더 낡을 것도 없었다. 분위기가 조금 스산했을 뿐 풍경은 그대로였다.

엊그제까지 이곳에서 살았다는 착각이 들었다. 함께 온 어린 아들에게 물었다. 이곳이 우리 집이었다는 걸 기억하느냐고. 아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다니며 놀았다. 재건축, 이사, 재방문을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다. 나는 옆 동으로 눈을 돌렸다. 모두 떠났는지 문이 잠겼다. 경찰 마크가 있고 붉은 사선이 그어진 '출입금지' 스티커가 현관마다 붙었다.

우거진 잡초, 주인 잃은 자전거
▲ 고덕주공 2단지 233동 우거진 잡초, 주인 잃은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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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 침입 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
▲ 출입 금지 '무단 침입 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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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인 2011년부터 고덕주공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에는 신혼살림이었다. 지금은 아예 가능하지도 않지만, 그때도 서울에서 '전세보증금 1억 원 미만' 아파트는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고덕주공에서는 얻을 수 있었다. 오래되어 낡은 데다 재건축 절차가 진행 중인 점, 대단지라 물량이 많은 점, 도심과 떨어진 서울 동쪽 끝자락에 있는 점 등 때문에 전셋값이 서울 다른 곳에 비해 저렴했다.

당시 신혼집은 3단지였다. 그곳에서 2년을 산 뒤 2단지로 이사 가서 1년 반을 더 살았다.

단지는 달랐지만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같은 동네였다. 길 하나를 건너면 행정구역이 상일동(3단지)에서 고덕동(2단지)으로 바뀌었다. 3단지에 살 때도, 2단지에 살 때도 지하철 5호선 종점 상일동역을 이용했다. 지하철 전동차 머리 칸에서 내리다가 꼬리 칸으로 내린 것만 바뀌었다.

3단지에서 산 집은 4층 왼쪽 끝 6호였는데 2단지에서도 똑같은 406호에 살았다. 건물 외벽이 있는 쪽이었다. 2~5호 집들보다 한여름과 겨울에 더 덥고 추울 것이라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둘 다 전용면적 48제곱미터(㎡), 15평짜리였다. 거실·방·주방·베란다 구조도 같았다.

30년 넘은 동갑내기 아파트... 녹물에 모기와의 전쟁까지

두 단지 모두 완공 뒤 첫 입주 시기가 1983년 12월이었다. 나와 동갑인 돼지띠. 젊은 나는 늙은 동갑내기 아파트들의 운명이 안타까웠다. 당시 나는 회사에서 한창 일을 배우는 때였다. 반려자도 맞이했다. 한참 남은 내 삶을 어떻게 이끌어나갈지 고민하는 시기를 맞이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계획하는 나와 달리 아파트들은 곧 어떻게든 허물어져야 할 대상이었다.

서른 즈음은 사람이라면 활기 있고 왕성하고 무르익은 나이였지만, 한국사회의 아파트라면 낡고 불편하고 볼품없는 연한이었다. 어린 시절 함께 자란 반려동물이 자기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바라보는 소년의 마음, 고덕주공에서 살아가는 심정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래된 주공아파트에서 사는 일은 순조롭지 않았다. 2단지에서는 뜨거운 물을 틀면 녹 부스러기가 섞여 나왔다. 부식된 배관 탓이었다. 인터넷으로 대처법을 검색한 뒤 세탁기 물 공급 수도꼭지, 욕실 샤워기와 세면대, 싱크대에 녹물 필터를 달았다.

인터넷 쇼핑으로 무거운 물건을 주문할 때면 괜히 미안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배달원이 4층까지 맨손으로 짐을 지고 올라왔다. 생수 꾸러미를 옮겨놓는 택배 기사에게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그는 아무 대답 없이 떠나기 일쑤였다.

결혼하고 1년 뒤, 상일동 3단지에 살 때 아기가 생겼다. 임신한 아내는 창밖을 즐겨 바라보았다. 단지 안으로 날아들어 나무에 앉아 쉬는 까치를 보며 뱃속 아기에게 풍경을 이야기해주곤 했다. 출산일이 다가왔을 때 아내는 친정 부산으로 내려가 몸을 풀었다.

아이의 출생신고서류를 앞에 두고 고민했다. 기존 호적제도에서 사용하던 '본적'과 비슷한 개념인 '등록기준지'를 적어야 했다. 신고인이 임의로 정할 수 있었다. 내 등록기준지이자 우리 아버지의 등록기준지인 강원도로 올려야 하나, 아니면 아기가 태어난 곳인 부산을 선택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펜을 들어 '서울 강동구 상일동'으로 시작하는 주소를 썼다. 아기가 잉태된 곳, 이사 갈지 몰라도 아기가 얼마간 머물 곳, 머지않아 허물어질 곳을 아들의 등록기준지로 정했다. 훗날 아이가 낯설더라도 그 동네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기억하길 바랐다.

고덕주공에는 벌레와 모기가 많았다. 창문을 닫아도 낡아서 헐거운 창틀 빈틈으로 들어왔다. 모기는 하수구 배관을 타고 올라온다는 말도 어디선가 들었다. 여름에는 모기장을 치고 잤다. 가을이 되면 별걱정 없었다. 입이 비뚤어진 모기가 물었지만 가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어른이 겪는 상황이었다. 신생아는 달랐다. 11월 어느 날, 아기와 아내가 부산에서 지내다 고덕주공에 온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모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아기가 모기에 열 군데 넘게 물렸다.

얼굴과 팔다리는 전쟁 치른 것처럼 초토화되었다. 날이 추워지자 실내로 들어온 모기가 만만한 아기 피부를 건드린 것이었다. 엄마 아빠가 방심한 탓에 갓난아기는 고생해야 했다. 무척 미안했다. 그다음 해 여름, 가을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모기를 막았다. 아기를 잘 지켰다.

모기에게 뜯겼어도 마냥 즐거운 아기. 생후 만 6개월일 때다. 하루 뒤에는 모기 물린 자국이 더 크고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 모기 물린 갓난아기 모기에게 뜯겼어도 마냥 즐거운 아기. 생후 만 6개월일 때다. 하루 뒤에는 모기 물린 자국이 더 크고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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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바디스, 전세 난민' ②로 이어집니다. ☞ 보러 가기)

○ 편집ㅣ김준수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두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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