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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얼굴
▲ [ 당신에게 실크로드 03] 강박증을 지닌 황제- 시안 01 병마용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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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흐르는 곳에 사람이 살았다. 황하다. 관중평야에 도시가 세워지고, 사람들은 이 일대를 중원(中原)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주의 천자는 수도를 세웠고, 진의 왕이 천하를 통일했다. 황제가 죽자 나라도 기울었다. 유방과 항우가 이곳을 탐하고, 한무제는 장건을 보내 서쪽 길을 열고 천마를 얻었다. 당나라의 승려 현장은 인도에 다녀왔고, 양귀비의 강아지는 사마르칸트에서 왔다. 이백은 샤프란으로 빚은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지금 이곳의 이름은 시안. 옛 이름은 장안(長安)이다. 이 이름에는 영원한 평안과 번영의 바람이 담겨 있다.

순결하고 유일한 존재의 청진사

기차가 시안에 도착했다. 베이징 친구 집에서 지내는 동안, 몸이 시름시름 아팠다.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했다. 직장을 새로 옮긴 기분이랄까. 불안하고 예민했다. 하지만 야간 기차에서 꼬질꼬질하게 잠을 자고 나자 거짓말처럼 몸이 나았다. 아무데서나 잘 수 있고, 아무 거나 먹을 수 있는 장기 여행자의 체질로 돌아왔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여행을 할 때 컨디션이 좋은 편이다. 한국에서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남의 이목을 신경 써야 한다. 늘 긴장 상태다. 하지만 여행을 할 때는 내가 어떻게 하고 다니든 눈치 볼 사람이 없다. 기차역 세면대에서 한 손으로 대충 세수를 하며 한국을 떠난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시안에 도착해서 한숨 자고, 눈을 뜨자마자 향한 곳은 고루 뒤편에 위치한 회족거리였다. 야시장 가판대에서 파는 양꼬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이제 내가 서쪽으로 길을 떠났다는 것이 실감난다. 지금부터 내가 향하는 세계는 양고기의 세계인 것이다. 

실크로드 여행 내내 함께 한 양꼬치, 사랑해요~
▲ 양꼬치 한 개 5위안 실크로드 여행 내내 함께 한 양꼬치,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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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장은 멋지다. 아니, 멋지다 라는 수식어로 부족할 정도다. 화려한 불빛에 이국적인 음식, 그리고 가격도 저렴하다. 양꼬치 외에도 한치를 꼬치에 꽂아 철판에 구운 후 향신료인 즈란을 뿌린 간식도 인기다. 석류 주스나 매실차, 요구르트 등 다양한 음료수와 회족들의 빵, 족발, 메추리알 구이, 바나나 튀김 등 신기한 음식들이 가득하다. 이것저것 시험 삼아 맛을 보고 입가심으로 수박조각을 사먹었다. 수박은 장건이 서역에서 가져왔다.

눈썹이 짙고 눈이 큰 사람들이 많다
▲ 회족 청년 눈썹이 짙고 눈이 큰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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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족들은 대부분 사람 좋은 웃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회족 남자들은 잘생겼다. 일단 눈이 크고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피부 톤도 하얀 편이다. 이 회족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어느 날 당태종은 꿈에서 용에게 쫓기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녹색 옷을 입고 터번을 쓴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 해몽을 해보니 서방의 예언자 무함마드라고 했다. 사신이 가서 무함마드 대신 선교사와 3천 명의 호송 군인을 데리고 왔다. 이 3천 명의 호송군인이 오늘날 회족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설은 8세기 중반 당나라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서역에 원군을 요청하자 이슬람 세계에서 군대를 파견했다고 한다. 전쟁 후 돌아가지 않은 아라비아의 병사들이 오늘날의 회족의 뿌리라는 설도 있다. 자신들의 기원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바로 믿음이다.

이 회족거리에 청진사가 있다. 돔 모양의 천장도 없고, 미나레트도 없는 중국의 이슬람 사원이다. 중국에서 이슬람 사원은 모두 청진사라고 부른다. 청은 맑음을, 진은 진리를 뜻한다. 순결하고 유일한 존재, 바로 알라다.

좁은 골목을 미로처럼 빠져나가면 청진사가 나온다. 간판이 없으면 여기가 도교 사원인지 불교 사원인지 모를 정도다. 안에 들어가 보면 흥미롭다. 이슬람은 형상이 있는 것을 섬기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청진사 기와에는 악에서 지켜주는 도깨비가 새겨져 있었다. 연꽃과 용이 가득한 비석도 보인다. 동방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만났던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만큼이나 복잡한 문명교류를 보여준다.

중국식 외경과 이슬람교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청진사 예배대전 앞 중국식 외경과 이슬람교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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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청진사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예배대전에는 어떠한 신상도 없이 그저 텅 비어 있다. 천 명이 한꺼번에 기도할 수 있다는 공간이다. 네모반듯한 공간은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나무 바닥과 카페트를 살짝살짝 밟으며 메카로 향하는 방향에 서보았다. 시간이 멈춘 기분이다.

천천히 벽을 따라 걸었다. 나무 벽엔 빼곡히 코란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엔 한자 번역이 적혀 있다. 실크로드가 빚어낸 다양함 속에도 불변의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변치 않는 것들을 보면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 웃음을 보이면 마주 웃어주는 회족 할아버지들도. 엉덩이가 뻥 뚫린 옷을 입고 있는 아기의 천진한 얼굴도. 소중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할아버지~ 부르니까 마주 웃어주신 분
▲ 회족 할아버지 할아버지~ 부르니까 마주 웃어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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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사 입구에서 마주친 아기
▲ 회족 아기 청진사 입구에서 마주친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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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 좋게 여행을 결심하고 준비했지만 늘 불안했다. 베이징에서 친구 조슬린한테 울며 불며 내가 이 길을 왜 나섰는지 모르겠다며 후회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 청진사에서 회족 할아버지의 선한 눈빛을 보며 고쳐 생각했다. 여행이 힘들 수도 있다. 실크로드를 완주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여행중이다. 나이 값을 하지 않아도 되고, 이젠 누군가의 선후배가 아니어도 된다. 한국에선 늘 긴장해서 굳어 있던 어깨가 풀린 것이 느껴졌다. 잘못해도 괜찮다. 여행 중이다. 그냥 이렇게 계산 없는 웃음을 가슴에 담으면 된다. 어디에서든 이렇게 소중함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드디어 어깨에서 완전히 힘을 뺐다.

100% 한족의 얼굴

도쿄에 있을 때였다. 조선족 위씨가 와서 물었다. "정상, 정말 한민족이 맞아요?" '한민족'이라는 단어가 뭘 뜻하는지 짐작이 안 가서 대답을 못하고 있자 그는 다시 물었다. "혹시 아빠나 엄마가 화교 아니에요?" 광대뼈와 찢어진 눈이 전형적인 중국 동남부 여자의 얼굴이라는 거다. 한국어가 서툴러서 그랬겠지만 '눈이 찢어져서'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바람에 상처 받았다. 잘도 남의 콤플렉스를 들춰내다니.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인데 정말 한국어가 서투르긴 했나?

시안의 게스트하우스 한탕인. 베이징에서는 친구 집에 묵었기에 이곳이 처음 묵어보는 중국 게스트하우스다. 숙소는 기대 이상이었다. 흠잡을 부분이 하나도 없다. 6인실마다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고, 침대마다 전용 전등과 콘센트가 마련돼 있다. 옥상에는 탁구를 즐기거나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로비의 바에선 술을 마실 수 있다. 그리고 젊은 스태프들은 알아듣기 쉬운 영어를 구사했고, 관광지가 깔끔하게 정리된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숙소에는 외국인들도 많았지만 중국 여행객도 많다. 대부분 20초반의 학생들. 브랜드 운동화와 기능성 아웃도어복, 그리고 새로 산 배낭을 가지고 있었다. 듣던 바와 달리 중국인들은 배타적이지 않았다. 중국인처럼 보이는 내 외모 때문에 처음에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가, 한국인임을 알고는 바로 영어를 쓰거나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말을 걸었다. 대부분 중국의 동쪽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판과 허도 나의 '완벽한 한족 얼굴' 덕분에 만난 친구들이었다. 숙소에서 마주친 허가 갑자기 중국어로 말을 쏟아내기에, 내가 아는 모든 중국어 구사했다 "못 알아들어(팅부동, 听不懂), 나 한국사람이야 (워쓰한궈련, 我是韩国人)" 그제야 떠듬떠듬 영어로 말을 건다. 그리고 다시 웃으면서 말한다.

"진짜, 한족인 줄 알았어."

판과 허는 중국 저장성 리수이에서 왔다. 한국에 같은 한자를 쓰는 지역이 있다며 한자를 써보이는데 여수(麗水)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허는 지역 공무원, 판은 중국에서 가장 큰 통신사에 취직을 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 시간이 남아, 둘이 함께 여행 중이라고 한다. 내가 앞으로 투르판, 우루무치, 카스와 같은 서쪽으로 간다고 하자 표정들이 심각해진다.

"너 상하이, 청두, 리장 이런 데 가봤어? 중국을 보려면 동쪽을 봐야지. 문화도 자연도 중국적인 거라고 할 수 있어."


리장의 아름다운 자연과 상하이의 스카이라인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다.

"그럼 서쪽은 중국적이지 않는 거야?"  대답이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렸다. "역사적으로 같은 중국이긴 하지만..." 판의 말꼬리가 흐리다. "가본 적은 있어?" "없어."

중국의 서쪽은 그들에게도 외국이었다.

강박증을 가진 황제, 진시황

어느새 중국 친구들은 내 이름의 가운데 자를 따 샤오(曉, Xiao)로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성만 따서 허와 판이라 불렀다. 이제 막 신입사원이 되는 그들. 사회 초년생들에게는 최고, 최대, 최초 등 '최'가 붙은 것들은 좋은 자극제가 되는 법이다. 전날도 함께 산시성 역사 박물관에 가는데, 그들은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가자마자 가이드를 고용할 거야. 중국 최대의 박물관이니까 길을 잃을 수도 있거든" "그거 알아? 여기에 최초로 발명된 종이가 전시되어 있대."

병마용을 향하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306번 버스에서 내려 병마용으로 향하는 판과 허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걸어도 되는 거리를 굳이 5위안을 내고 전동차를 타고 가잖다. 하긴, 인류 8대 불가사의라고도 하는 세계 최대의 무덤이다. 책이나 화면으로만 보던 그 곳을 직접 눈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흥분되는 일이긴 하다. 또 유구한 중국의 역사라는 자부심도 한 몫 했을 거다.

중국 역사상 첫 번째 황제
▲ 진시황 중국 역사상 첫 번째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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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병마용이나 진시황에 대한 자료를 들추면 들출수록 내게 드는 강한 의문은, "이 양반, 강박증 아냐?"였다. 13살 소년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죽음이 뭔지 알기도 전에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셈이다. 한편 그는 죽지 않기 위한 방법에 집착했다. 그는 서불(서북)에게 어린남녀 수천 명을 주고 동쪽 삼신산(三神山)으로 보내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했다. 물론 서불은 돌아오지 않았다.

진시황은 알까. 그의 꿈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툭하면 '진시황의 불로장생약, 000'로 선전하는 빌미가 되었다는 걸. 동충하초, 영지버섯, 산삼, 황칠나무, 다시마, 명월초, 패왕수, 백년초, 오디... 이 모두가 진시황이 찾던 불로장생약이라고 주장한다.

진시황은 통일 후 봉건제를 폐지하고 지방관을 파견해 직접 관리했다. 나라마다 제각각이었던 화폐를 통일하고, 도량형과 문자도 통일했다. 그리고 심지어 언론과 사상까지 통일하고 싶어 했다. 그 유명한 '분서갱유'다. 물론 그가 이룬 다양한 통일은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어쩌면 조금이라도 다른 꼴은 두고 못 보는 그의 강박적 성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1호 갱에 도착하자 그가 강박증이라는 의심이 더욱 강해진다. 1호 갱은 가장 큰 규모다. 길이 210m, 너비 60m, 깊이 4.5~6.5m, 총면적 1만2000㎡로 거대한 체육관을 연상 시킨다.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진흙병사의 수만 해도 6000여 개. 심지어 작은 인형도 아니고 실물 크기다.

생각해 보라. 각기 다른 얼굴과 자세의 병사들을 실물 크기로 일일이 구워서 실제 군진과 똑같게 줄을 쫙쫙 맞춰서 세우는 그 집념을. 나는 진시황이 흰 장갑을 끼고 병마용을 하나하나 세고 또 확인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오한이 든다.

1호갱은 차병, 보병의 연합 편대의 대열이다.
▲ 1호갱 군용 1호갱은 차병, 보병의 연합 편대의 대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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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색채는 발굴후 산화되어 검게 퇴색했다
▲ 병마용 발굴 당시 사진 선명한 색채는 발굴후 산화되어 검게 퇴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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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병사들이 모두 채색되어 있었지만, 발굴되자마자 산화되어 색이 모두 바래 버렸다고 한다. 발굴 당시 사진을 보는데 기분이 묘하다. 진흙 병사들은 어둠속에서 마치 구조를 기다리는 듯이 누워 있거나 앉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군대에서 무려 2천 년 넘게 복역 중인 거다. 1984년 4월 이곳을 방문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돌아가는 길에 병마용 군진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해산(dismiss)!"

병마용 박물관에서 1.5km떨어진 야산이 진시황릉이다.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많은 도굴꾼들의 로망이었지만 아직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한다. 레이더나 중력 등을 이용한 정밀조사 결과, 지하 35m에 동서 길이 170m 남북 길이 145m의 묘실이 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중국내부에서도 황릉발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아직은 완벽히 복원 보존할 기술이 없다는 이유로 발굴이 미뤄지고 있는 거다. 사마천은 <진시황본기>에서 이 안에 자동으로 발사되는 화살이 있어 무덤을 파고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발사하게 했다고 적었다. 또한 수은으로 하천과 바다를 만들어 쉬지 않고 흐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긴, 그 성격을 미루어봤을 때 뭘 해도 해두긴 했을 거다.

진흙 병사를 신기한 듯 쳐다보는 관람객
▲ 아 제대하고 싶다 진흙 병사를 신기한 듯 쳐다보는 관람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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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관람객
▲ 신기해 병마용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관람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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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그가 불로불사에 그렇게 공을 들이면서도 죽음 후의 세상에 대해 또 이렇게 완벽한 준비를 해뒀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그는 두려웠을 거다. 자신이 아는 세상, 자신이 황제인 세상에서 죽음이라는 모르는 세상으로 떠난다는 사실이. 아는 세상에 남기 위해 불로초를 찾으며 안간힘을 쓰는 한편으로 죽음도 대비해야 했다. 죽어서도 자신이 살아야 하는 세상은 완벽해야 했으니까. '플랜 A- 불로불사 프로젝트'가 망할 수도 있으니, '플랜 B- 영원한 안식처 프로젝트'도 동시에 진행 시킨 거다. 아, 진짜 피곤한 인생이다.

진시황의 두려움, 만리장성

그의 두려움은 만리장성에서 느낄 수 있었다. 베이징에서 친구와 만리장성에 갔다. '팔달령'이나 '금산령' 같은 가이드북에 나오는 유명한 장성이 아니다. 내가 간 곳은 베이징에서 2시간 떨어진 연경시내(延庆城区)에 위치한 이름 없는 동네 장성이다.

중국 연경시내에 위치
▲ 이름없는 만리장성 중국 연경시내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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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나 되다보니까 관광지가 아니면 관리가 힘든 듯
▲ 만리장성 만리나 되다보니까 관광지가 아니면 관리가 힘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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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장성에 와보지 않는 자, 사내장부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에서 호방한 기개를 느낀다. 하지만 내가 방문한 만리장성은 다 쓰러진 두려움의 표식들이었다. 성을 짓는다는 건 나와 남의 구분이다. 높은 담은 침입을 예방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가두기도 한다. 진시황은 성 안에서는 그가 왕이지만 저 너머에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두려움이 만리를 뻗어 지금의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이며 수많은 사람이 죽은 최대 긴 무덤이 되었다.

진시황에 대해서는 원래 성격이 냉정하고 잔악무도하다는 평이 많은데 그것보다 '일중독자'였던 것 같다. <한서 형법지>에는 진시황이 죽간으로 지어진 공문서를 매일 120근씩 처리하지 않고는 먹지도 쉬지도 않았다고 한다. 의심이 많아서 신하들이 일을 잘하나 계속 감시하거나 아예 자기가 도맡아하려고 했다고도 한다.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그의 신하들 생각을 하니 콧날이 시큰해진다.

인파에 떠밀려가며 진시황의 업적을 구경했다. 대단한 구경거리긴 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계속 착잡해졌다. 한 선배가 떠올랐다. 완성도 있는 업무로 배울 점이 참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의 별명은 '마녀'였다.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었다. 후배들은 그 폭언들에 치를 떨곤 했다. 내가 보기엔 그녀가 의도했다기 보다 모르는 거였다. 자신의 어떤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지.

가끔 그런 사람들과 마주치곤 한다. 흔히들 '갑질'을 한다는 사람들. 사실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들도 두려움이 많은 여린 영혼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부족하고 자기애가 강했다. 그들에겐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 스스로 높은 자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한다고해도 합리화 되는 거다. 때문에 약자들은 항상 모욕감을 가슴에 품고 심리적 붕괴를 호소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호소해도 갑은 왜 그게 상처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루는 그녀는 내게 혼자 멀리 여행을 다니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자신은 한 번도 가족이나 주변사람과 떨어져서 지내본 적이 없다며. 나는 그녀가 두려워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줄 수 없는 세상,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세상에 나선다는 것이 두려운 거라고. 그래서 한 번 정도는 혼자 여행을 해보라고 이야기했다. 낯선 곳,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곳에 가면 처음엔 힘들지만, 두려움은 점점 자신감으로 바뀐다. 온전한 나 자신을 만날 때 나오는 자신감이다.

하지만 그 선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냐, 난 외로움을 많이 타서 안 돼." 진시황은 만리장성과 그의 진흙 병사들을 남겼다. 대단한 업적이다. 하지만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실제로 쌓은 것은 그를 위해 일하다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다. 언젠가 그녀도 알게 될까.

중국 최초의 통일왕국 진, 그러나 황제가 죽자 4년 만에 나라도 무너졌다. 가혹한 세금과 노역을 바탕으로 한 대형 토목산업이 민심을 앗아갔던 것이다. 그는 죽어 완벽한 무덤에 묻혔다. 그러나 그가 죽어서도 황제일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천하를 가졌지만 늘 불안했던 남자. 그의 영혼은 두려움을 안고 아직도 완벽한 묘실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 거대한 무덤 앞에서 너무나 쓸쓸해졌다.

[여행 정보] 사람이 없는 만리장성에 가는 법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팔달령이나 금산령이 아닌 알려지지 않은 만리장성에 가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베이징에서 두 시간 거리인 연경시내(延庆城区)에 위치해 있다. 버스나 전철로 인근 역에 도착한 다음 농부 첸씨에게 픽업을 부탁해야 한다. (픽업비 80~300RMB) 첸씨는 영어를 못하기에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미리 전화를 해둬야 한다.

농가에서 중국 시골 음식과 숙박을 체험해볼 수 있다. (식사 50RMB, 숙박 20~50RMB) 만리장성 하이킹은 첸씨의 집에서 차로 10분정도 가면 되는데, 체력에 따라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산 위엔 아무런 표지판이 없다. 하이킹 초심자의 경우에는 첸씨에게 하이킹 가이드를 부탁할 수 있다. (100RMB)

관련정보 홈페이지: http://greatwallfresh.com

덧붙이는 글 |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실크로드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 진행형 이야기입니다. 더블어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노처녀의 한풀이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이어,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졌으면 합니다.



태그:#실크로드, #시안, #병마용, #회족거리, #한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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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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