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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23일 <무한도전>이 처음 세상에 나왔습니다. 한국 방송 환경을 감안하면, 한 예능 프로그램이 10년 가까이 생존한다는 것은 분명 드문 일입니다. 같은 PD가 9년 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또한 놀랍습니다. <무한도전> 10주년. 이 프로그램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김태호 PD라는 한 사람을 통해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김태호, 1975년생, 이제 마흔, 불혹의 나이다. 그의 기사를 찾아 읽다보면, '불혹'이란 말의 의미를 새삼 곱씹게 만든다.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충분히 미혹될 만큼, 대중의 지대한 관심을 받는 사람이다. 그만큼 기자들의 인터뷰 공세 또한 집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자신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극히 드물다. <무한도전>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인간 김태호를 드러내는데는 그만큼 조심스러워 했다는 뜻이다. 김태호가 <무한도전>을 맡은 이후 9년 넘는 세월 동안 자연인으로서 그의 삶에 그나마 구체적으로 접근한 사례는 2009년 <씨네21> 김혜리 기자(현 <씨네21> 편집위원)의 인터뷰가 거의 유일하다.

김태호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때는?

2012년 5월 MBC 파업 당시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MBC 방송 대학'. 당시 김태호는 자신의 MBC 입사 과정을 소개했다
 2012년 5월 MBC 파업 당시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MBC 방송 대학'. 당시 김태호는 자신의 MBC 입사 과정을 소개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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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나도 한 번 접촉했다가 '까였다'. 그렇다고 매몰찬 거부는 아니었다. 그는 정중하게, 한편 솔직하게 "나는 인터뷰가 너무 힘들다"고 했다. 기사에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나오는 게 너무 부담스럽다고도 했다. 그리고 다른 매체의 인터뷰를 오랫동안 미룬 만큼, 인터뷰를 해도 그쪽이 먼저라는 데야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인터뷰에는 소극적인 사람이 시청자를 직접 만나는 데 있어서는 매우 적극적이다. 이른바 '특강' 형태로 그는 전국을 누비며 시청자들을 직접 만나고 있다. 대학교들은 물론 성남시, 부천시, 고양시, 춘천시 등 지자체, 한국능률협회나 LG 디스플레이 특강 명단에서도 그의 이름이 눈에 띈다. 모두 2013년 한 해 동안 발견된 그의 강연 흔적들이다.

그런 자리에서만큼은 김태호 스스로를 비교적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도 재미있게 풀어내고, <무한도전> '속사정'도 비교적 소탈하게 털어놓는다. 강연 영상이나 기록을 봐도 그랬고, 직접 강연을 들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무한도전> 10주년 종영설이 터져나온 것이 경인여대 특강 자리였다는 점은 그래서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태호에게는 인터뷰보다 강연이 더 쉬운 것일까? 기자나 언론을 끼지 않고, 시청자와 '직통'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일까? 왜? 아니면, 그냥, 돈 때문일까? 기회가 닿으면 김태호 본인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들이다. 어쨌든, 이제부터 시작되는 김태호의 '성장사'는 2009년 <씨네21> 인터뷰와 그 후 몇 차례 강연 등을 통해 그가 직접 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구성했음을 미리 밝힌다.

그의 패션 감각, 어머니의 '피'

대천 해수욕장 모습. 김태호는 바다가 가까운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에서 대천 해수욕장까지 버스로 30분 거리였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자료 사진
 대천 해수욕장 모습. 김태호는 바다가 가까운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에서 대천 해수욕장까지 버스로 30분 거리였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자료 사진
ⓒ 곽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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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충남 보령 출생, 김태호는 바다가 가까운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에서 대천해수욕장까지 버스로 30분 거리였다고 한다. 집에서 잘 나가지 않는 아이, 점쟁이가 '문지기' 역할을 단단히 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어머니가 점집에 갔는데, 그만 아들이 물에 빠져 죽을 수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김태호 어머니 입장에서는 충분히 신경 쓰일 만했다. 누나 셋에, 아들 김태호, 그리고 여동생. 그러니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을까. 바다를 못 가게 하는 것은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일. 하지만 또 그럴수록 더 가고 싶어하는 게 아이의 마음. "어쩌다 몰래 안 들키고 놀고 왔다 싶으면, 모래가 주르륵 흘러나왔다"고 한다. 옷을 갈아입을 때 말이다.

김태호와 옷, 그가 패션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용돈을 받으면 옷을 먼저 사고 초콜릿으로 끼니를 대신했다거나, 난생 처음 발급한 신용카드를 긁은 것도 백화점에 갔다가 눈독 들였던 예쁜 바지 때문이었다는 일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잠깐 의류 사업에 손을 댄 적도 있다고 한다. 한 벌도 팔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젊은 시절 치기 어린 도전이었던 것 같지만.

이와 같은 패션에 대한 남다른 관심에는 핏줄의 힘도 분명 작용한 것 같다. 김태호 어머니께서는 한때 한복을 만드셨다고 한다. 엄마를 따라 한복을 만들어봤다 망하기도 했고, 엄마나 누나 옷을 뒤져 TV에서 봤던 의상을 흉내내 입어본 기억도 있다고 한다. '물론' 김태호는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아이였다. "나도 저런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때가 여섯 살 무렵. 미술에도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학생 태호 '마이클 잭슨 머리처럼 해주세요'

학창 시절, 김태호의 우상은 마이클 잭슨이었다.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이 사망하자, 그로부터 이틀 후 방영된 <무한도전>에서 김태호는 프로그램 말미 '빌리 진' 공연 영상을 내보낸다. 방송 후 그는 "고마운 사람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고 밝혔다
▲ 마이클 잭슨 학창 시절, 김태호의 우상은 마이클 잭슨이었다.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이 사망하자, 그로부터 이틀 후 방영된 <무한도전>에서 김태호는 프로그램 말미 '빌리 진' 공연 영상을 내보낸다. 방송 후 그는 "고마운 사람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고 밝혔다
ⓒ M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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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술과 수학은 역시 상극인가? 주변을 보면 미술을 좋아하는 아이가 수학을 좋아하는 경우, 또는 그 반대의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물론 양쪽을 다 아우르는 천재도 있긴 하지만, 김태호도 그런 '천재과'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학이, 정말, 너무 싫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정석을 한 번도 안 펴봤다고 할 정도다.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곧잘 했던 김태호의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성적은 반에서 41등. 2학년 올라가서는 친구들과 놀기 바빴단다. "짝사랑하던 누나가 수학을 싫어한다는 얘기를 듣고 합리화를 했다"는 김태호의 회상이 재미있다.

그러다 더 큰 짝사랑을 가슴에 품게 된다. 상대는 마이클 잭슨. 그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수능시험 보자마자 미용실로 달려가 <데인저러스> 시절 마이클 잭슨 머리와 똑같이 해달라고 했을까. 그런데 하고 보니 옆집 아줌마 머리와 똑같았단다.

마이클 잭슨에 대한 애정은 <무한도전> PD 시절에도 잘 나타난다.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 사망. 그로부터 이틀 후 <무한도전> 여드름 브레이크 2편 방영. 당시 김태호는 프로그램 끝에 '빌리 진' 공연 영상을 내보내 마이클 잭슨을 사랑했던 많은 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고마운 사람에 대한 감사 표시", "학창 시절 곳곳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 그때 김태호가 밝힌 이유였다. 그리고, 학창 시절 곳곳에 중요한 자리에 있었던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없어졌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성적을 비관해 자살을 했다. 쉬는 시간마다 빵을 먹으러 가자던 그 친구가 갑자기 없어졌다. 방황을 하다 수학 정석을 다시 잡게 되었고, 3학년 때 성적조작을 의심받을 정도로 성적이 올라 잊고 있던 PD의 꿈을 떠올렸다. 그 친구 덕이 컸다." (2011년 4월 5일, 아레나 5주년 A-Talks)

마이클 잭슨을 함께 좋아하던 친구였다. '야자(야간자습)'를 함께 땡땡이 치던 친구였고, 함께 레코드점에 달려가 마이클 잭슨 DVD가 나왔는지 물어보던 친구였다. 그리고 함께 떡볶이를 먹으며 마이클 잭슨 이야기를 나누던 그 친구가 "갑자기 없어졌다".

고3을 앞둔 겨울방학 때였다고 한다. "잭슨의 새 뮤직 비디오가 출시된 것도 못 보고 자살을 했어요. 대학 입학 뒤 마이클 잭슨의 <넘버 원>이 나왔을 때 친구가 걸어 들어간 강에 던져주고 왔어요", 김태호의 회상이 아프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누나와 여동생 사이에서 자라 더더욱 그랬을 김태호가 받았을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방황의 결론이 왜 다시 공부였는지는 이제까지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혹시 인생의 유한함을 너무도 뼈저리게, 생생하게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그만큼 내가 좋아하는 일 또는 내가 재미있어 하는 일에 대한 욕망이 커진 걸까. 그래서 일단, 대학 진학에 '올인'하기로 결론을 내린 것일까. 물론 모두 가정일 뿐이다.

다만 확실한 점은 친구의 죽음이 김태호의 '무엇'을 깨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OECD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 1위의 나라, 10대 청소년이 하루 한 명 꼴로 '갑자기 없어지는' 비극이 일상이 된 나라에서 살고 있다. 이런 나라여서 웃음은 더욱 소중한 것이다. 어쩌면 웃음의 조율사 김태호 PD와 시청자의 만남은 그래서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세대 '돌아이' 당혹케 한 고려대 '돌아이'

MBC 이춘근 PD는 1994년 연세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김태호 PD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간다. 두 사람 모두 94학번이다.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MBC 이춘근 PD는 1994년 연세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김태호 PD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간다. 두 사람 모두 94학번이다.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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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진학을 할 때 저희 부모님은 제가 고시를 보길 바라셨어요. 아들을 잘 몰랐던 거죠. 저는 '어떻게 하면 PD가 될까' 고민하다가 거짓말을 했어요. 신방과를 가도 고시 공부하는 사람은 상당히 많다고요. 실제로 6개월 정도는 고시원에서 살았었어요. 그래서 뭐 항상 집에서 TV 보고 있으면, 부모님께서 '야, 너 공부 좀 해' 이러실 때, '제 전공이잖아요, 제 전공 공부하는 거예요' 그랬어요." (2012년 5월 19일 청춘페스티벌 특강)

여섯 살 무렵부터 김태호 내면에 잠재돼 있던 꿈, PD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대학 원서를 쓰면서 살아났다고 한다. 치열한 눈치 작전 끝에 신문방송학과 94학번으로 고려대학교에 첫발을 디딘다. 그 시절, 김태호는 자신의 성격을 "얌전할 때는 얌전하고 나설 때는 나서는 타입이었다. 때에 따라 '돌아이'가 되는 타입이었다"고 소개한다.

돌아이 일화는 다양하다. 김혜리 기자는 "학생회 총무였던 김태호가 열차 시간표를 착각하는 바람에 100여 명이 막판에 서울역까지 구보를 한 적이 있다"는 대학 시절 과 동기의 회상을 전한다. 신입생 때 동남아 순회 공연을 마치고 귀국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가 하면, 술 마시고 '깽판'을 친 적도 있다고 한다. "대학교 방학 때 술 먹고 놀다가 난리를 쳐서 200만 원을 물어준 적이 있다", 김태호가 한 대학교 특강에서 밝힌 '자기 고백'이다. 이춘근 MBC PD의 회상도 눈에 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94년 봄에 있었던 신방과 과 교류회였지. 너에 대한 첫인상은 뭐라고 해야 하지. 음… 쇼킹했던 의상 선택, 패셔너블한 아이템 등 척 봐도 보통사람이 아니구나 싶었단다. 나도 청바지에 그림을 그리고 다니던 우리 과에서 알아주던 '돌아이'였지만, 재기 발랄한 네 모습에 그냥 혀를 내두르고 말았지. 종이컵에 따른 소주에 안주라고는 새우로 만든 과자밖에 없었지만, 잔디밭에 둘러앉아 서로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던 그날 밤은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단다." (2009년 1월 9일, <독설닷컴> 김태호 PD에게 보내는 편지)

모든 꿈은 '자신만의 방'에서 자란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한 장면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한 장면
ⓒ 싸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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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돌아이' 이춘근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그 또래 젊은이들이 하기 마련인 고민의 범주까지 넘어선 '슈퍼 울트라 토네이도급 돌아이'는 아니던 듯싶다. 김태호는 "지금도 제일 후회되는 것은 수업 끝나고 과방 아니면 당구장, 호프집에 모여 친구들과 고민만 했던 것들,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것들"이라며 "나도 20대를 잘못 살았다, 20대를 능동적으로 보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군 생활 이후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거나 "지금도 군 생활 이전 사진을 보면 어색하다"는 말도 눈에 띈다. 1, 2학년 때 과 대표로 장기 자랑을 나갈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대학생 김태호에게 군 생활이 어땠기에 저런 말을 했는지 궁금증이 생긴다.

다만 그에게 군 생활 적응이 결코 쉽지는 않은 일이었을 게다. 여성적 성향에 더 익숙할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청소년기에는 친구의 충격적 죽음을 겪었고, 때에 따라 돌아이로 변모하는 이십 대 초반 김태호에게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군 조직 문화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김태호다움'이 있었다. TV 보기를 좋아하는 것은 여전했다. 얼마나 좋아했으면, 그 혈기왕성하고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운 그 나이에 "밤 10시면 드라마 보러 들어갔다가 다시 약속 장소에 나가는" 고생을 기꺼이 감수했을까.

그랬다. 친구는 일찍 떠났지만, 마이클 잭슨이 나오는 TV는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 TV를 켜는 것은 그에게 꿈을 키우는 행위이기도 했다. 물론 TV를 꺼도, 꿈에 대한 잔상은 상상으로 자랐을 것이다. 모든 꿈은 '자신만의 방'에서 자란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감사용 역을 맡은 이범수가 멋진 야구 선수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홀로 방에 누워 야구공을 던졌다가 받고 던졌다가 받고. 어쩌면 TV를 끄고 누운 김태호도 그런 상상을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대학생 김태호는 '그라운드'에서 첫 번째 선수를 만난다. 그는 <올드미스 다이어리> <조선 명탐정 - 각시 투구꽃의 비밀> 등을 연출한 김석윤 PD였다.


태그:#김태호, #무한도전, #마이클 잭슨, #이춘근, #김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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