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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3일 토요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아래 역사관)에서 독립기념관·경향신문사 공동 기획 '독립운동가 역사탐방 프로그램' 참가자를 대상으로 한 '평화 길라잡이 특별 안내'가 있었습니다. 토요일이라 정말 많은 분이 함께 하셨습니다. 저는 특별 안내의 안내자가 아니라, 관람객으로 함께 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보안과청사 앞 안내>
 <서대문형무소 보안과청사 앞 안내>
ⓒ 오경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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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길라잡이는 서울KYC 회원으로,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시민에게 평화와 인권의 관점으로 안내하는 자원 활동가입니다. 지워지고 왜곡된 역사가 아닌, 올바르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며, 무뎌진 가슴에 평화 감수성을 틔우는 참여와 나눔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매주 일요일 정기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근현대사와 독립 운동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신 분을 대상으로 진행된 안내라, 기본 역사관에 대한 설명부터 자유와 평화를 향한 현실의 성찰까지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를 향한 한국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이라는 영국 신문 기자 맥켄지의 저서를 설명하며, 러일전쟁 종군기자로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던 맥켄지가 우리나라 의병을 만나 생각이 변화하게 된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당시 일본은 외세에 우리나라가 일본의 보호국으로 근대화되는 것을 좋아한다는 선전을 했는데, 안내 선생님은 맥켄지가 직접 만난 의병에게 들은 "우리는 질 것을 알지만, 일본의 노예로 살기 싫다"는 말을 언급하시며 3·1운동, 의열 투쟁, 의병 전쟁 등 여러 독립 운동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녀노소에 관계 없이(소수 친일파 제외) 독립을 원했다는 것을 강조해주셨습니다.

독립 국가에서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독립 운동가들이 꿈꾸던 모습일까'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노동자가 일본인 감독에게 구타 당하는 일로 시작된 원산 총파업에서 최초의 고공 농성을 했던 을밀대 고공농성 여성 노동자 강주룡에 대해서도 짧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지금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여성의 차별과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오버랩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해방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대법원 판결 18시간만에 8명이 사형 당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설명하면서, 사건에 대한 설명 뿐 아니라 피해자 아들이 동네 형들에게 간첩, 빨갱이라며 목에 새끼줄 걸려 개처럼 끌려다닌 일화, 사형 집행 직후 고문 당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에서 문정현 신부님이 다리를 절게 된 일화 등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어렵게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고 국가로부터 받은 국가 배상금을 받았으나, 국가가 국가 배상금을 과다하게 지급했다며,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해 승소 판결을 받고,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3·1독립 만세운동으로 일본인 민간인이 다치지 않았다는 걸 아시는 분이 계실까요? 평화적으로 투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실패한 운동이라고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까요? 일제가 그런 평화적 투쟁 방법에 두려움을 느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이 역사관 앞에 건립을 시도하다가, 광복회 등의 반대 때문에 마포에 설립된 것을 아시는 분이 있을까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부끄러운 역사라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기억하지 않는 일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광복이 되기 전 일제 강점기를 통해서 받은 피해가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투쟁하신 독립 유공자 후손들과 친일파 후손들의 현실에 대해 가슴 아프지만 냉정하게 기억할 때 바르게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라가 없어졌을 때도, 우리는 중국에서 임시 정부를 세워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임시 정부의 역사를 잘 알지는 못 합니다. 임시 정부 요인들이 광복된 나라로 돌아올 때, 미군정에서 임시 정부 요인들이 돌아오는 것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일제 친일 경찰이 해방 이후 경찰 조직을 차지하게 됐다는 것은 역사의 슬픈 뒷이야기입니다.

안내자 선생님은 또 헌법 전문의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는 부분과 임시정부 건국 강령을 읽어주셨는데, 왕이 주인인 나라에서 국민이 주인인 나라로의 의식 변화와 민주 공화국이 주는 의미와 더불어 3·1운동이 시대를 넘어 역사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의열단 활동을 했던 숨겨진 독립 운동가 김원봉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김구 선생과 함께 현상금 1, 2위를 하던 독립 운동가가 분단된 현실에서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고 서훈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은 분단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1호 사형수로 기록된 사람은 의병 허위 장군입니다. 사형제가 법제에 남아있는 현실에서 의병으로, 민주화 운동가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분들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력 범죄에 대해서도 국가가 사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사형수가 되기 전까지 교화의 기회를 줬던 것인지에 대해 묻는 질문에서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사상범이었던 독립 운동가를 감옥에 가뒀던 일제의 치안유지법이 국가보안법과 비슷한 법이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 했습니다. 독립운동가를 가둘 수 있었던 사상을 통제하는 법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들었는데, 스스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공포와 고문을 이기고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치안유지법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엄혹한 시대에 치안유지법으로 처벌받는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일화를 통해서 오늘날 평화로운 삶을 선택하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가 될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식민의 역사, 독재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무엇일까요? 많은 활동이 있겠지만 서울KYC 평화길라잡이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안내 활동을 같이 해주시길 바래봅니다. 그것이 당신을 조금 더 평화롭게 할 것입니다.

평화길라잡이 8기 모집 안내 및 교육 내용
▲ 평화길라잡이 8기 모집 안내 및 교육 내용 평화길라잡이 8기 모집 안내 및 교육 내용
ⓒ 오경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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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5년 1월 8일까지 평화길라잡이 8기를 모집중입니다. (http://seoulkyc.or.kr/blog/admin/3342)



태그:#평화길라잡이, #서대문형무소, #서울K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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