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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드라마 <미생>의 포스터.
 드라마 <미생>의 포스터.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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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사회적으로 많은 화제"라고 언급했다던 박근혜 대통령이 "젊은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남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을 한다면 여러분의 미래는 바둑에서 말하는 '완생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던가. 지난 1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6차 청년위원회 회의에서 말이다. 

"청년들의 구직난이 안타깝다"던 박근혜 대통령, 혹여 <미생>을 보긴 본 것일까. 이달 초,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중규직 제도' 도입을 검토한다던 정부가 최근 확정한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보면, 정규직을 위해 그리 노력했던 2년 계약직 사원 장그래를 두 번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본인이 원하는 하에서 최장 4년까지 계약직으로 일하라니. 그것도 (군대 다녀온 남자라면) 최소 7년 이상은 일한 경력직인 35세 계약직 근로자에 한해서. 3개월 이상 근로자에 대한 퇴직금 지급, 정규직 전환 비이행시 이직 수당, 비정규직 계약 갱신 횟수 제한 등 보완책을 내놓았지만, "계약직 기간 늘리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격차만 줄인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만하다.

이게 '장그래법'이라니, <미생>을 응원했던 세상의 '장그래들'과 <미생> 팬들의 열이 오르겠나, 안 오르겠나.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가 <미생>을 지독하고 나쁜 쪽으로 오해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올해의 드라마'로 상찬 받으며 사회문화적 파급력을 보여줬던 <미생>에도 그렇게 해석할 요지가 없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쩔 텐가. 

'장그래법' 낳은 <미생>이 일궈낸 성과, 그리고...

계약직 사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파격, 지상파와 달리 재벌총수도, 러브라인도 없는 사실감과 담백함, 주조연 캐릭터 모두에게 애정을 아우르는 세심함, 그리고 이 세상 직장인들에게 보내는 공감과 헌사. 성공한 드라마 <미생>의 미덕은 굳이 나열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탄탄한 원작이 (팬들의 관심과 성원이란 밑바탕과 함께) 여타 장르의 콘텐츠로 파생돼 성공하는 또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됐다(제발, 그러나 제발 뮤지컬만은 참아 주시라). 이를 기반으로 <미생>은 <응답하라 1994>를 이어 케이블 드라마의 시청률을 한 단계 끌어 올렸고, 연극판 출신 조연들을 발굴했으며, 광고·해외 판매 등 각종 수익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아마도 윤태호 작가의 후속작 역시 드라마의 성공과 관계없이 또다시 주목을 받을 것이다.

그 성공을 뒤로 하고, 첩보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본그래'로 탄생한 <미생> 마지막회에 쏟아진 비판은 변명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성대리의 '사랑과 전쟁'을 필두로 인기를 얻은 '대리들'의 분량 늘리기나 '꽌시'를 둘러싼 납득하기 쉽지 않은 과한 설정, 후반부 무리한 간접광고나 장백기-안영이의 러브라인 등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덜컹거림이 드라마 <미생>의 주제를 완성해 가는 작가·감독의 태도나 시선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기실, 문제제기만으로 인정을 받는 텍스트들이 있다. 이른바 선취의 미학. 윤태호 작가의 원작이 그랬다. 바둑을 그만두고 대기업 상사에 '낙하산' 고졸 계약직 인턴으로 입사한 장그래와 주변인물을 통해 바라 본 기업과 사회라는 그물망을 냉철하고 촘촘하게, 그리고 담백하고 현실감 있게 그린 작품이 바로 원작 만화 <미생>이었다. 반면 회당 3억 원, 20회짜리 이 드라마는 영상 텍스트가 줄 수 있는 과장과 현실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다.

연대를 대체한 동료애와 인간애

극 초반, 원작과 비교해 과하게 주눅이 든 장그래의 초상은 '고졸 계약직'이란 주인공의 처지를 부각시키는 쪽으로 흘러갔다. 장그래가 입사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인 인턴사원 PT(피티) 장면 역시 '손발이 오그라들'만큼 구구절절했다. 원작에서 통찰과 관조로 기능했던 지문들은 임시완이란 배우를 통해 살과 숨을 얻으며 장그래의 내면의 풍경을 헤아리게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남발된 플래시백과 함께 전통적인 드라마의 서사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들었다. 더욱이, 끊임없이 장그래를 둘러싼 문제를 개인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려 노력했다.

회당 70분이 넘어가는(마지막회의 요르단 내용이 삽입된 1회는 무려 90분에 달한다), 드라마 치곤 길고 긴 이 <미생>은 그렇게 볼품없고 핍박받는 고졸 계약직도 "'미생'에서 '완생'을 꿈꿀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과거 또다른 인턴사원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오상식 차장의 변화도, 끈끈한 동료애로 대변되는 영업3팀의 친화도, 말단 사원들의 고충을 담당하지만 장그래와는 계급이 다른 동기들도, (며칠 만에 무역 용어를 술술 외웠던) '숨은 능력자' 장그래의 정규직 획득을 염려하고 고민한다.

이를 위해 강조되는 것이 바로 저 동료애다. '연대'라고 말하기엔 거창하고 쑥스러운 '측은지심'과 같은 인간애 말이다. 사실 드라마 공히 오상식 차장으로 대변되는 그 인간애로는 장벽과도 같은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 우리 모두 장그래나 김동식 대리였다가 오차장을 거쳐 (세상에 찌든) 박과장이나 마부장, 최전무의 부류도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이 그렇지 않느냐고. 

사무실의 디테일 하나 하나, 단역들까지 배우로 캐스팅하는 공을 들이고, 우리 모두의 직장 생활을 세심하게 '재현'한 <미생>은 일단 거기서 멈춰 선다. 그리고 꽤나 기이하게 현실을 '봉합'하려 든다. '미덕(<미생> 덕후, 즉 마니아)'들로부터 욕을 먹기 시작한 결말 부분의 어색함이 바로 거기서부터 작동한다.

드라마 <미생> 마지막 회의 주요 장면들.
 드라마 <미생> 마지막 회의 주요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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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의 결말, 어찌 허탈하지 아니한가

"월급쟁이 생활"에 환멸을 느껴 일탈을 감행한 <미생> 사상 가장 문제적인 캐릭터 박과장. 그에 이어 장그래는 자신을 '낙하산'으로 발탁했던 최전무를 권좌에서 끌어 내리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함으로써 일부 팬들에게 '연쇄사직마'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른다. 결국, 오차장까지 사직서를 내고, 장그래는 정규직 승급 심사에서 떨어진다.

"다시 꿈을 꿀 수 있을까요?"라고 묻기에 앞서 오상식에 대한 죄책감에 오열했던 장그래, 그가 영업3팀 구성원을 흩어지게 만들고 재결합시키는 과정은 분명 드라마틱하다. 하지만 이야기 구조로 볼 때 정규직 승급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알리바이를 제공한 셈이 됐다. 예정된 현실적 결말을 인정한 듯한 안전장치 혹은 해피엔딩을 위한 안일한 배려.

현실의 오상식들은 대기업 차장 출신으로 회사를 꾸릴 수 있(는 여지가 적지 않)다. 20대 계약직이 경력의 전부인 장그래는 어떨까. "노력"만이 전부였던 그에게 쉬이 오상식과 같은 "현실에는 없는" 상사와 '본그래'처럼 활약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을까. 오히려 현실의 장그래들에게 이 사회가 주는 대안은 '장그래법'과 같은 꼼수인데 말이다. 행여 <미생>을 본 세상의 장그래들이 더더욱 '스펙'을 키우려 하고, 당연지사 대기업만을 선호하게 되지 않을까.

한편으로 "세상은 지옥"이라며 "회사에 남으라"고 말했던 오상식의 선배조차도 다시 회사라는 안정적인 울타리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 지옥 같은 회사 밖 현실과 회사 간 경쟁은 제쳐둔 채) 그 울타리를 성실하게 묘사했다는 평을 받는 <미생>은 그러나 장그래를 액션맨으로 만들고, 오상식을 인간미의 화신으로 승화시키는 판타지로 끝을 맺었다. 두 달 넘게 기다려온 결말치곤, 이 어찌 허탈하지 아니한가.

<카트>와 장그래법,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영화 <카트>의 한 장면. 사측의 물대포 공세에 맞서 카트를 밀어 맞서는 마트 노동자들
 영화 <카트>의 한 장면. 사측의 물대포 공세에 맞서 카트를 밀어 맞서는 마트 노동자들
ⓒ 명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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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세상의 장그래들이 봐야 할 대중적인 텍스트는 영화 <카트>일 것이다. 대형마트 비정규직 여성들의 연대 투쟁을 그린 이 작품은, 공들인 캐릭터와 공감 가는 드라마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트>는 중반 이후 지난한 파업의 과정과 그로 인해 허물어져 가는 구성원들의 연대를 정면으로 직시한다. 관객 입장에서, 아프고 또 피하고 싶다.

현실의 연대와 파업이 회사와 공권력에 의해 핍박받고 와해되는 과정을 성실하게 묘사하는 와중에 다시 한 번 힘을 내는 주인공 아줌마들의 얼굴로 맺음 하는 <카트>. 반면 전쟁터 같은 취업난과 계약직, 비정규직의 처지와 직장 생활 백서를 써 내려가다 "우리는 드라마니까"라는 핑계를 대며 판타지로 점프해 버린 <미생>.

연대와 동료애의 차이만큼이나 현실을 정면으로 묘파해내는 작품과 공들인 재현에 그치는 작품이 주는 파급의 넓이와 깊이는 클 수밖에 없다. <미생>에서 연대가 아니라 동료애에 방점을 찍은 이유가 여기 있다. <미생>의 (유례없는 야근 중독자들이 넘쳐나는 한국이 만들어낸)'일 중독자'들에게 연대란 존재할 여지가 없는 이상일 뿐이다. 장그래를 위해 썼던 한석율의 편지가 메아리 없는 외침인 것처럼(그리고 드라마 역시 사원들의 반응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이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됐다). 

때맞춰, '장그래법' 운운하는 이 정부는 정규직의 임금을 줄여서 '장그래들'을 보호하겠다고 나섰다. 모르긴 몰라도, 그 법은 '장그래 보호법'이 아닌 '장그래 양산법'으로 나아갈 공산이 커 보인다. 바둑과 달리, 인생에 '완생'이 어디 있겠냐만 이 사회는, 이 정부는 젊은이들에게 계속 '미생'으로 머무르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은 우리 대통령이 "완생마" 운운하며 허탈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궁금증 하나, 장그래의 원인터내셔널이나 본사에는 노조가 없었을까. 아, 노조가 존재한다 해도 장그래와 같은 계약직 문제에는 '연대'하지 않았으려나. 후속편에서 '갑과 을'의 문제나 직장인의 결혼 문제까지 다룰 예정이라는 윤태호 작가. 원작에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을 언급했던 그가 장그래에게 좀 더 노동자성을 부여하기를 바라는 건 무리한 요구일까. 


태그:#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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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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