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연대 단체 참석자들이 22일 오전 서울 동작구 옛 기륭전자 본사 앞에서 그 동안 지켜왔던 농성장을 정리한 뒤 비정규직 법·제도 철폐를 호소하며 오체투지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얼음 바닥에 오체투지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연대 단체 참석자들이 22일 오전 서울 동작구 옛 기륭전자 본사 앞에서 그 동안 지켜왔던 농성장을 정리한 뒤 비정규직 법·제도 철폐를 호소하며 오체투지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어머, 저 사람들 뭐야? 맨 바닥에서 저러면 추워서 어떡해…."


서로 팔짱을 끼고 지나가던 중년 여성 두 명이 중얼거렸다. 그들 앞에는 위 아래 하얀 소복을 입은 남녀 12명이 일렬로 콘크리트 길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체감온도 영하 7도, 칼바람이 몰아쳐 눈도 채 녹지 않은 날씨에, 청와대까지 오체투지(五體投地)에 나선 전국금속노동조합 기륭전자분회(유흥희 분회장) 노조원들이었다.

22일 오전 11시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옛 기륭전자(현 렉스엘이앤지) 빌딩 앞에서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법·제도 폐기'를 주장하며 오체투지에 나섰다. 오체투지는 본래 신체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게 한다는 뜻의 불교용어지만, 이들은 그간 지켜온 농성장을 정리한다며 "최선을 다해 싸우는,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으로 이를 택했다고 말했다.

'둥둥' 북소리에 맞춰 열 걸음을 걷다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완전히 엎드린 뒤, 잠시 뒤에 손을 모으고 다시 일어나는 참가자들. 간밤부터 내린 눈과 흙이 뒤섞여 길이 질퍽이는 탓에 이들이 입은 하얀 옷은 진흙 범벅이 됐다. 바닥에 엎드린 탓에 코와 이마 등 얼굴마저 까맣게 더러워진 사람도 있었다.

이날 오체투지에 나선 것은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과 명숙 인권활동가, 송경동 시인 등 12명이다. 이들은 행진에 앞서 "한국사회 차별의 뿌리는 인간을 일회용 소모품으로 만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라며 "비정규직 제도를 없애지 않고서는 노동자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비정규직 대책'이라며 계약직 기간연장과 파견업종 확대를 이야기한다"고 비판했다.

차가운 날씨 탓에 패딩을 껴입고 목도리·귀마개 등을 한 참가자들은 "비정규직은 수습기간을 영구화한 것에 불과하다"며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1998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던 (비정규직 없는)세상을, 경제난을 이유로 포기한 결과 서민들이 단군 이래 최대 빚쟁이가 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낮 12시 10분께 출발한 이들이 1시간 동안 움직인 거리는 약 1.14km. 신체 건강한 일반 성인 걸음으로는 20여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누웠다가 걸었다가 더디게 나아가는 참가자들 옆에서, 연대를 위해 참여한 또 다른 투쟁사업장 조합원들이 함께 걸었다. 이들은 '장그래의 설움, 비정규직은 없어져야 합니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하늘 굴뚝 오르고 땅 바닥 기는 노동자들... "언제까지 이래야합니까"     

 오체투지행진단 "현대판 노예제도 비정규직 폐기하라"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오체투지행진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마음 놓고 사는 세상을 위해"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지나가던 행인들은 행진 참가자들이 길거리에 눕는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란 듯했다. 신대방동 주민이라는 한 50대 여성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추운데 저렇게까지 해야겠냐"고 되물었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던 또 다른 중년 여성은 "난 저 사람들이 못마땅하다, 정부를 뭘 어떻게 이기겠다는 거냐"며 눈을 흘기고 지나갔다.

신대방동에서 예복점을 운영하는 오현식(63·남)씨는 이곳에 이사 온 지 올해로 8년째라고 했다. 오씨는 기륭전자 투쟁과정이 정리된 종이를 받아들고는 "지나다니며 기륭전자를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오래 싸운지는 몰랐다,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오씨는 "결국 노동자 개개인이 모여 대한민국을 이루는 거 아니냐, 이렇게 하는 걸 정치인들이 직접 봐야한다"고 말했다. 

이날 투쟁 선포 기자회견에는 코오롱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아래 코오롱 정투위)와 쌍용차 정리해고 노동자,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등 관계자 40여 명도 참여했다. 권영국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올바른 법제도 없이는 고용불안과 사회적 차별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륭전자 건을 통해 봤다"며 "법률가로서 늘 부끄러운 마음"이라고 말했다.

기륭전자 노조원들을 '언니'라 부르며 가깝게 지냈다는 김혜란 코오롱 정투위 총무는 행진 내내 이들을 뒤따르며 안타까워했다. 김 총무는 "복직 소식을 듣고 내 일처럼 기뻤는데, 결국 이렇게 해야 하나 싶어 눈물이 난다"며 "고공농성 중인 쌍용차 해고자들도 그렇고 모두들 '일한 죄' 밖에 없지 않느냐, 언제까지 노동자들이 하늘 굴뚝에 오르고 바닥을 기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울분을 토했다.

오는 2015년, 10년 맞는 기륭전자 투쟁... "낮은 몸 더욱 낮춰 연대를 호소"

 엄동설한 눈 바닥에 온 몸 던진 오체투지행진단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2005년 7월 시작된 기륭전자 투쟁은 내년으로 10년을 맞는다. 당시 "잡담을 했다는 이유로" 문자로 해고통보를 받거나, 출산휴가 신청을 이유로 퇴사압박에 시달리던 노동자 200여명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하지만 이들은 곧 사측으로부터 차례로 계약해지를 당하고, 사측의 일방적 통보에 반발한 파견·계약직 노동자들은 이후 5년 넘게 단식농성·고공농성 등을 벌이게 된다.

이들은 결국 2010년 11월 '정규직 고용'이라는 사측의 합의를 이끌어냈고 지난해 5월 유 분회장 등 조합원 일부가 복직했다. 하지만 사측은 이들을 업무에서 배제하는 등 불이익을 주다가 작년 12월 30일 사전고지도 없이 사무실을 이전했다(관련기사: 회사가 사라졌다, 이런 사장 보셨나요?).

이에 조합원 10명이 사측인 렉스엘이앤지(전 기륭전자)를 상대로 밀린 임금을 지급하라며 임금청구소송을 냈고, 지난달 5일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사측은 각 원고에게 1690만 원씩을 지급하라"는 일부승소 판결을 받았지만 사측은 다시 항소했다. 김소연 전 기륭전자 분회장은 "최종 책임자인 최동열 전 기륭전자 회장은 현재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 전 분회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노동부와 검찰이 사측(기륭전자)의 '불법파견'을 인정했음에도 회사는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했다, 게다가 법원은 노동자들이 낸 부당해고 소송에서 한 차례도 노동자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며 "벼랑 끝에 내몰린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투쟁 뿐"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성탄절인 25일을 포함, 오는 26일까지 매일 오전 9시께~오후 5시께 오체투지 행진을 할 예정이다. 26일 오전 11시께에는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에 도착해 기자회견을 열게 된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가난하고 아픈 우리가, 온 몸을 던지고 낮은 몸을 더욱 낮춰 다시 한 번 연대하자는 의미"라며 "비정규직 법제도 철폐를 위한 행진에 다 같이 참여해달라"고 호소했다.


태그:#기륭전자 투쟁, #비정규직 철폐, #장그래, #장그래 비정규직, #코오롱
댓글19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라이프플러스 에디터. 여성·정치·언론·장애 분야, 목소리 작은 이들에 마음이 기웁니다. 성실히 묻고, 세심히 듣고, 정확히 쓰겠습니다. Mainly interested in stories of women, politics, media, and people with small voice. Let's find hope!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