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초지진의 병사들은 무단 침입한 운요호에 포격을 가했다.
 초지진의 병사들은 무단 침입한 운요호에 포격을 가했다.
ⓒ 이승숙

관련사진보기


간혹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는데, 거리에서 외국인들과 마주칠 때마다 신선한 자극을 받고는 한다.  특히 용산구 이태원 근처에서는 마트에 가도 장을 보러 온 외국인들을 볼 수 있고 길거리에서도 그들과 마주칠 기회가 많다. 관광차 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일 때문에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볼 때마다 새삼 우리의 국력이 커졌음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염려스러울 때도 있다. 이렇게 외국인이 많다보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용산의 경우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도 있어 미군과 관계된 문제들도 발생할 것이다. 그럴 경우 그들은 우리나라의 법에 따르는 걸까 아니면 자국의 법에 따라 조사를 받고 처벌을 받는 것일까.

국제도시 서울, 자랑스럽지만...

문득 십여 년 전에 일어났던 미해결 사건이 생각난다. 소위 '이태원 살인사건'이라고 불리는 그 사건의 용의자는 두 명의 미국인이었다. 그러나  SOFA협정으로 인해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나 증인신문에 차질을 빚으면서 용의자가 미국으로 도망가 버렸고 그로 인해 사건은 미제로 남아 버렸다.

이 사건을 통해 보면 한국과 미국 두 나라 사이의 협정인 '소파'가 불평등한 조약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된다. 소파(SOFA), 즉 한미행정협정은 한국과 미국 간의 군사, 안보에 대한 두 나라 사이의 조약으로 정식명칭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다. 약칭해서 흔히 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라고 부르는 이 협정은 두 나라 간의 상호 이익과 유대를 단단히 하려고 맺은 조약이지만 내용에 있어서 불평등한 부분들이 있어 우리나라 국민들의 반감을 사고 있기도 하다.

 덕진진의 남장포대에서 바라본 초지진 앞바다. 멀리 초지대교가 보입니다.
 덕진진의 남장포대에서 바라본 초지진 앞바다. 멀리 초지대교가 보입니다.
ⓒ 이승숙

관련사진보기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은 우리의 법질서가 미치지 못한다. 소위 '소파'협정에 의해 미군은 주둔국의 법질서를 따르지 않아도 되고 미군 주둔지는 치외법권 지역이다. 그래서 미군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물적, 인적 피해를 입힌 경우에도 우리의 법체계 안에서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나라 법에 따른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이 미군과의 관계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정당한 배상이나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한미행정협정이 불평등조약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한미행정협정 이전에도 우리나라는 불평등조약을 맺은 적이 있었다. 바로 강화도조약이 그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인 1876년 2월 26일에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근대적인 첫 조약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불리한 조약이었다. 조약의 제1조를 보면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일본인이 개항장에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조선 관헌이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관헌이 심판한다고 제 10조에 명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부산과 인천 그리고 원산 등 세 곳에 달하는 개항장은 치외법권 지역이 되어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140 년 전의 잘못된 조약 체결이 이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전례를 남긴 것이다.

'강화도 조약'은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이 맺은 조약을 말한다. 병자년인 1876년에 맺어졌다고 해서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하는 이 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이다. 수호(修好)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사이좋게 지낸다는 뜻이니, 조일수호조규란 조선과 일본이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맺은 나라 사이의 약속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과 일본은 선린외교를 펼치면서 300년 이상 잘 지내왔다. 그런데도 왜 굳이 새로이 수호조약을 맺어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던 것일까.

잘못된 선례 남긴 강화도조약  

강화도조약은 1871년에 체결된 청일수호조규와 함께 동아시아의 전통적 사대교린 질서에서 근대 국제법 질서로 옮겨가기 시작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868년에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서구식 근대 국가로 진입한 일본은 조선과의 관계도 서구 근대의 외교적 관습에 따라 바꾸려고 하였다. 그 전까지는 대마도의 영주와 부산의 관리 사이에 이루어져왔던 외교 업무를 새롭게 만든 외무성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부산의 왜관도 일방적으로 일본의 외교 공관으로 접수해 버렸다.

임진왜란 후 일본을 믿지못한 조선은 일본 사신이나 무역상인을 부산 이상 올라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 대일 외교와 무역은 모조리 부산에서만 이루어졌다. 조선과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이러한 흐름 속에 이루어져왔는데 일본은 조선과 충분한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외교 관례를 무시하는 처사를 했다. 더구나 부산의 초량왜관까지 일본의 외교 공관으로 접수해 버리자 조선은 분개했다.  

 강화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언덕에 외국의 배는 다닐 수 없다는 비석을 세워두고 경계했습니다.
 강화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언덕에 외국의 배는 다닐 수 없다는 비석을 세워두고 경계했습니다.
ⓒ 이승숙

관련사진보기


일본은 부국강병책인 메이지 유신을 통해 막부 정치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 체제로 개편을 했다. 그러자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에도 큰 파장이 몰아쳤다. 조선은 명분상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조일관계에 천황이 등장하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스스로 황제라 칭할 수 없는 조선의 입장으로 봐서는 만약 일본이 황제국임을 인정하게 된다면 조선은 일본보다 한 단계 낮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새롭게 바뀐 일본의 외교문서, 즉 서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이 서계에 황제의 격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두 나라는 7~8년간 불편한 관계로 지내오던 터였다. 말하자면 외교문서인 서계(書契) 문제가 조선과 일본과의 최대의 외교적 현안으로 떠올랐으며, 이로 인해 몇 년 동안 두 나라 사이에는 공식 접촉이 단절되고 교착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조선의 사과를 요구하며 새로운 조약을 맺기를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또 끈질기게 서계 문제에 대해 따진다. 국력이 약해 이를 물리칠 힘이 없었던 조선으로서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협박과 무력시위 앞에 조선은 마침내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되었고 이 조약이 표본이 되어 서구 열강들과 차례차례 불평등한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도대체 운요호사건이 어떤 사건이었기에 그들이 그렇게 위력을 과시하며 사과를 요구한 것일까. 조선은 왜 그들의 요구에 맥없이 응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들의 강요에 의해 조선은 일본과의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지만 그것은 아무 대책없이 집 열쇠를 내어준 것이나 매한가지가 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조선은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끝내는 망하고 말았으며 그들의 압제 아래 백성들은 모진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현대사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말았으니, 민족이 분단된 채 질곡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 어쩌면 강화도조약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외국 배의 항행을 금지한다는 뜻의 해문방수타국선실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비
 외국 배의 항행을 금지한다는 뜻의 해문방수타국선실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비
ⓒ 이승숙

관련사진보기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아시아의 최강자가 되는 게 목표였다. 개혁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동등한 지위를 누리려고 했고 조선과는 새로운 관계 설정을 하는 교섭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번번이 조선이 외교문서인 서계의 접수를 거부하자 조선을 침략할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무단으로 우리 해안을 침범한 일본 군함

일본은 1875년(고종 12년) 5월 하순에 운요호를 포함한 군함 3척을 이끌고 조선의 영해를 침범했다. 그들은 동해안을 거쳐 부산에 닿았고 그곳에서 사격 훈련을 하며 군함의 위력을 과시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포함외교를 했던 것이다. 포함외교(砲艦外交)란 강대국이 무력을 앞세워 후진국을 압박하며 목적을 달성하는 강제적 외교 수단으로써 일본 역시 1854년에 미국의 포함외교에 두 손을 들고 개항한 전력이 있었다.

무게가 245톤에 달하는 운요호는 위력을 과시하며 서해안을 따라 강화도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9월 20일(음 8월 21일)에 강화도의 초지진 앞 바다까지 올라온 운요호는 무장한 병사 14명을 태운 작은 배를 내려 초지진으로 접근했다. 해안을 경계하던 초지진의 조선군은 예고도 없이 침입하는 정체불명의 배를 보고 접근을 하지 말라는 의미의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바 있던 조선으로서는 타국의 군함이 다가오자 침입으로 알고 대응을 했던 것이다.

조선군의 포격을 받은 운요호는 마치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양 초지진에 맹포격을 퍼부어댔다. 그 바람에 초지진은 부서지고 무너졌다. 그들은 뱃머리를 돌려 영종진(현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으로 갔다. 영종진에는 400여 명에 달하는 조선군들이 있었지만 근대화된 무기를 갖춘 일본군을 대적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병영과 민가에 불을 지르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이 싸움에서 조선군은 36명이나 전사했으며 포로로 잡힌 사람도 16명이나 되었다.

 1875년 9월 20일에 강화도 초지진 앞 바다를 침범한 일본 군함 운요호.
 1875년 9월 20일에 강화도 초지진 앞 바다를 침범한 일본 군함 운요호.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관련사진보기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그 다음 해인 1876년 1월 30일에 일본은 군함 5척에 1000명에 이르는 병사들을 태우고 강화도 앞 바다에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운요호 사건에 대해 책임을 물으며 따져 들었다. 운요호가 중국으로 가는 해도를 작성하기 위해 조선의 바다를 측량했으며 초지진으로 접근한 것은 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또 뱃머리에 일본 국기를 달고 있었는데도 조선군이 포격을 한 것은 명백한 주권 침략이라고 주장하며 조선의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옹색한 변명이었다. 군함의 경우 사용할 물을 충분히 적재하고 다니는데 물이 없어서 상륙을 하려고 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또 해도를 작성하기 위해 조선의 바다를 측량했다는 것 또한 명백한 불법행위이자 주권국인 조선을 침략하는 행위였다. 함부로 남의 나라 영토를 측량하는 것은 바로 주권 침해에 해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타국의 영토에 들어갈 경우 미리 알려 허락을 구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그들은 그런 절차도 하지 않았다. 일본 국기를 달았다고 했지만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을 개항시킬 핑계를 찾고 있던 차에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자 후안무치하게도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조선을 협박했다.

운요호에 대한 포격, 정당방위였다

더구나 강화도의 경우는 수도인 서울로 들어가는 관문과도 같아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국의 배라고 할지라도 항행권인 노인(路引) 없이는 함부로 다닐 수 없는 곳이었다. 1866년과 1871년에 양요를 겪은 조선으로서는 강화도의 방비를 철저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병인양요 후에 조정에서는 "외국 배의 항행을 금지한다"는 뜻의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비석을 강화해협의 해안 언덕에 세우고 일체의 외국 배의 통항을 금지했다.

이처럼 선박의 항행이 엄격히 금지된 강화해협을 더구나 조선 조정의 허가도 받지 않은 배가 무단으로 들어와서 물의 깊이를 재고 주변을 정탐하며 조사를 하니 어떻게 가만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내 집 앞마당에 무기를 든 괴한이 침입을 한 것과 비슷한 이치로써 주인의 입장에서는 침입을 저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니 조선군의 포 사격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다.

 불법 침범한 운요호를 맞아 항전중인 초지진의 모습.
 불법 침범한 운요호를 맞아 항전중인 초지진의 모습.
ⓒ 이승숙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처럼 일본은 도리어 조선에 책임을 물으며 사과와 개항을 요구했다. 남의 나라 땅에 무단으로 들어오는 것은 불법이고 이를 막기 위해 방어를 한 것은 정당방위임에도 일본은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따지고 들며 조선을 위협하고 윽박질렀다.

운요호사건의 책임을 물으며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기를 강요한 일본은 구로다 기요타카를 전권 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조선에 파견했다. 구로다 기요타카는 북해도를 일본으로 복속시킨 전례가 있는 사람이었다. 또 그는 외국과의 교섭관계에도 밝은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조선은 당시까지만 해도 근대적인 외교관계에 대해 무지했다. 조선은 대책 마련을 강구했고 이에 판중추부사인 신헌을 전권 대관으로 임명하고 강화도로 파견했다. 그러나 외교의 경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조약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조선으로써는 일본 대표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신헌은 전권 대관으로 임명을 받은 그 날부터 그와 관련된 모든 사항들을 글로 남겼다. 그가 쓴 '심행일기(沁行日記)'에는 매일의 일들이 빠짐없이 보고되었으며 왕에게 올리는 장계를 비롯해서 영종첨사, 초지첨사 및 통진 등지의 책임자가 올린 보고까지도 다 기록으로 남겼다. 또 일본측 대표와 나눈 대화 역시 문답 형식으로 자세히 기록하여 '심행일기'를 통해 강화도조약의 전모를 상세히 알 수 있다.  

신헌의 '심행일기'는 강화도조약을 맺기까지의 과정을 조선의 입장에서 기록한 글이다. 일본 대표와 끝없는 신경전을 펼치며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조약의 문안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들이 곳곳에 보인다. 신헌은 노구의 몸으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심사숙고하며 일본측 대표들을 만나 설득하고 또 강요한다. 

 강화도조약을 맺을 당시의 우리측 대표단과 일본측 대표단.
 강화도조약을 맺을 당시의 우리측 대표단과 일본측 대표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관련사진보기


불평등한 관계 개선해야...

그러나 근대적 외교관례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조선으로서는 일본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고 한 달여 동안 밀고 당기던 협상은 그들의 무력시위 앞에 마침내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문안들을 고치려고 했지만 그것은 대부분 조선의 국왕에 대한 예우문제에 국한되었을 뿐 정작 중요한 것들은 놓치는 우를 범한다. 그래서 12개조에 달하는 강화도조약의 조문들 대부분은 일본 측에 유리하도록 되어있는 불평등한 조약이 되고 말았다.

조일수호조규 즉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근대적인 최초의 조약이었다. 이후 조선은 쇄국의 문을 열고 서구 열강들과 차례차례 조약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강화도조약이 전례가 되어서 그 이후에 맺은 조약들도 모두 조선에게 불리한 불평등한 조약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현재에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한미행정협정이 바로 그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첫 단추를 잘못 채워서 그 다음 단추도 제 자리에 맞출 수가 없었던 전례를 강화도조약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무지와 국력의 허약함에서 비롯된 잘못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잘못을 알고 고치는 것은 흉이 아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고치지 않으면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방기이자 허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화도조약에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리고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미행정협정에서 우리 민족에게 이익이 되는 부분들은 챙기고 해악을 끼치는 조항들은 개선해 나가야 한다. 그것을 누가 해줄 것인가. 바로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