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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에 대한 관심이 당최 식을 줄을 모른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무관심한 아이들에게조차 모르면 대화에 끼질 못하는 화젯거리가 됐다. 기말시험이 끝난 데다 겨울방학을 코앞에 둔 요즘, '개점휴업' 상태인 수업시간에 아이들의 입과 귀를 열 이만한 소재도 찾기 어렵다.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아이들 스스로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아 교과서를 잠시 덮었다.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일부 부유층의 엇나간 행동들을 통해 우리나라 자본주의를 성찰하고, 선진국의 조건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 보자는 취지로 마련한 수업이다. 순서 없이 자유롭게 발표하고, 상대방 이야기에 덧붙이거나 반박하며 각자의 생각들을 모아가는 자리였다. 예상대로 교실은 '그 여자'(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갑질'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다. 한 마디로 '돈만 많으면 다냐'는 거다.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땅콩 회항' 수업

'땅콩리턴' 논란 이후 일주일 만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직접 고개숙여 사과했지만, 사건 당시 기내에서 쫒겨난 박창진 사무장은 <KBS>와의 인터뷰 중 "회사 측으로부터 거짓 진술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해 충격을 주고 있다.
▲ '거짓 진술 강요' 빨간불 켜진 대한항공 '땅콩리턴' 논란 이후 일주일 만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직접 고개숙여 사과했지만, 사건 당시 기내에서 쫒겨난 박창진 사무장은 <KBS>와의 인터뷰 중 "회사 측으로부터 거짓 진술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해 충격을 주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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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풀이라도 하듯 앞 다퉈 목청을 돋우더니, 화가 풀렸는지 시나브로 목소리가 잦아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현실'로 돌아왔다. 갑질에 대한 분노에서, 갑질에 대한 부러움으로. 개중에는 '그게 어디 그 사람만의 문제냐'며 그저 재수 없이 걸렸을 뿐이라는 말도 나왔고, '그렇다고 찌질하게 무릎 꿇을 게 뭐냐'며 사무장과 승무원을 나무라는 생뚱맞은 타박도 이어졌다.

한때 '스튜어디스'로 불렸던 항공사의 승무원은, 익히 아는 바처럼, 여학생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직업이다. 그런데 요즘엔 남자 아이들조차 장래희망을 조사해보면 심심찮게 나올 정도로, 성별에 상관없는 '로망'이 됐다. 외국어를 잘하고, 키 크고 얼굴 잘 생긴 것만으로는 부족한, 최고의 '스펙'을 갖춰야 하는 '갑 중의 갑'인데, 그들 앞에서 '갑질'을 했으니 돈의 위력을 새삼 깨달았다는 눈치다. 아이들끼리 나눈 대화를 그대로 옮겨본다.

"솔직히 말해서, 승무원 시켜 준다면야 나라면 그 자리에서 발이라도 씻겨줄 수 있어. 더욱이 잘린다고 생각하면 뭔 일이든 못할까."
"그런 비굴함 때문에, '그 여자'가 그처럼 기고만장해진 것 아닐까? '을'들도 반성해야 된다고 생각해."

"법이 자기를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다면, 사무장과 승무원이 그만한 일로 다른 손님이 보는 앞에서 자존심을 포기한 채 무릎을 꿇었을까. 결국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우리 사회 제1법칙의 '비행기 버전'일 뿐이야."
"그보다는 오래 근무하다 보니 승무원이기에 앞서 인간이라는 자존감을 아예 잃어 버려 나온 행동이 아닐까 싶어. 부모님이나 선생님도 차라리 매를 들지언정 무릎을 꿇리지는 않잖아. 그 항공사에는 오너 주변에 '예스맨'만 득시글거린다는 뉴스를 TV에서 본 적이 있어."

"사건이 벌어진 곳이 미국의 뉴욕이 아니라, 국내선의 어느 공항이었어도 이렇게 시끄러웠을까. 이렇듯 세계적인 이슈가 된 건 그런 이유도 있을 것 같아."
"가재는 게 편이라고, 웬만하면 정부와 언론이 나서서 대충 덮었을 텐데, 일파만파 번지는 걸 보면, 조금 엉뚱한 주장 같지만 네 말도 나름 일리 있는 지적인 듯해."

조양호(왼쪽) 한진그룹 회장이 큰딸 조현아(오른쪽)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 리턴' 사건과 관련 12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본사에서 국민에게 사과하고 있다. 같은날 사건 당사자인 조 전 부사장이 강서구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에 출석하며 사과하고 있다.
 조양호(왼쪽) 한진그룹 회장이 큰딸 조현아(오른쪽)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 리턴' 사건과 관련 12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본사에서 국민에게 사과하고 있다. 같은날 사건 당사자인 조 전 부사장이 강서구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에 출석하며 사과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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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마흔이면 우리 엄마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왜 먼저 아버지가 언론 앞에 나서서 사과를 하지? 딸자식을 잘못 교육시킨 탓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자식이 대체 몇 살 먹을 때까지 부모가 대신 용서를 빌어야 할까?"
"다 그런 건 아닐 거야. 당장 우리 부모님도 고등학생 정도면 내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지난 1학기 때 친구들과 장난치다 깬 교실 유리창을 갈아 끼우는 데 내 용돈으로 메꾸도록 하셨거든. 유독 우리나라 재벌 집안들이 '콩가루'인 것 같아."

"법적으로 처벌 받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에게 '을'의 설움을 깨닫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40년을 '갑'으로 살아왔으니, 앞으로 꼭 그만큼을 '을'로 살게 하는 거지."
"맞아. 조금 우습긴 하지만, 정년퇴직할 때까지 말단 승무원으로 근무하게 한다든지, 아니면 앞으로 1등석은커녕 평생 이코노미 클래스에만 타도록 강제하는 벌칙, 어때?"

마치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들 때문에, 중간에 끼어들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한 해 동안 이렇듯 적극적으로 아이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수업이었지만, 항공사와 '그 여자' 한 사람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다구리 보는(뭇매를 가한다는 뜻으로 아이들끼리의 은어)' 것으로 끝날 것 같아 화제를 돌리려 애썼다.

만약 이 자리에 그녀가 있기라도 했다면, 교실 내 분위기상 틀림없이 돌팔매질을 당했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아무리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세대라 해도,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의 특권 의식과 그릇된 행태에 대한 분노만은 살아있는 듯했다. 바로 이때, 한 아이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내 분노의 화살은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돌려졌다.

지난 16일 일간지 등에 게재된 대한항공의 사과광고
 지난 16일 일간지 등에 게재된 대한항공의 사과광고

"선생님, '그 여자'가 잘못한 일을 왜 회사가 용서해 달라고 하는 거죠?"

지난 16일 일간지마다 1면에 실린 큼지막한 사과문을 본 모양인데, '조현아'라는 이름이 들어갈 자리에 엉뚱하게도 '대한항공'이라는 회사의 이름이 실려 있어 황당했다고 한다. 지레 겁먹은 것도 아니고, 누구도 회사를 나무란 게 아닌데, 납작 엎드려 잘못했다고 비는 꼴이 어린 그의 눈에도 어색했단다. 사건이 발생하고 여론이 들끓자, 회사는 언론마다 사과 광고를 내며 그녀의 '흑기사'를 자처했던 터다.

"그녀는 물론 아닐 테고, 그 '공손한' 사과문은 대체 누가 쓴 걸까요? 하늘 위에서든, 땅 위에서든 그 회사에는 온통 '무릎 꿇은' 사람들 밖엔 없나 보죠? 항공사의 잘못도, 비행기의 책임자인 기장의 잘못도, 승무원들의 잘못도 아닌, 그저 그 회사 부사장 직함을 가진 그녀 한 사람의 잘못일 뿐인데, 왜 회사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거냐고요? 오너가 곧 회사인가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그 신문 광고를 자기도 읽었다며 다른 아이가 그 질문을 이어받았다. 그 회사에는 온통 '간신배'와 '무뇌아'들뿐이냐며 격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물귀신처럼 회사를 걸고 넘어진' 그 민망한 사과문이 언론 1면에 실릴 때까지 회사 내에서 누구 하나 제지하는 이가 없었다는 게 더 놀랍다고 말했다. 회사가 무슨 조폭집단이냐며.

회사가 잘못했다고 하니, 처벌도 회사가 받게 되는 거냐며 반문하기도 하고, 그녀가 구속될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며 서로 내기를 거는 아이들도 있었다. 구속을 피할 수 없다는 이유는 세계적인 이슈가 됐으니 짐짓 모른 척하긴 어려울 거라는 것이고, 반대쪽의 논리는 더 단순명료했다. '공주님'이 감옥 가는 것 봤냐며, 잘 해야 집행유예일 거라고 잘라 말했다.

국민께 사죄한 대한항공 언론 광고, 조현아로 바꿔 내야

아이들의 의견을 정리하고 질문에 답도 해줘야 하는데,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려 버렸다. 진도를 나가는 여느 때 같았으면 다음 시간에 이어가자고 두루뭉수리 말했을 텐데,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아이들끼리 대화하고, 질문하면서 다들 스스로 답을 찾았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다만, 버스 떠난 뒤 손 흔드는 꼴이지만, 여기에다 아이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짤막한 답은 해줘야겠다.

개인의 잘못을 회사의 이름으로 덮으려는 건, 회사를 방패삼아 상황을 모면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부끄러운 짓이다. 당장 회사는 언론에 낸 광고에서 '대한항공'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조현아'라는 세 글자를 넣어야 한다. 세계인의 조롱을 받은 이번 일이 '대한항공'이 아니라, 재벌가 오너의 딸인 '조현아'의 비뚤어진 특권 의식으로 인해 벌어진 추태임을 명확히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여전히 '갑질'과 '꼼수'에 길들여진 우리나라 재벌가에게 던지는 국민들의 준엄한 경고가 될 것이다. 우선, 물의를 빚은 그녀는 진심을 다해 사무장과 승무원을 비롯한 회사 구성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법적 처벌을 달게 받음으로써 국민에게 사죄해야 마땅하다. 그러자면 그녀가 누리고 있는 모든 특권을 내려 놓아야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태그:#땅콩 회항, #통합진보당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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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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