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최근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화제다. <쿼바디스>는 고통받는 자와 함께 했던 예수의 삶을 잊고 세속의 논리에 편승해가는 한국교회의 실상을 고발한 영화다. 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한 명의 비판적 개신교인으로서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예컨대 개신교 성직자인 목사의 여러 성추문, 바벨탑처럼 끝없이 올라가는 교회의 모습, 교회가 사유재산인양 자식에게 세습하는 목사 등의 행태일 것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모습은 소위 '개독교'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더불어 개신교는 세월호 사건 이후 막말 행렬에도 끼어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공연히 이렇게 (세월호를) 침몰시킨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 등의 말은 믿을 수 없지만 목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들이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행태로 개신교는 본연의 모습을 잃고 개독교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개신교 주류의 부적절한 행태와는 달리 스스로를 비판하며 자정하려는 노력도 있다. 예컨대 개신교 언론인 <뉴스앤조이>는 멈추지 않고 개신교의 부적절한 면을 비판하고, 팟캐스트 방송 <내가 복음이다> 등도 왜곡된 복음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더불어 민중신학자 김진호를 필두로 여러 학자들이 모여 출간한 <사회적 영성>이라는 책도 동일한 맥락에 있다. <사회적 영성>은 세월호 이후의 삶, 세월호 이후의 신학을 묻고 있다.

사회성이 결여된 한국교회

<사회적 영성>, 책 표지
 <사회적 영성>, 책 표지
ⓒ 현암사

관련사진보기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장 18~19절)

한국교회는 이제 사람들에게 완전한 개독교로 자리 잡았다. 예수는 만민의 구원을 외쳤으나 그를 따르는 자라고 자처하는 신도들은 스스로의 구원에 천착하고 있다. 또한 예수는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 등에게 집중했으나 그를 믿는 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스스로의 복을 구하는데 바쁘다. 누군가는 진정한 예수의 삶을 실천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눈에 비친 한국교회는 자신의 구원, 자신의 복만을 간절히 구하는 곳이 되었다.

요컨대 한국교회는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것이라도 모든 것이 신의 이름으로 용인되는 것이 한국교회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 학생들이 희생된 것이 "하나님이 기회를 준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사회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세월호 참사에 있어 종교로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방한한 프란체스코 교황이 열렬한 환호를 받은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사회적 영성>은 기존 개신교의 이 같은 문제점을 파고든다. <사회적 영성>은 교회적 영성을 비판하고 사회적 영성으로의 전환을 꾀한다. 그들이 말하는 교회적 영성이란 교회 안에 한계 지어진 영성, 다시 말하면 '자기 중심의 배타적인 교리 도그마'(245쪽)에 빠져 있고, '뇌물, 사기, 편법 건축, 부당한 펀드 투자 등으로 수십, 수백억, 아니 수천억 원을 남용"(245쪽)하는 영성이다. 그들은 이러한 교회적 영성에서 지적, 도덕적 성찰을 기반으로 "타인과 함께 수평적으로 나누는 관계의 품성"(246쪽)을 갖춘 사회적 영성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적 영성에서 사회적 영성으로

"한국교회가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인 권력과 자본과 동맹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그들의 신정론과 관련이 있다. (중략) 전통적인 신정론의 목적은 '하느님을 변호하는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전능함과 의로움이 부정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전통적 신정론은 결국 고통과 악을 신적 의지와 계획의 일부로 설명한다."(127~128쪽)

한국교회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지향의 문제다. 한국교회의 지향점은 자신이 구원받는 것이며 죽음 이후 천국과 지옥 중에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위를 바라볼 뿐 아래는 내려다보지 않는다. 신의 은총과 은혜를 바랄 뿐 현재의 삶은 그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적 영성은 고립적이며, 죽음 이후에 있을 삶을 누리기 위한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전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중신학적 신정론은 하느님이 아니라 민중을 변호하고 편든다. (중략) 예수는 민중과 함께, 민중의 하나로 고통을 겪는다.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가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나약한 민중이 교권과 금권에 갇힌 예수를 구원한다. 민중이 스스로를, 그리고 하느님을 구원한다. 이런 민중신학적 신정론은 인정론이다."(128~129쪽)

세월호 이후 한국교회의 실상은 사회에 낱낱이 고발되었다. 배타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한국교회는 이제 사회에서 소멸되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이 종교로서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적 영성으로의 전환 외에는 남지 않았다. 위를 향했던 지향을 아래로 향하고, 고통 받는 자와 함께 했던 예수처럼 함께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 신을 변호하는 것 이전에, 인간을 변호해야 한다.

나치를 저지하기 위해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신학자이자 목사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가 '선거'로 독일수상에 뽑힌 뒤 교회가 국가에 대처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내놓았다. 첫 번째는 성경이 규정하는 대로 법과 질서의 환경을 조성하지 않을 때 교회가 국가의 결함을 지적하고, 두 번째는 국가의 행위에 희생당한 이들을 도와야 하며, 세 번째는 바퀴에 짓밟힌 희생자들을 싸매어줄 뿐 아니라 바퀴 자체도 저지해야 한다고 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신학자이자 목사임에도 사회문제에 침묵하지 않았고 신보다 인간을 먼저 변호했다. 이는 아마도 그가 사회적 영성을 가졌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국교회에게 이러한 모습을 바라기에는 아직까지 요원하다. 맹신하고 있는 교회적 영성을 버리고 사회적 영성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자문해야 한다.

"쿼바디스, 한국교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덧붙이는 글 | <사회적 영성>(김진호 외 13명/ 현암사/ 2014. 11/ 정가 15,000원)

이 기사는 본 기자의 블로그 picturewriter.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영성 - 세월호 이후에도 ‘삶’은 가능한가

김진호 외 지음, 현암사(2014)


태그:#사회적 영성, #한국교회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