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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송내역, 군중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황기철(가명·75) 할아버지
▲ 광역전철안내도우미 12월 10일 송내역, 군중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황기철(가명·75) 할아버지
ⓒ 이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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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은 있으나 불평하지 못했다.

"월급 주는 게 너무 적지. 그렇다고 불만 있다 할 수 있나. 그냥 다 좋다고 했어."

칼바람이 닥친 부천역(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플랫폼에서 이헌상(가명·78)씨가 푸념을 늘어놨다. 이씨는 주 3회 하루 2시간 30분씩 광역전철 안내도우미로 일한다.

광역전철 안내도우미를 비롯한 '노인일자리사업'은 노인의 소득을 보충하고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2004년부터 11년간 실시해 왔다. 올해는 2870억 원의 예산을 들여 31만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주로 보건복지부의 위탁을 받은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사업을 벌이는 식이다. 지자체가 직접 사업을 시행하기도 하고 기관에 재위탁하기도 한다.

2013년, 정부는 노인일자리사업 만족도가 74.1%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종사하는 노인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시민들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이씨도 만족도조사에서 '매우 만족'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봉사'로 전락한 노인일자리사업

부천 광역전철 안내도우미는 출퇴근 시간에 맞춰 송내역, 부천역 등 5개 역에서 50명의 노인이 길 안내를 도맡는 '일자리' 사업이다. 그러나 지난 3일 오후 5시, 송내역에서 만난 황기철(가명·75)씨는 이 활동을 일자리가 아니라 봉사라고 생각했다.

"다 해봤자 월 20만 원도 안 돼. 생활비가 될 수 있나. 교통비만 해도 왕복하면 하루에 이천 원이야. 그냥 봉사라고 봐야지."

이 일만으로 생계를 꾸리기 힘든 탓인지 다른 일을 병행하는 노인들도 있다. 황씨는 "이거 하는 사람(광역전철안내도우미)도 투잡 뛰는 사람이 있어, 돈 벌려고"라며 동료들을 걱정했다.

부천역에서 일하는 김기춘(가명·81)씨도 근심이 많다. 김씨는 "더 받아야 생활에 도움이 되지, 옛날에 50만 원 받고 일했던 청소 일자리만도 못해"라며 일자리를 바꿀지 고민하고 있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2012년 발표한 '노인일자리사업 참여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인들이 노후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금액은 월 80만 원이다. 그러나 지난 11년간 노인일자리사업의 임금은 월 20만 원에서 한 푼도 오르지 않았다. 최저시급이 오를 때마다 근무시간을 줄여 임금을 동결하는 '꼼수'를 썼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후보시절 임금 인상을 약속했으나, 2015년 임금 역시 20만 원이다. 그나마 받는 20만 원도 연중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노인일자리 근로자들은 사업 단절로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실업자'를 만드는 이상한 일자리

18일 아침, 박영자(가명·78)씨가 동자동 이웃에게 복지관 도시락을 배달 중이다.
▲ 노노케어(老老care) 18일 아침, 박영자(가명·78)씨가 동자동 이웃에게 복지관 도시락을 배달 중이다.
ⓒ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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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월·목·금요일이면 서울 용산구 동자동과 후암동 일대 쪽방촌 골목엔 노인 배달부들이 나타난다. 성인 두 명이면 꽉 차는 길을 20분쯤 올라야 복지관 도시락을 기다리는 독거노인의 집에 도착한다. 세탁물을 수거한 후 다시 전달하고, 거동이 힘든 이의 은행 업무를 돕기도 한다. 이른바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老老care)' 일자리다.

그러나 그들이 '근로자'로 일하는 것은 3월부터 11월까지뿐이다. 임금도 20만 원. 대다수 노인일자리는 9개월 동안만 시행된다. 이마저도 지지난해까지는 7개월에 불과했다. 9년 동안이나 제자리걸음이었다. 정부는 작년에야 9개월로 늘렸지만 매년 단절이 반복되는 이 일자리를 정상적인 일자리라고 할 수는 없다.

올 3월부터 근무 중인 김강선(가명·78)씨는 "이 일이 생업은 되지는 않는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김씨는 "계속 받는 것도 아니고 9개월만 받는데? 그래도 쉬면 뭐해, (도시락) 받는 분들도 기다리시니까 봉사하는 거지 뭐"라고 덧붙였다. 임금 지원이 끊긴 올 겨울, 35명의 근무자는 모두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

다른 지자체와 달리 서초구는 2013년부터 100개의 노인일자리를 12개월 기준으로 시행한다. 담당자 황선희 주무관은 "결국 예산 문제다, 사업기간을 늘리면 실제 보수뿐만 아니라 보험, 교육비 등 부대 경비도 같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예산 증액 없이는 9개월짜리 일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노인이 사라진 자리, 불편만 남았다

'담배꽁초 무단투기단속'은 용산구청이 진행하는 공익형 노인일자리사업이다.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 서울역의 흡연자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다. 노인과 공무원이 2인 1조로 짝을 이루어 서울역 부근에서 담배꽁초 투기를 단속하기 때문이다. 흡연구역인 에스 라운지(S Lounge)가 아닌 곳에서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담배꽁초를 버릴 때마다 흰 머리의 그는 중후한 목소리로 저지한다.

"자네…."

한국철도공사 최무성(가명·38)씨는 "아무래도 어르신들이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눈치를 본다, 공무원들이 단속할 때보다 더 긴장한다"며 사업의 실효성을 강조했다. 서울역 근처 학원에 다니는 대학생 반기철(가명·25)씨도 "어르신들이 감시하니 사람들이 꽁초를 보다 덜 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12월 중순 이후, 서울역에서 담배꽁초 투기를 단속하는 노인들이 사라졌다. 이 사업 역시 11월까지 예산 지원되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방치된 담배꽁초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에스 라운지에 한정됐던 흡연구역은 어느새 서울역 광장까지 넓어진 듯했다.

용산구청 노인일자리사업 담당자는 "애초에 12월 예산편성은 되어있지 않다"며 "내년에 다시 할 계획"이라 밝혔다. 서울역에서 담배꽁초를 1년 이상 치워온 환경미화원 임경선(가명·58)씨는 "요즘 감시자가 없어 담배꽁초가 많이 늘어났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12월 17일, 서울역 흡연구역 S Lounge를 벗어나 담배를 피고 있는 흡연자들
▲ 담배꽁초 무단투기단속 12월 17일, 서울역 흡연구역 S Lounge를 벗어나 담배를 피고 있는 흡연자들
ⓒ 김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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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일자리를 잃고, 시민들은 편안함을 잃었다. 물 새는 노인 일자리 앞에 카메라는 없었다. 2014년 1월부터 12월 21일까지 총 8816건의 노인일자리 기사가 있었으나, 문제점을 지적한 기사는 단 4건에 머물렀다. 대부분 기사는 홍보성에 그쳤다. 정부의 전시행정도 문제다. 지난해 정부는 노인일자리 자리를 7만 개로 대폭 늘렸으나, 임금은 동결했다. 벌써 11년째다. 이 탓에 노인일자리사업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처우는 악화됐다.

결국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다. 동국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과 김영태 교수는 "현 임금인 20만 원으로는 생활을 보장할 수 없다, 양적 채우기보다는 자활을 돕는 질적 향상이 먼저다"라고 말했다. 이명수 새누리당 의원도 2014년 국감에서 "일자리 수는 줄이더라도 차라리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며 현 정책의 개선을 촉구했다.

덧붙이는 글 | '20대 청춘! 기자상 응모글'



태그:#노인일자리사업, #복지정책, #광역전철안내도우미, #노노케어, #담배꽁초 무단투기단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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