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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 문제는 최근 몇 년간 한국 경제의 최대 위험 요인으로 늘 꼽혀 왔다. 실제로 대다수 일반인이 체감하는 부채의 수준도 매우 심각한 상태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지난해 3분기 1060조 원(한국은행 발표)을 돌파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늘 가계부채 문제에 대해 '괜찮다', '일부 위험요인이 있지만, 관리 가능한 수준이다'라는 식의 입장을 되풀이해왔다. 그 '괜찮다'는 주장의 구체적 근거들이 매우 허약한데도 이런 문제를 제대로 짚은 전문가나 언론도 드문 편이다. 정부가 '괜찮다'고 주장하는 다섯 가지 주장의 맹점을 살펴보자.

사상 최대치 가계부채... 서민들의 삶은 곤두박질쳤다.
 사상 최대치 가계부채... 서민들의 삶은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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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소득층에 부채 몰려 있으니 안전하다?

소득이 많은 계층이 부채도 많은 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일어났던 미국의 경우 하위 20%에 비해 상위 20%의 부채 집중도가 한국보다 세 배나 더 높았다. 즉, 고소득층에 부채가 몰려 있는 정도가 한국보다 세 배나 더 강했어도 부채 위기의 충격을 피해 가지 못했다.

더구나 한국의 경우 고소득층 안에서도 부채를 많이 진 가구들이 한쪽으로 쏠려 있는 반면, 그런 부채 가구들은 위기 시 대응 자산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2013년 하반기에 발간된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를 보면, 상위 20% 가구 가운데 부채 가구는 부채가 없는 가구에 비해 부동산 등 실물 자산 규모가 65%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더구나 금융 자산의 편중 현상도 더 심해 부채 가구의 금융 자산 규모는 부채가 없는 가구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가계부채 폭탄이 터지는 위기 상황에서는 고소득층이라고 해도 당장 위기에서 벗어날 자금을 소득에서 확보할 수 없다. 한 달 월급이 1000만 원이라고 해서 당장 갚아야 할 수억 원의 빚을 월급으로 다 갚을 수는 없다. 물론 월 급여 등을 담보로 추가 대출을 받을 수 있으나, 위기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기도 녹록지 않다. 결국 자신이 축적해둔 실물 자산이나 금융 자산으로 부채를 갚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고소득층 가운데 부채를 많이 가진 가구들은 이 같은 대응 자산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소득층에 부채가 몰려 있으니 안전하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고소득층 가운데서도 부채 있는 가구와 없는 가구를 뭉뚱그려 평균을 내니 괜찮아 보일 뿐, 실제로 부채 가구만 놓고 보면 위기 시 더욱 위험할 수 있다는 게 더 정확한 진단이다.

#2. 금융 부채보다 금융 자산이 더 많아서 괜찮다?

1번 주장과 맞물리지만, 금융 부채보다 금융 자산이 더 많기 때문에 괜찮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온다. 물론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부채는 대부분의 경우 확정된 채무인데 반해 자산, 특히 부동산 등 실물 자산의 경우 가격 변동에 노출돼 있고, 부동산 거래 침체기에는 유동화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가계가 부채를 갚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단순히 자산이 많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 만약 정부 주장대로라면 그토록 많은 기업이나 금융 업체들이 숱하게 부도를 맞거나 파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주) OECD factbook 및 2013년 가계금융복지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선대인경제연구소 분석, 작성
▲ <그림> 주) OECD factbook 및 2013년 가계금융복지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선대인경제연구소 분석, 작성
ⓒ 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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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대부분 나라들의 가계는 순자산이나 금융 자산에 비해 가계부채의 비율이 모두 더 낮다. 즉, 금융 부채에 비해 순자산과 금융 자산 모두 몇 배씩 더 많은 것이다. 정부주장 대로라면 이들 나라는 금융 위기 등의 과정에서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어야 한다. 하지만 미국, 일본,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게 이미 현실로 드러났다. 더구나 한국의 경우는 부채 대비 순자산 규모가 오히려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기 때문에 굳이 따지면 다른 나라보다 더 나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국 가계의 자산은 실물 자산 쪽으로 극단적으로 편중돼 있어 금융 자산 대비 부채 비율은 다른 나라보다 평균 두 배 이상 더 높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최악의 사태에 직면했을 때 부동산 등 실물자산은 아무리 많아도 현금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유동성이 높은 금융자산을 이용해 부채를 갚아야 할 경우가 속출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 가계들은 금융자산 규모 대비 부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비해 매우 높아 부채 위기에 노출되기 매우 쉬운 재무 구조를 갖고 있다. 한국보다 금융 부채 대비 금융자산 비율이 더 높은 나라들도 위기를 피해 가지 못했는데, 한국은 괜찮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3. 주택대출규제 완화로 가계부채의 질적 건전성이 높아졌다?

정부는 LTV(주택담보인정비율) 및 DTI(총부채상환비율) 대출규제를 완화하면서 높은 이자의 제2금융권 대출이 상대적으로 이자가 낮은 제1금융권으로 옮겨올 것으로 예상했다. 이로 인해 가계부채의 질적 건전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했다(관련기사 : 최경환 경제팀 정책방향 '빚 더 내라'?). 그런데  주택대출 규제 완화 이후 지난해 3분기 제2금융권의 신용잔액은 오히려 2분기보다 더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제2금융권의 대출이 제1금융권으로 이전된 게 아니라 제1금융권과 2금융권의 가계 대출이 함께 대폭 증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 정부는 한국 가계 부채 위험성을 지적한 지난 해 11월 4일 자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대해 "가계 부채 총량은 다소 증가했으나 질적으로는 개선됐다"며 "한국 소비자들이 상대적으로 고금리인 비은행 대출 대신 저금리인 은행 대출로 이동하면서 이자 부담이 경감됐다"고 해명했다.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사실 주택대출규제 완화로 가계부채가 양적, 질적으로 악화될 것이라는 건 처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우리 연구소를 비롯해 많은 관련 전문가가 지적했던 것처럼, 금리를 낮추는 한편 주택대출규제를 완화하면서 부동산 띄우기를 부채질하면 1, 2금융권 가리지 않고 가계들이 전반적으로 부채를 늘릴 수밖에 없다.

#4. 전세 제도 때문에 괜찮다?

한편에선 한국에만 있는 고유한 전세 제도 때문에 집주인들이 금융권 부채를 적게 빌려 써도 되고, 세입자들이 고통을 분담하기 때문에 전세 보증금이 완충 역할을 하면서 충격을 줄여준다고 주장한다. 이는 평상시에는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 주장은 역설적으로 한국 가계 부채 문제의 심각성을 왜곡하는 한편, 위기 시의 작동 메커니즘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국내 전세 보증금 규모는 최소 600조 원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는 집주인이 투기 목적이 아니라 여유 있는 주거 공간을 세입자에게 전세로 준 경우도 있겠지만, 전세를 끼고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여러 채 산 경우도 허다하다.

따라서 전세금의 절반인 300조 원을 주택 소유자가 금융 회사 대신 세입자에게 빌린 돈이라고 보면 현재 가계부채는 1060조 원(2014년 3분기 기준) 수준에서 1360조 원 수준으로 증가하게 된다. 주택 대출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과소 평가되는 착시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지금 주택 대출액은 530조 원 수준이지만, 전세금의 절반만 포함해도 바로 830조 원 수준으로 급증하게 된다.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언제든지 빼줄 수 있을 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직후처럼 역전세난 등이 발생하면 전세금이 묶이면서 가계부채 문제를 극도로 악화할 수 있다. 문제는 위기는 단발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문제들이 서로 악순환을 그릴 때 발생한다는 점이다.

#5. LTV 비율이 안정적이라서 괜찮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겸 기획재정부 장관.
 최경환 경제부총리겸 기획재정부 장관.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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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LTV비율(주택담보인정비율. 집값 5억 원인 아파트에 대출액이 3억 원이면 LTV비율은 60%가 된다)이 5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니 집값이 웬만큼 떨어져도 괜찮다'는 것이 정부의 주장이다. 최경환 경제팀이 LTV 비율을 최고 70%까지 올린 것도 이 같은 인식에서 나온 조치라고 할 수 있다(관련기사 : 결국 부동산 규제 풀린다... LTV 70%로 완화).

하지만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 시장은 일부 자산이 거래돼 전체 자산의 가격이 결정된다. 과도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는 일부 가계의 투매가 일어나면, 투매 가격이 전체 자산 가격을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평균 LTV보다 집값 하락 시 부채 부담을 이기지 못해 보유 주택을 투매할 가능성이 높은 집단, 즉 LTV 비율이 높은 가계의 대출 비중이 얼마나 늘어나는지를 훨씬 더 주의해서 봐야 한다. 그런데 이 같은 '고 LTV 가구'의 비율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최경환 경제팀은 주택 대출 규제를 완화해 이 같은 고부채 가구 증가를 부추긴 셈이다. 7년째 진행되고 있는 '대출 갈아타기 정책'에 따라 대출자가 갈아타기를 하려고 해도 LTV 비율 상한을 넘는 금액만큼은 상환해야 한다. 그런데 집값이 하락한 지역의 하우스푸어 가계가 그 같은 상환을 할 수 없게 되자, LTV 한도를 높여 그 같은 갈아타기가 다시 가능하게 해준 셈인 것이다. 그렇게 당장 집값 하락은 막고 대출자들의 개인파산을 막았을지는 모르지만, 길게 보면 부실 가능성을 더욱 높인 위험 천만한 대책이다.

또한 현재 LTV 산정 기준이 되는 국민은행 주택 가격은 호가 위주 가격으로, 실제 주택 가격은 이보다 더 떨어진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실제 LTV 비율은 금융권이나 금융 당국이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더 높다고 봐야 한다. 실거래가는 5억 원인데 호가는 여전히 6억 원 수준으로 설정돼 있는 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연구소가 경기도 파주시의 한 아파트 937세대의 주택담보대출 실태를 분석한 결과, 이 아파트 단지의 경우 호가 시세를 기준으로 금융권에서 고부채 가구로 분류하는 LTV 60% 이상 가구 비중이 50.2%로 절반을 넘는 상황이었다.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하면 이미 60% 이상 가구 비중이 61.6%로 증가한다.

더 심각한 것은 대출금에 전세액까지 포함할 경우 LTV 비율 100% 이상이 절반에 육박하는 47.9%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전체 아파트의 절반 가량이 이미 그 자체로 '깡통 주택'이 돼 있는 것이다. 부동산 거래가 얼어붙게 되면 거래되는 가격은 실거래가가 기준이 되고, 실거래가는 더욱 떨어지게 될 공산이 크다. 당장 LTV 수준이 낮다고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부동산 시장 거품 걷어내고, 가계부채 다이어트 유도해야

지금까지 본 것처럼 국내 가계 부채 문제는 '괜찮다'는 정부 주장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계속 악화하고 있다. 심각한 가계 부채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은 정부가 자신의 임기 안에만 무탈하면 된다는 식의 근시안적 태도를 벗어나 부동산 시장의 거품을 점진적으로 해소하고, 가계부채 다이어트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는 것이다.

또한 지금처럼 소수 재벌 대기업 지원 중심의 경제 정책에서 벗어나 일반 가계의 물가 부담을 덜 수 있도록 인위적인 고환율 정책을 시정하고, 불요불급한 재정 지출을 줄여 일반 가계들의 생활 수준을 실질적으로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전환해 나가야 한다. 또한 '하우스푸어' 대책이라는 미명 아래 부동산 다주택 투기자나 건설업체들을 지원하는 정책들을 내놓는 대신 공공 재원으로 서민 가계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재무상담과 컨설팅을 시작해 가계의 부채 조정을 적극적으로 유도해야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파악된 실태를 바탕으로 세부적인 유형별 맞춤형 가계부채 악화 방지 대책을 내놔야 한다. 막지도 못하는 부동산 거품을 억지로 틀어막기 위해 미련하게 국가 재원을 탕진하기보다는, 그 같은 재정 여력을 아껴뒀다가 장기 침체로 고통 받는 저소득 계층의 경제적 충격을 줄이는 사회 안전망 확충 등에 써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선대인경제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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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가계부채 , #실거래가, #주택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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