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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인 무안군 신월리에서 바라본 고이도.
 내륙인 무안군 신월리에서 바라본 고이도.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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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인 전남 무안군 운남면 신월선착장에서 섬인 신안군 압해읍 고이도까지는 직선거리로 1km 남짓. 그 사이 바다가 가로놓여있지만 가까운 탓에 섬은 섬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 간격으로 오가는 작은 도선을 타고 10분 남짓 바다를 건너면 왕을 자처했던 자가 살았던 섬 고이도에 도착한다.

아무리 짧은 거리지만 바닷길은 바닷길이다. 썰물에서 밀물로 바뀌는 간조대의 물살이 작은 도선을 횡로를 힘들게 한다. 그리고 겨울 한파를 머금은 갯바람은 비수보다 날카롭다. 선실에 들어가 바람이라도 피하고 싶지만 너덧 명 정도 엉덩이를 걸칠 수 있는 좁은 선실은 동네 어른들로 꽉 차 있다. 점퍼에 달린 모자를 꽉 조인다.  

'왕도'라 불린 섬, 고이도

'고이도(古耳島)'는 일제 말까지도 '왕도'라 불렸다. 고려 태조 왕건의 작은 아버지 왕망이 고려 왕실의 전복을 꾀하며 왕이라 자칭하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왕산에는 둘레가 500m가 넘는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연구자들은 고려 이전의 삼한시대 또는 후삼국시대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도'라 불렀던 섬을 '고이도'로 바꿔 부른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왕을 칭한 자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 옛 고(古)자와 섬의 모양이 귀(耳)를 닮았다하여 '고이도'라 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설은 마을 유래지에 의한 것인데 섬 모양이 고양이(고이)처럼 생겼다하여 '고이도'라 했다고 한다.

왕산에 남아 있다는 성지의 흔적을 쫓아 오른다. 해발 200m가 되지 않는 높이지만 경사가 만만치 않다.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듯 가시덤불이 심하다. 20여 분을 올라 그나마 성축이 남아 있다는 지점에 이르렀다.

산성이 남아있는 고이도 왕산에서 바라보면 내륙으로 가는 무안 일대의 풍경이 잡힌다.
 산성이 남아있는 고이도 왕산에서 바라보면 내륙으로 가는 무안 일대의 풍경이 잡힌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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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사이로 배를 탔던 신월리 선착장과 무안 일대의 내륙이 시야에 들어온다. 성벽을 따라 돌면 인근의 병풍도, 매화도, 선도 등도 한 눈에 잡힌다고 한다. 왕을 자처한 자가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군사적으론 매우 유용한 성이었을 것 같다.

이와 관련 강봉룡(목포대 사학과 교수) 도서문화연구원장은 "고이도는 장보고 바닷길의 거점이자 왕건의 서남해지방 패권 장악의 거점이었다"라고 말한다.

일본 천태종의 대성자(大成者)였던 엔닌은 장보고의 도움으로 835년에서 847년까지 12년 동안 중국에서 유학했다. 그의 귀국길은 산둥성 막야구를 출발해 고이도를 비롯한 한반도 서남해를 거쳐 규슈에 도착하는 경로였다. 이는 장보고의 바닷길이라는 것이다.

강 원장은 또 고려사를 인용해 "912년에 서남해 원정에 나선 왕건이 서남해지방의 중심 도서인 진도군을 점령하고, 이어서 영산강하구의 압해도 인근에 있는 작은 섬인 고이도를 위복(威服)시켰다"라며 "이는 왕건이 영산강구로 진입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한 셈이 되었다"라고 그 당시 고이도의 정치 군사적 위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명징하게 기록된 역사와 가로지르며 왕을 자처했던 한 사내의 이야기가 겨울바람을 가른다. 도처에서 왕을 자처했던 자들이 봉기하던 시절이었다. 견훤이 그랬고 궁예가 그랬으며, 수달이 그랬고 왕건이 그랬다. 그 또한 왕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삼국 통일의 왕관은 왕건이 차지했다.

왕산에서 내려오는 길, 공사를 하려고 객토를 하던 자리에 박혀있는 돌덩이가 눈에 들어온다. 성곽을 쌓는 돌이 되지 못한 돌덩이는 농부의 밭을 지탱하는 돌로 수백 년을 살아왔다. 왕의 돌이 아닌 농부의 돌, 전쟁의 돌이 아닌 평화의 돌...

지금은 왕도, 왕의 후손도 살고 있지 않은 작은 섬. 그 착한 돌덩이들은 280여 명의 주민들의 논과 밭을 지탱하며 오순도순 살고 있다.

왕산에서 내려오는 길, 밭을 지탱하고 수백 년 살았을 돌덩이가 눈에 잡힌다.
 왕산에서 내려오는 길, 밭을 지탱하고 수백 년 살았을 돌덩이가 눈에 잡힌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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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고이도, #왕건, #강봉룡, #작은 섬,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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