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된다."

얼마 전 한국 친구와 통화하던 중 터져 나온 탄식이다. 논란만 무성했을 뿐,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국민 수백 명의 목숨이 꺼져가던 순간에 대통령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말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국가안보사항'이기에 말할 수 없다고 버틴 탓이다.

대통령의 과거 행적을 밝히는 게 어떻게 '국가안보'를 위협하는지 궁금했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다. 그들이 '국가안보'란 말을 대체 어떤 뜻으로 쓰는지 말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국가안보'란 국민의 생명, 재산,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대통령과 여당은 충분히 건질 수 있던 국민들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국가안보'에 실패한 것이다.

국가적 재난 당시 대통령은 상황을 제대로 보고 받고 제대로 대처했는가, 그러지 못했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성실히 답하는 것은 같은 재앙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참담한 실패의 원인으로 정부의 무능과 부패는 물론, 꼴사나운 '윗사람 모시기'까지 가세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 당연한 요구를 거부했다. '국가안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안보'의 의미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먹물들'은 쪼잔 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들이다.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사소한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며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 아닌가.

"국가안보 때문에 국가안보를 지킬 수 없다면, 대체 이 국가안보란 놈의 정체는 무엇인가."

여러 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한 큐'에 실마리가 풀렸다. 놀랍게도, 영감을 준 것은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었다. 특히 이들이 작성한 통합진보당(진보당) 해산결정문은 현 정부가 지킨다는 '안보'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또렷이 보여주었다.

헌재 논리대로라면 국정원부터 해체해야

지난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선고에서 박한철 헌재소장이 '정당해산'을 결정했다.
▲ 헌법재판소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지난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선고에서 박한철 헌재소장이 '정당해산'을 결정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관련사진보기


솔직히 말해, 헌재 결정문을 읽는 일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법조문 특유의 만연체 문장 때문만이 아니라, 진술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따로 놀았고, 전제와 결론 사이의 논리적 비약도 심했기 때문이다. 동어반복의 오류도 자주 눈에 띄었지만, 오히려 핵심을 요약하기는 더 쉬웠다. 헌재가 다수견해로 밝힌 '진보당을 없애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이석기 전 의원은 북한을 추종하는 사람으로서,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에 동조해 '폭력 수단을 실행하고자 회합을 개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개인적 처벌로는 불충분하며 (그는 항소심에서 징역 9년과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그가 속한 정당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회합을 개최하고 참석한 사람들이 당의 '핵심 주도세력'이었고, 이석기를 '전당적'으로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판관들 스스로 이것만으로는 정당해산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진보당 '경선부정' 혐의까지 끌어왔다. 진보당이 비례대표 부정경선과 지역구 여론 조작 사건 등에 연루되어 민주주의를 훼손한 만큼, 정당 해체는 더욱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들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토론과 표결에 기반하지 않고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으로 지지하는 후보의 당선을 관철시키려고 한 것으로서 선거제도를 형해화하여 민주주의의 원리를 훼손하는 것이다." - 통진당 해산 결정문 중 "피청구인의 활동"

옳은 말이다. 선거 부정과 여론조작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결코 묵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으로 지지하는 후보의 당선을 관철시키려고" 대대적으로 여론조작을 벌인 국정원도 해체해야 할까? 헌재의 논리에 따르면 그래야 한다. '숨은 목적'을 가지고 회합을 개최한 사람들이 원세훈 등 조직의 '핵심 주도세력'이었을 뿐 아니라, 사건 이후 국정원은 그를 '전원적'으로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국정원이 진보당에 대해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인 시기는 2013년 8월 말이었다. 당시는 대선 여론조작 비판 여론이 날로 높아가는 데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까지 불거진 시점이었다. 증거까지 조작해 간첩을 만들어 내는 게 '국가안보'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대선부정으로 민주주의를 쌈 싸먹은 이들이 민주주의 수호의 선봉에 서는 게 온당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입만 열면 '종북'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숨은 목적'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능하고 부패하고, 죄를 저질러도, '종북' 주문 하나로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 개인과 조직이야말로 북한에 기생하는 진정한 '종북세력'이기 때문이다. 북한 덕에 위기를 모면한 것으로 따지면, 청와대를 빼놓을 수 없다.

누가 진짜 '종북'인가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에 의혹을 제기한 일본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전 서울지국장이 지난달 27일 오전 자신의 공판준비기일에 출석하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에 의혹을 제기한 일본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전 서울지국장이 지난달 27일 오전 자신의 공판준비기일에 출석하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궁지에 몰린 국정원이 진보당 수사로 국면전환을 이뤄냈듯, 청와대 역시 '종북 만능키'를 써서 '비선실세'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났다. 지난 8월 <산케이신문>이 '의문의 7시간' 의혹을 제기한 후 세월호 침몰 당일 대통령의 행적에 대한 보도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찰은 <산케이신문> 전 서울 지국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하는 무리수를 씀으로써 모든 언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반일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문제제기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이렇게 '의문의 7시간'은 묻혀갔다.

이번에는 헌재가 절묘한 시점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대통령 측근 몇 명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후 나라는 들끓었고, 대통령의 지지도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때 '종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놀라웠을 것이다. 북한에 대해서 오직 혐오만 인정되는 사회에서 '종북숙주' 딱지가 붙은 정당을 동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고, 이렇게 '비선실세'는 묻힐 것이다.

맹목적 증오가 이성적 판단을 덮는 사회만큼 정치하기 쉬운 곳도 없다. 정치인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항상 그 위에 존재하는 '더 나쁜 놈'이 있기 때문이다. 배가 가라앉고, 은행 계좌가 털리고, 국가 기밀문서가 인터넷을 돌아다녀도, 북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순간 모두가 책임을 벗을 수 있게 된다. 이쯤 되면 북한이 '주적'인지 '구세주'인지 헷갈린다.

새누리당은 아주 신이 났다. '민주주의'의 전매특허라도 낸 듯 의기양양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진보당이 해체해야 마땅할 '종북숙주'라면, 새누리당도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된다.

모두가 알듯, 진보당은 지난 정부에서 대선후보까지 낸 정당이다. 이명박 정부에 의해 대통령이 될 자격을 인정받았다는 이야기고, 이론적으로 대통령이 될 수도 있던 사람이다. 당시 여당이었던 지금의 새누리당, 국정원, 검찰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현재 국가보안법으로 조사받고 있는 '위험인물'이 박근혜 후보와 나란히 앉아서 토론까지 하게 내버려 두었다.

논리와 증거 없이 억지만 있는 판결문

국정원은 이미 2010년부터 이석기 전 의원과 주변 인물들에 대해 내사를 벌여왔다고 밝힌 바 있다. 얼마 전까지도 한가롭게 내버려 두던 정당이, 왜 당장 해산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만큼 갑자기 위험해졌는가. 헌재는 진보당에 대해서는 '정당해산결정 말고는 대안이 없다'며 이렇게 주장한다.

"위법행위가 확인된 개개인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 정당 자체의 위헌성이 제거되지는 않으며,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언제든 그들의 위헌적 목적을 정당의 정책으로 내걸어 곧바로 실현할 수 있는 상황에 있다. 따라서 합법정당을 가장하여 국민의 세금으로 상당한 액수의 정당보조금을 받아 활동하면서 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피청구인의 고유한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당해산결정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불법 선거자금을 탑차로 받던 정당은 해산되지 않고 '새누리당'으로 이름만 바꾸어 살아남았다. 검은 돈으로 선거결과를 떡 주무르듯 하는 것은 민주적 절차와 상관없는 일일까? 게다가 진보당의 경선부정 의혹이 터져 나왔을 당시, 새누리당도 선거명부 유출을 통한 경선부정 혐의를 받았다. 그 가망 없던 '차떼기당'이 하루아침에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돌변할 수 있다면, 진보당이 변화해서 유권자에게 선택받거나,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몰락하도록 내버려 두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헌재는 진보당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치"기 때문에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헌재가 판단의 이유를 찾기를 바랐다. 그러나 판결문은 "가능성이 크다," "~으로 보인다" 등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어에 동어반복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여기에 진보당의 "유사상황에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해산의 이유로 제시하는 대목에서는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1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2년 못살겠다! 다 모여라! 국민촛불'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통합진보당 해산과 소속 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해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절대 원칙을 무너뜨린 것이다며 규탄하고 있다.
▲ 통진당 해산 판결에 화난 시민들 "박근혜 정권과 끝까지 투쟁" 1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2년 못살겠다! 다 모여라! 국민촛불'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통합진보당 해산과 소속 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해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절대 원칙을 무너뜨린 것이다며 규탄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진보당의 활동이 위험해서 내버려 둘 수가 없다면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판결문은 회합 등 과거 활동 자체가 "구체적 위험성이 발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다시 논리적 근거 없이 다시 "구체적 위험성을 배가한 것"으로 확대되고, 이는 다시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실질적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구체적 위험성을 초래하였다"는 동어반복의 결론으로 이어진다.

"피청구인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내란을 논의하는 회합을 개최하고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건이나 중앙위원회 폭력 사건을 일으키는 등 활동을 하여 왔는데 이러한 활동은 유사상황에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피청구인 주도세력의 북한 추종성에 비추어 피청구인의 여러 활동들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실질적 해악을 끼칠 구체적 위험성이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내란 관련 사건에서 피청구인 구성원들이 북한에 동조하여 대한민국의 존립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은 피청구인의 진정한 목적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서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넘어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구체적 위험성을 배가한 것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피청구인의 위와 같은 진정한 목적이나 그에 기초한 활동은 우리 사회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실질적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구체적 위험성을 초래하였다고 판단되므로, 우리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

헌재는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을 되풀이해서 쓰고 있지만, 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은 국민의 의사와 선택이지, 소수 법률가의 판단일 수 없다. 게다가 헌재의 구성과 판결 방식은 내부에서조차 합리성과 객관성을 의심받고 있다. 9명 가운데 최소 7명이 집권 정당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전 세계 어느 곳에도 이렇게 편향적으로 재판관을 구성하는 나라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게다가 다른 나라와 달리, 오직 법조인만으로 헌재가 구성된 탓에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강국 전 헌재 소장조차 여러 직업군에서 재판관을 구성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실제로, JTBC가 헌법학자들을 상대로 정당해산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그 결과는 헌재와 정반대였다. 16명 가운데 단지 6명만이 '해산에 찬성한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헌재의 친재벌, 친권력, 친보수 성향

민주화 이후 가장 주목 받은 판결 가운데 하나는 2004년 행정수도 이전 위헌 심판이었을 것이다. 당시 헌재는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하며 기상천외한 부연설명을 달았다. '서울은 수도'라는 내용이 헌법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헌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 '관습법'에 속하기 때문에, 행정수도 이전을 위해서는 헌법부터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재 재판관들이 지배세력의 이익을 대변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집값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는 '범인'임을 깨닫게 해 준 사건이었다. 2013년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로 지명되었다가 특정업무경비 유용 의혹 등 '비리백화점'으로 불리며 낙마한 이동흡 전 재판관은 위장전입, 양도세 탈루, 저작권법 위반, 정치자금 불법공여, 업무추진비 유용 등 개인 비리뿐 아니라, 정치적 편향과 친일 성향 등도 비판 받았다.

헌재의 성향을 짐작케 해주는 판결은 최근에도 있었다. 건설산업기본법 중에 건설사 임원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을 경우, 그 업체의 등록을 말소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헌재는 지난 4월 이 조항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헌재는 임원 개인의 비리를 문제 삼아 영업을 금지하는 것이 "건설업자가 관련 규범을 준수하도록 하는 공익 달성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건설업자의 자질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결격사유가 발생한 임원을 법인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행정상 제재를 가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가장 강력한 수단인 등록말소라는 방법을 택하"는 것은 "최소침해성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헌재가 기업에 적용한 '최소침해성 원칙'은 정당의 해산결정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헌재는 '민주주의 기본절차'를 파괴되기에 정당을 해산하고 의원 자격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판결이야말로 민주적 기본절차인 대의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소수 견해를 견지한다 해도, 국회의원은 유권자들에 의해 선택받고 대변하는 사람들이다. 의원 5명의 문제가 아니다. 당을 해체하고 의워직을 박탈하는 것은 10만 명 이상의 당원과 200만 명 이상의 유권자 권리를 빼앗는 것이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나

지난 1일 열린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발언을 하고 있다.
 지난 1일 열린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발언을 하고 있다.
ⓒ 청와대

관련사진보기


"정당해산결정으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법익은 정당해산결정으로 초래되는 피청구인의 정당활동 자유의 근본적 제약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일부 제한이라는 불이익에 비하여 월등히 크고 중요하다."

'국가안보'의 숨을 뜻을 찾고 안도하던 나는 다시 고민한다. 국민을 빼놓고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을 보면, 재판관들 다수가 민주주의의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진보당 해산판결에 대해 "민주주의를 지킨 역사적 결정"이라고 말했다. 그가 "역사"라는 말을 쓸 때 나는 더욱 우울해진다.

2005년 8월, <국민일보>가 박 대통령을 인터뷰하면서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의 발표내용을 언급했다.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등을 조작하고 과장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발표하는 내용들은 한마디로 가치가 없고 모함"이라며 불쾌감을 표했다. 얼마 후 인혁당 사건으로 처형된 사람들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박 대통령의 '역사관'은 바뀌지 않았다.

박 대통령을 보좌하고 있는 김기춘 비서실장은 1970년대 유신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 등을 담은 이 유신헌법은 인혁당 사건 등 '사법살인'의 빌미를 제공했다. 불과 며칠 전 '비선세력의 국정농단'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을 당시, 보수언론까지 나서서 비서 3인방과 김 비서실장 교체를 요구했었다. 하지만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완전히 옳은 것 같지는 않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라 요구하고, 되찾고,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부와 헌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듯하지만, 이들조차 목소리를 내는 국민만은 두려워한다. 이것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우리 모두가 목격한 일이다.


태그:#통합진보당, #헌재, #박근혜
댓글138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