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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제는 정말 만나고 싶었던 옛 친구 L을 만났다. 열네 살 적에 가방공장에서 처음 만났고, 20대 후반까지 절친한 친구였다. 경기도 성남시 은행동에 친구의 집이 있었는데, 고아나 다름없던 나는 자주 그 집에 가서 밥도 먹고 잠도 잤다. 그 친구는 명절 때마다 갈 곳이 없어 공장 기숙사에 있는 나를 일부러 찾아와 같이 놀아주던 고마운 친구였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내가 늦은 나이에 야학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할 때, 용돈하라고 종이돈을 주머니에 꾹꾹 찔러주던 친구였다.

1970년 대 가방공장에서 만난 내 친구

지난해 마지막 날, 늦은 시간이었다. 내 전화기에 모르는 전화번호가 떴다.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이종득이냐?"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나도 단박에 그가 L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 나야. 반갑다. 보고 싶었어." 
"그래, 네 소식은 잘 듣고 있었어. 소설책도 사서 읽었다. 그 소설에 내 이름도 나오더라."

우리 둘은 상투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았고, 건조한 대화를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다가 빨리 한 번 만나자는 말로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생각해보니 우리 둘은 정확하게 26년 만에 통화한 것이었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헤어졌다가 쉰 살을 훌쩍 넘긴 지금 서로의 안부를 물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반가움보단 어색함이 더 컸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어제 일부러 먼 길을 찾아 온 친구를 만나보니 알 것 같았다.

우리 둘이 그냥 살아온 이야기만 주고받았다면 대화도 편했을 텐데, 우리 둘의 마음속에는 똑같이 불편한 생각을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서로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말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서른 세 살에 결혼한 친구는 총각 때부터 신설동에서 제법 큰 미싱과 가방 부자재를 파는 가게를 운영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친구 중에 가장 먼저 사업을 시작했다. 그만큼 부지런하고 능동적인 성격이었다. 마음 씀씀이도 좋아서 어려운 친구나 주변 사람들에게 선뜻 지갑을 열어 도움을 주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의 도움을 하도 받아서 스물 몇 살 적부터 그에게 더 이상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연락을 끊고 살았던 것이다.

그랬던 친구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친구 역시 1997년 불어 닥친 IMF 한파를 피해가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저기 깔린 외상값은 받을 수 없었고, 줘야 할 돈은 다 줘야 했다. 받을 사람을 찾아가면 돈이 없다고 읍소하거나 배 째라 벌렁 누워 버렸고, 줘야 할 사람은 매일 돈 갚으라고 두 눈을 부릅뜨고 덤벼들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살아온 친구 부인이 빚 독촉에 그만...

여기저기에서 대출을 받아 줘야 할 돈을 주고 나니 가게를 운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작은 가방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식 둘을 키우면서 졸지에 진 빚을 갚아가며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다. 그래도 자식들을 위해서 억척같이 일을 했지만 큰 딸이 이번에 대학에 들어가는데, 등록금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집 사람은 이 년 전에 자살했어."

내가 괜한 것을 물어보았구나 싶어 술잔을 들어 마시고나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데, 친구가 흐르는 눈물을 거칠어진 손등으로 훔쳐냈다. 그러더니 '너무 억울해서 못살겠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지금도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 하는 것이었다.

친구는 IMF 때 진 빚을 갚는데, 십 년이 걸렸다고 했다. 지하 가방공장에서 먹고 자며 부부가 밤늦도록 일해서 번 돈은 정해진 날짜에 대출금 이자로 빠져나갔다. 그래도 다른 사람 원망 안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2009년 아이들도 크고, 빚도 거의 다 갚아가서 대출을 받아 조그만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런데 동대문시장에 납품하던 일감이 줄어들었다. 인건비가 싼 동남아 지역에서 동대문 납품 가방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교통이 좋아지니까 주문과 생산에 따른 주문사항 등의 소통이 편리해졌다. 업자들은 생산 조건이 좋은 동남아 지역으로 일감을 몰아주었다.

일감이 줄어들자 노는 날이 많아졌고, 수입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아파트를 팔아야 했는데, 지하공장에서 십년 넘게 살아온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바로 결정을 내지 못했단다. 더 열심히 하다 보면 좋아지겠지 하는 기대도 있었고, 사춘기인 아이들이 그 작은 아파트에 입주하던 날 좋아하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서 도저히 아파트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친구는 부인 이름으로 아파트를 사며 은행에서 받은 대출금과 보험회사에서 대출받아 쓴 돈의 이자를 제 때 내지 못하게 되었고, 신용카드 회사에서 연체 독촉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와 아내는 전화기를 꺼 놓았다. 그러자 은행과 신용카드 그리고 보험회사 직원들이 일거리가 없어 노는 공장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친구의 아내는 결국 더는 견디지를 못하고 이 세상에서 도망쳐 버린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은 정말 지옥이야. 애들만 없으면 나도 당장 도망치고 싶어. 친구야, 나 어떻게 살아야 되니?"

내 땅만 팔려도 친구와 함께 남은 인생 잘 살고 싶은데...

나는 친구에게 어떤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내가 소설가로 데뷔해서 상도 받고, 책도 내니까 대부분의 친구들은 돈을 많이 벌고 있는 줄 안다. 게다가 30대 중반에 오퍼상을 하면서 돈을 좀 벌었다는 소문이 친구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니, 이 친구 역시 내가 돈 좀 가지고 있다고 믿는 듯했다. 더군다나 아내가 학원을 운영하고 있으니 내가 돈이 없어서 도와줄 수가 없다고 하면 이 친구는 얼마나 큰 실망, 아니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을까.

솔직히 나는 돈은 없지만 땅은 있다. 홍천에서 농사지으면서 정착하려고 사둔 밭 1000평하고, 8년 전에 나쁜 마음을 먹고 일확천금을 노려 사둔 임야 6000평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 땅을 친구에게 줄 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당장 돈이 되는 땅이라면 팔아서 얼마라도 쥐어주어야 내가 어려울 때 받은 신세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것이다.

두 딸을 키우며 사는 나도 형편이 어려워 대출받아 쓴 이자를 겨우 갚아가며 살고 있는 처지다. 아내가 운영하는 학원에서는 생활비 정도만 겨우 벌고 있다. 땅을 손해를 보더라도 팔아야 해서 부동산에 내놓은 지 2년이나 되었지만, 거래가 안 되고 있다.

나는 결국 어제 밤 친구를 보내면서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잠을 설쳤다. 내가 왜 돈이 없다고 거절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친구의 눈빛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26년 만에 만난 친구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말한 그 친구의 절실한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아직은 대한민국이 살 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친구가 경험했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만난 내 소중한 친구와 지금의 위기를 잘 넘기고 남은 인생 잘 살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쓴다.


태그:#지옥같은 세상, #돈,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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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아재양념닭갈비를 가공 판매하는 소설 쓰는 노동자입니다. 두 딸을 키우는 아빠입니다. 서로가 신뢰하는 대한민국의 본래 모습을 찾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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