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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날 바람이 맵차게 불더니 오늘은 좀 누그러진 듯하다. 그늘진 곳에는 더러 눈이 쌓인 곳도 있지만, 양지에는 언제 눈이 왔느냐는 듯이 물기 하나 없다. 그러나 바다와 바짝 붙어있는 초지진 광장에는 가끔씩 칼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옷깃을 깊숙이 여미며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겨울인데도 구경꾼들이 더러 있다. 워낙 이름이 알려진 유적지이니 찾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차를 세우는 곳에 서서 성벽과 소나무만을 올려다 볼 뿐 초지진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는 사람은 드물다.

포탄 맞은 흔적 있는 초지진의 소나무

사실 초지진 안에는 볼만 한 게 별로 없다. 초지진은 알려진 이름에 비해 규모가 작아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물 역시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입장권을 끊고 초지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보다 그냥 밖에서 성벽과 소나무를 올려다보는 것으로 대신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포탄을 맞은 상흔이 남아있는 초지진의 소나무와 성벽
 포탄을 맞은 상흔이 남아있는 초지진의 소나무와 성벽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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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는 초지진은 우리 역사 속에 여러 번 등장한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프랑스 및 미국 함대와 싸웠고, 1875년(고종 12년)에는 연안을 마음대로 측량하고 다니던 일본 군함 운요 호와의 무력 충돌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일명 강화도조약으로 불리기도 하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게 되었으며 그 뒤 우리나라는 일본의 손아귀에 빠지는 불행한 역사를 겪기도 한다.

초지진 광장에 서서 성벽 앞에 서있는 소나무를 올려다본다. 포탄을 맞은 흔적이 있는 소나무는 초지진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신미양요 때 미군이 쏜 포탄을 맞은 것일까, 아니면 운요호 사건 때 일본군의 함포 세례를 받은 것일까. 나란히 서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는 지나간 역사를 말없이 보여 준다.

초지진은 강화해협의 길목에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지키는 병사들도 많았다. 군관(軍官) 11명에 사병 98명, 그리고 돈대에서 바다를 경계하는 돈군(墩軍) 18 명 등을 두고 앞 바다를 통한 적의 침입을 경계했다.

초지진에는 초지돈(草芝墩)·장자평돈(長者坪墩)·섬암돈(蟾巖墩)이 소속되어 있었고, 포대에는 9개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백여 명의 군사들이 초지진과 부속 돈대들을 지키고 관리했던 것이다. 이 사실만 봐도 초지진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초지진 소나무 둥치에 남아있는 포탄의 상흔.
 초지진 소나무 둥치에 남아있는 포탄의 상흔.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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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재 초지진을 보면 왜소하기 짝이 없다. 19세기 중엽에 외세의 침입을 온 몸으로 견뎌내고 막은 초지진인데 현재 복원된 초지진에서는 그런 면모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나마 포탄을 맞은 흔적이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에서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상상할 수 있을 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선조들의 기상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대통령의 특별 지시, 호국문화유적을 복원하라

지금 초지진은 초지돈대를 복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초지진은 현재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횟집과 모텔 그리고 주유소 등이 자리해 있는 바닷가 언덕이 원래 초지진의 자리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초지돈대가 초지진으로 둔갑을 한 것일까.

1976년 3월 1일에 강화도를 방문했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옛 사적들의 보존이 부실함을 보고 보수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정부는 '호국문화유적의 복원과 정화'를 특별히 강조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유적을 보수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건물을 짓고 기념비를 세우며 주변 환경을 정화하는 등 새로운 유적을 조성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시기에 전국의 많은 유적들이 복원되었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들을 비롯하여 금산의 7백 의총 등을 비롯한 임진왜란 관련 유적과 유관순, 윤봉길 의사 등의 사당이 건립되었다. 또 전국의 주요 성곽들도 이때 보수하였다. 강화도의 호국국방유적들(고려궁지, 강화성, 광성보,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 등)도 이때 복원되었다.

 원래의 초지진이 있던 자리에는 주유소와 횟집 등이 들어서 있습니다.
 원래의 초지진이 있던 자리에는 주유소와 횟집 등이 들어서 있습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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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국방유적들을 복원하고 정화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았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 등이 대두되면서 우리 정부에서는 자주국방의 의지를 국민들에게 보여줄 필요성이 발생했다. 호국선열과 국방유적의 정화 정책은 우리 조상들의 국가수호의지를 국민들에게 알려 자주국방의 정신을 고취하도록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이 정책은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를 간접적으로 부각시키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

이때 강화도의 여러 유적들이 복원되었다. 초지진도 그중 하나였다. 지금은 문화재를 복원할 때 철저한 고증에 의해 작업을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잘못 고쳐진 게 더러 있었다. 말하자면 졸속 행정과 빨리 빨리 문화가 만든 작품이 바로 강화도 전적 유적지 복원 정화사업이었던 셈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파괴된 초지진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빈 터만 남아 있었다. 원래는 나라 땅이었겠지만, 어느새 사유지로 편입이 되어 집이 들어섰고 농사를 짓는 밭이 되어 있었다. 유적지 정화사업을 할 때 한정된 재정으로 초지진의 땅을 다 구입하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남아있던 초지돈대를 복원하고 초지진으로 이름을 붙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돈대'보다는 상위 계급인 '진'을 붙이는 게 이웃해 있는 광성보나 덕진진과 격이 비슷해진다고 여겨서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초지돈대는 바다 쪽으로 튀어나와 있는 언덕에 있다. 그러니 적 함선의 출몰을 맨 먼저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초지돈대와 초지진은 한 몸이었다. 말하자면 척후병과 본대라고나 할까. 그 둘은 합동해서 적의 침입에 대응했을 것이다.

 1977년 10월 28일, 강화도 호국국방유적들의 복원 준공식에 참석해서 둘러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1977년 10월 28일, 강화도 호국국방유적들의 복원 준공식에 참석해서 둘러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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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여 명의 군사를 두고 있었던 초지진은 세월의 영욕 속에 흔적만 남아있었다. 그러나 초지돈대는 비록 무너지긴 했지만, 성벽의 잔재도 남아있었고 더구나 포탄의 상흔이 있는 소나무도 굳건히 돈대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초지진을 복원할 때 돈대를 새로 고쳐쌓고 초지진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현재의 초지진이 이해가 된다. 비록 규모가 작아 당시를 상상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그래도 포탄을 맞은 흔적이 남아있는 소나무와 성벽을 보면서 과거의 치열했던 전투를 상상할 수 있다. 그나마도 남아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갑곶돈대 자리에 다리가 놓였으니...

강화의 역사 유적지 중에는 초지진처럼 축소 복원된 곳이 또 있다. 강화역사 기행의 일번지로 불리어졌던 '갑곶돈대'가 바로 그곳이다. 사적 제 306호인 갑곶돈대는 옛 강화역사박물관과 같이 있어서 강화를 찾는 사람들이 첫 번째로 둘러보던 명소였다. 역사박물관이 고인돌광장으로 이전하면서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다소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명성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갑곶돈대는 강화도를 방어하던 53개 돈대 중의 하나다. 그중 강화의 동쪽 해안에 20개의 돈대가 몰려 있었다. 그것은 곧 돈대가 강화의 바다를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아울러 수도인 서울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 갑곶돈대의 모습
 현재 갑곶돈대의 모습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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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만 육지와 닿을 수 있었다. 갑곶나루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강화에서 서울로 갈 때도 갑곶나루를 이용했지만 서울에서 강화로 들어올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곳을 거쳐야만 했다.

옥좌에서 끌려 내려온 패군 연산과 광해는 이 나루를 통해 강화도로 유배를 왔고 정묘호란 때 인조 임금은 이 나루를 건너 난리를 피했다. 또 하루 아침에 지존이 된 철종 임금 원범은 갑곶나루를 건너 서울로 올라가서 왕이 되었다. 말하자면 갑곶나루는 강화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었고 나루터 옆에 있던 갑곶돈대는 마치 수문장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갑곶나루 옆의 언덕에 갑곶돈대가 있었다. 갑곶돈대는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올지도 모를 적함들을 경계하며 혹시 모를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갑곶진에 속해 있던 여러 돈대 중의 하나였던 갑곶돈대는 상부 군사시설이었던 갑곶진의 전면에 위치해있어 전투가 벌어졌을 때 앞서서 싸웠던 곳이기도 했다. 상주하는 군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규모는 지금 복원되어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장대했다.

그러나 현재 복원된 갑곶돈대는 협소하기 짝이 없다.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온 치성과 대포 두 문만이 보이니 그렇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병자호란을 비롯해서 병인양요 등의 외침을 당했을 때 우리의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전장이 이렇게 작고 옹색하다니, 선현들의 항쟁에 의문을 품으며 우리 역사가 빈약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갑곶돈대의 일부분일 뿐이다. 원래의 갑곶돈대는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또한 지금의 자리 뿐만 아니라 옛 강화대교가 시작되는 바위 언덕까지도 원래의 갑곶돈대가 있던 자리였다.   

 원래 갑곶돈대는 구강화대교가 들어서있는 언덕에서부터 현 갑곶돈대까지 이어져 있었다.
 원래 갑곶돈대는 구강화대교가 들어서있는 언덕에서부터 현 갑곶돈대까지 이어져 있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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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도 중반에 박정희 대통령은 전적지 보수 정화사업을 문화정책의 핵심기조로 내걸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강화도의 전적지를 보수 정화할 것을 지시했다. 강화도의 여러 유적지들 중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의 유적지들을 특별히 호국유적지로 이름 붙이고 정화사업을 시행했다.

그런데 문제는 갑곶돈대였다. 대통령의 특별 명령이니 반드시 복원해야 하는데 그 자리에는 강화대교가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돈대를 복원할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갑곶돈대의 일부분에 성곽 보수공사를 하고 갑곶돈대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옛 지도 속의 갑곶돈대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를 놓는 것은 강화도민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1965년도에 다리 공사가 시작될 때 최적의 장소로 선정된 곳은 갑곶돈대 자리였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입지 선정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강화도민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다리가 놓인다는데, 흔적만 남아있는 유적지 따위에 가치를 두었을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설혹 그 자리가 갑곶돈대 터임을 알고 있다고 한들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를 놓는 열망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1970년 1월 2일에 있었던 다리 개통식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 중 갑곶돈대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당시에는 먹고 살기에 바빴던 시절이라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그러니 지금의 기준으로 그때를 탓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일본 변리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가와다 키이치가 찍은 갑곶돈대의 모습.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일본 변리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가와다 키이치가 찍은 갑곶돈대의 모습.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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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몇 년 후에 발생한다. 1976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강화도의 전적지들을 보수 정화하라고 지시를 한다. 강화해협을 따라서 있는 초지진과 덕진진 그리고 광성보를 복원하고 정화하는 사업이 그때 벌어졌다. 그때 갑곶돈대가 문제거리로 떠올랐다. 원래 자리에 강화대교가 들어섰으니 관계자들은 난감했을 것이다. 돈대를 복원할 자리에는 다리가 놓여있으니 어떻게 복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갑곶돈대의 치성 부분을 복원하고 갑곶돈대로 이름을 붙이기로 했을 것이다.

치(雉)란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하도록 쌓아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에게 정면과 측면에서 함께 공격할 수 있도록 각이 지게 만든 성곽 시설물을 말한다. 갑곶돈대는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언덕의 암벽을 성벽 삼아 그 옆으로 이어지게 성곽을 쌓은 곳으로 현재 갑곶돈대가 있는 자리에는 앞으로 툭 튀어나오게 치를 쌓았다.

갑곶돈대를 찍은 옛 사진에서 봐도 알 수 있다. 1876년(고종 13년) 초, 운요오호 사건 이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 때 일본 대표단이 찍은 사진에는 갑곶돈대의 모습이 현재와는 다르게 나타나 있다. 사진 속에 두 명의 군사가 서 있는 치(雉) 부분이 둥그스럼한 곡(曲)형을 이루고 있어 현재의 직사각형으로 복원된 돈대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강화도지도'  중의 갑곶돈대 부분. 8폭으로 된 병풍으로 현재 서울대 박물관에 있다.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강화도지도' 중의 갑곶돈대 부분. 8폭으로 된 병풍으로 현재 서울대 박물관에 있다.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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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도에서 봐도 갑곶돈대는 현재보다 훨씬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강화도지도' 중 갑곶돈대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도의 맨 왼쪽에 동락천의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수문이 있고 그 옆에 장방형의 치성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치성에서 한참 간 곳에 네모나게 성을 쌓은 곳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강화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했던 진해루와 나루터의 석축로까지 자세히 그려놓았다.

치성이 돈대로 탈바꿈했다

이 지도는 8폭으로 된 병풍인데 제1폭은 정족산성 일대를, 제2폭은 갑곶진을 그리고 있다. 또 제3폭은 광성보 일대, 제4폭은 인화보 일대, 제5폭은 월곶진 일대를 그렸다. 그 외 덕진진과  문수산성 등을 자세히 그려놓았는데 특히 광성보와 덕진진 주변의 포대(砲臺)와 총을 쏠 수 있도록 해놓은 총혈수도 기록해 놓았다.

현재 서울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지도를 통해서도 갑곶돈대가 현재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화외성의 한 줄기이기도 한 갑곶돈대는 현재의 치성 부분 뿐만 아니라 그 옆의 암벽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강도부지도'를 통해서도 갑곶돈대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지도는 1875년 일본의 운양호 포격 사건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도로는 붉은색으로 표현하였으며 강은 청색으로 자세하게 그렸다.

이 지도에서는 갑곶진에 속해있던 염주돈과 갑곶돈이 나타나 있으며 갑곶돈대의 경우 석수문과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치성 부분도 역시 자세히 묘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진해루 옆에 갑곶돈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부분이 원래의 돈대 자리였지만 현재 그곳은 구강화대교가 놓여있을 뿐만 아니라 카톨릭 갑곶성지로 편입되어 있기도 하다. 

 서울대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강도부지도' 중 갑곶돈대 부분. 이 지도의 제작시기는 1875~1894년경으로 보고 있다.
 서울대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강도부지도' 중 갑곶돈대 부분. 이 지도의 제작시기는 1875~1894년경으로 보고 있다.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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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복원한 유적, 바르게 고쳐야...

1970년대 당시 속전속결로 문화유적지들이 보수되고 정화되었다. 그 많은 유적지들이 불과 일 년여 만에 복원되었으니 부실했을 것은 안 봐도 환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철저한 고증을 거친 후에 복원 작업을 해야 했음에도 성급하게 공사를 했을 터이니 잘못된 곳이 어디 한두 군데였겠는가. 비단 이러한 일들은 강화도에만 국한되는 사항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정화 복원된 많은 문화 유적 가운데는 이처럼 잘못된 것들이 또 있을 것 같다.

졸속 행정과 복원은 그때만의 일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잘못을 범하고 있다. 숭례문 복원이 그것을 대변한다. 과거의 잘못을 보고 배워야 함에도 우리는 아직도 반성하지 못하고 졸속 행정에 부실 공사를 남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하면 된다'는 식의 구호가 지배했던 지난 1970년대의 흔적이 바로 현재의 초지진과 갑곶돈대에 남아 있다. 모르고는 넘어갈 수 있지만, 알고 어찌 그냥 지나칠 것인가. 이것은 어쩌면 또 다른 역사 왜곡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바로 고쳐야 한다.

잘못 복원한 문화 유적들을 바로 고치고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은 조상이 물려준 것을 바르게 이어받는 길일 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역사의 복원이고 민족혼의 자리매김을 바르게 하는 작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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