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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날엔 더욱 고요하고 고즈넉해지는 절두산.
 눈 내린 날엔 더욱 고요하고 고즈넉해지는 절두산.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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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6일 오후 4시 19분]

연일 몰아치는 동장군 치하의 나날, 하얀 솜같은 눈이 내리고 소복이 쌓이면 삭막한 도시도 제법 운치가 생기고 덜 춥게 느껴진다. 그런 날이면 조용한 곳에 찾아가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을 남기며 눈길을 산책하고 싶어진다. 집 가까이 그런 곳이 있는데 바로 절두산(서울 마포구 합정동)이다. 한강 자전거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양화대교를 지나다보면 누구나 고개를 들어 쳐다보게 되는 절두산이 나타난다.

낮고 아담한 자태가 산이라기 보단 봉우리에 가깝다. 요즘처럼 눈 내린 겨울날엔 절두산의 절벽과 그 속에 자리한 성당 모습이 한 장의 그림엽서같아 자꾸만 눈길과 발길이 머무는 곳이다.

봉우리 위로 보이는 원형 모양의 절두산 기념관 지붕은 선비의 갓을, 종탑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진 목 칼을 뜻한다고 한다. 한국적인 은유를 담으면서 순교의 정신도 담아냈다. 세계 건축 설계 콘테스트 은상 수상을 받을 만하다.

이 봉우리의 원래 이름은 나방의 애벌레인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생긴 '잠두봉'이었으나, 19세기 구한말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비극적인 사연을 품고 '목을 자르다'라는 뜻의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뀌었다.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전망좋은 봉우리

옛날 양화진 나루터와 가까웠던 절두산, 한강이 지긋이 내려다 보인다.
 옛날 양화진 나루터와 가까웠던 절두산, 한강이 지긋이 내려다 보인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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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신자의 모습이 절절하다.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신자의 모습이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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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지긋이 내려다보이는 고요한 곳, 옛날엔 양화진 나루터가 가까이에 있었다고 한다. 주변 조망과 해 저무는 강가의 노을 풍경이 참 좋다. 양화(楊花, 버들꽃)라는 말은 인근에 갯버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조선시대 한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이용해야 했는데 한강에는 18개의 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광나루, 삼밭나루, 동작나루, 노들나루, 양화나루를 5대 나루라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 천주교 순교 성지와 성당,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 등을 품고 있는 절두산은 눈 내리는 날 찾아가면 사각사각 눈 밞는 발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조용하여 사색에 혹은 상념에 빠지기 참 좋다. 올 한 해 잊기 힘든 여러 비극적인 사건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하얀 눈이 포근한 이불로 덮어주는 것 같다. 절두산 성지 내 공원을 산책 중 눈길을 붙잡는 어느 여인, 차가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성모상 앞에서 그녀는 무얼 저리 간절하게 기도하는 걸까... 난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왠지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은 2014년 12월의 끝자락이다.

절두산 성당 한쪽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정다운 항아리들.
 절두산 성당 한쪽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정다운 항아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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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어루만져 색이 벗겨지고 반들반들해진 성자상의 두 손.
 사람들이 어루만져 색이 벗겨지고 반들반들해진 성자상의 두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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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롭게도 절두산 성당 마당 한쪽에 다양한 크기의 항아리들이 모여 있다. 성직을 수행하는 신부나 수녀들도 매일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임을 항아리들이 문득 일깨워주었다. 크고 작은 크기의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다운 풍경을 마주하니 잔칫날 외갓집에 모인 친인척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것 같아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항아리들은 물론 천사 조각상의 날개에도 이십대의 나이에 그만 순교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쓴 갓에도 하얀 눈이 포근하게 쌓였다. 김대건 신부는 죽음으로 종교적 신념을 지켰고, 다산 정약용은 배교를 선택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했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갓을 쓰고 도포자루를 입은 김대건 신부의 친근한 동상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숱한 전쟁과 비극적인 사건들을 많이 겪다보니 맺힌 한이 많아서인가 종교심이 무척 깊다. 여의도에 세계 1위의 신도수를 가진 교회가 있을 정도며, 세계 10위안의 큰 교회 가운데 한국의 교회가 예닐곱 개나 된다. 신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와 기원을 하며 어루만졌을 성자상의 두 손은 색깔이 다 벗겨지고 반들반들하다. 맞잡은 두 손을 보니 마음이 푸근해지고 오는 새해에 빌어 보고픈 무언가가 떠올랐다. 

성지와 성당,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을 품은 절두산

한국 최초의 사제이자 이십대의 나이에 그만 순교한 김대건 신부 동상에 까치가 앉아 쉬고 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자 이십대의 나이에 그만 순교한 김대건 신부 동상에 까치가 앉아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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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나 수녀들이 성직을 마치고 세상밖으로 나온다는 의미있는 문이 절두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신부나 수녀들이 성직을 마치고 세상밖으로 나온다는 의미있는 문이 절두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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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성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핫 스팟'은 누구나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작은 철문이다. 성직을 다 마친 신부나 수녀님이 비로소 세상으로 나오는 뜻 깊은 문이란다. '무언가를 믿는 순간 그 무언가에 속는 것'이라는 속된 내게도 경건함을 느끼게 해준 훌륭한 상징물. 나도 나이가 들어 퇴직문을 나서면 어떤 세상을 맞게 될지 절두산 아래를 지날 적마다 생각에 빠지게 하는 문이다.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을 잊지 말자고 말하는 듯한 '무명인' 비석도 시선을 끌었다. 절두산(切頭山) 성지는 무시무시한 그 이름에서 느껴지듯 19세기 대원군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박해로 살해당한 곳이기도 하다.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같기도 하다고 해서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으로 불렸던 절두산.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 순교의 성지가 된 데는 흥선 대원군의 병인박해에서 비롯되었다.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도성이 가까운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먼저 자르고 본다'고 하는 선참후계(先斬後啓)의 방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을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무자비한 참수를 했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이어진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이름없이 죽어간 아이들과 어른들의 '무명인' 비석.
 이름없이 죽어간 아이들과 어른들의 '무명인'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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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에 하얀 눈이 이불처럼 덮여있다.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에 하얀 눈이 이불처럼 덮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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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엔 보기 드물게 서양에서 건너온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지가 있다. 무덤 위로 하얀 눈이 이불처럼 쌓여서 그런지 겨울 무덤가의 분위기가 그리 썰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식 이름은 '양화진 선교사 묘원'이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는 1860년에 조성된 곳으로, 조선말 고종 때부터 한국을 위해 일한 언론계·교육계·종교계 등 외국인 인사 570여 명의 묘가 짧은 글이 새겨진 묘비와 함께 서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나에게 천(千)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등의 비문이 외국인이지만 한국을 사랑했던 이의 애절함이 느껴졌다.

그 가운데 특이하게도 '소다 가이치'라는 일본인 선교사의 무덤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는 유일한 일본인으로, 한국정부로부터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받은 일본인이기도 하다. 그가 한일 간의 국교가 정상화되기도 전에 이렇게 한국인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다와 그의 부인이 한국 고아들을 위해서 삶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묘원 한쪽에 새겨져 있는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의 짧은 시 한 편이 긴 여운을 남겼다.

언 손 품어주고
쓰린 마음 만져 주니
일생을 길다 말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이어늘

덧붙이는 글 | ㅇ 12월에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ㅇ 교통편 : 수도권 지하철 2·6호선 합정역 7번 출구에서 한강쪽으로 도보 10분



태그:#절두산, #잠두봉, #절두산 성당,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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