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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포돌천은 강희제와 건륭제의 글씨에서, 뒤의 낙원문(?源門)은 왕희지(王羲之)가 쓴 글씨 가운데서 뽑아 만든 것이다.
▲ 포돌천의 정문인 남문 앞의 포돌천은 강희제와 건륭제의 글씨에서, 뒤의 낙원문(?源門)은 왕희지(王羲之)가 쓴 글씨 가운데서 뽑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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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라 하고,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라고도 한다. 샘의 도시 지난은 산둥성의 내륙이라 공기는 그다지 좋지 않지만, 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도시인 것 같다. 도시를 감싸고 깨끗한 물길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매력적이다.

이 물길의 원천이 되는 곳이 바로 포돌천이다. BC694년 제나라와 노나라가 영토분쟁으로 전쟁 후 낙수지원(濼水之源)을 국경으로 획정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지난 72명천의 으뜸(七十二名泉之冠)으로 불리는 포돌천이다. 함천(檻泉), 아영천(娥英泉) 등으로 불리다가 송(宋)대 증공(曾鞏)이 용솟음치는 물줄기를 보고 '포돌천(포突泉)'이라 명명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정문인 남문으로 들어서려니 '포돌천'이라는 붉은 바탕에 금색 글씨의 편액이 앞에서, 검은 바탕의 낙원문(濼源門)이 뒤에서 맞이해준다. 앞의 것은 강희제와 건륭제의 글씨에서, 뒤의 것은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가 쓴 글씨 가운데서 뽑아 만든 것이다. 어딜 가나 처음부터 진면목을 보여주는 법이 없는 중국의 원림문화를 반영하듯, 가산(假山)이 병풍처럼 막아서며 그 너머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노랗게 물든 버드나무 아래에서 장기를 두는 중국할아버지들이 정겹다.
▲ 포돌천에서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 노랗게 물든 버드나무 아래에서 장기를 두는 중국할아버지들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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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물고기가 아니니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랴만 포돌천의 물고기는 분명 즐거울 것이다.
▲ 포돌천의 물고기 그대가 물고기가 아니니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랴만 포돌천의 물고기는 분명 즐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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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는데 노랗게 물든 버드나무 아래에서 장기를 두는 중국할아버지들이 정겹다. 그 곁 물가에는 평화롭게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다. 문득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남긴 "그대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겠느냐(子非魚,安知魚之樂)"는 논쟁이 떠오른다.

비취빛 맑은 물에 지하에서 천연 샘물이 공기방울과 함께 끊임없이 올라오니 포돌천의 물고기는 분명 즐거울 것이라고 감히 확신하며, 장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다음 생에 만약 물고기로 태어나야 한다면, 포돌천의 물고기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드디어 포돌천의 세 물줄기가 솟아오르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2000년 여름에 왔을 때는 물줄기가 수면 위로 약간 올라온 느낌이 있었는데, 과도한 지하수 개발과 초겨울인 탓에 겨우 물줄기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정도다. 그래도 <맹자>에서 "물을 보는 데 방법이 있으니, 그 물결을 보라(觀水有術, 必觀其瀾)"고 한 것의 의미는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물결을 감상하는 정자 좌우로 제일천, 포돌천 비가 있다. 돌(突)자의 갓머리,개 견(犬)자의 점 한 획이 없는 이유가 세찬 물줄기에 날아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 포돌천의 관람정(觀瀾亭) 물결을 감상하는 정자 좌우로 제일천, 포돌천 비가 있다. 돌(突)자의 갓머리,개 견(犬)자의 점 한 획이 없는 이유가 세찬 물줄기에 날아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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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이상 그치지 않고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는 대자연의 경이로움은 변함없이 위대하다.
▲ 포돌천의 세 물줄기 1,500년 이상 그치지 않고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는 대자연의 경이로움은 변함없이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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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北魏, 386∼534) 때 역도원(酈道元)이 쓴 <수경주(水經注)>에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수 척에 이르고 그 소리가 천둥 같다(突出雪濤數尺, 聲如隱雷)"는 기록을 보면 과거에는 훨씬 더 세찬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 걸로 보인다. 오죽하면 그 곁에 포돌천이라고 쓴 글자의 돌(突)자의 갓머리 한 획과 개 견(犬)자의 점 한 획이 없는 이유가 세찬 물줄기에 뚜껑이 날아가듯 점이 날아갔기 때문이라고 하겠는가. 최소한 1500년 이상 그치지 않고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는 대자연의 경이로움은 변함없이, 그리고 충분히 위대해 보인다.

과학의 발달로 자연에 대한 신비로움이나 자연에 대해 느끼는 감수성이 많이 줄어든 시대를 살고 있지만, 고대 중국인들은 지하에서 신비로운 물줄기가 용출하는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또 음미하며 끊임없는 교감을 시도했던 모양이다. 포돌천과의 교감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이 증공을 비롯해 소식, 소철, 조맹부 등 한 둘이 아니다.

강희제가 쓴 ‘격단(激湍)’이라는 글귀와 건륭제의 비문이 뒤에 적혀 있다.
▲ 강희제와 건륭제 비석 강희제가 쓴 ‘격단(激湍)’이라는 글귀와 건륭제의 비문이 뒤에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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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는 이곳에 와 세찬 물줄기라는 의미의 '격단(激湍)'이라는 비문을 남겼고 손자인 건륭제는 그 비문 뒤에 또 포돌천에 대한 감탄의 글을 새겼으니, 보기 드물게 두 황제의 글귀가 동시에 새겨진 비석이 포돌천 바로 너머에 우뚝 서 있다. 건륭제는 포돌천의 물맛을 보고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이라 명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가서도 원래 먹던 베이징 옥천수(玉泉水) 대신 지난 포돌천수를 공수해 마셨다고 하니, 생수회사에서 패러디 광고를 하면 좋을 법한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두강천(杜康泉)이라고 적힌 정자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가보니, 줄을 서서 물을 받고 있다. 한 할머니에게 이 물이 정말 좋으냐고 물으니, 끓여서 차를 우리면 차 맛이 훨씬 좋아진다고 하며 생수통 두 개에 먼저 물을 받아 건네준다. 정자 이름에 술을 처음 만들었다는 술의 비조 두강을 쓴 것도 포돌천의 뛰어난 물맛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아무튼 많은 선비들이 신의 선물인 포돌천의 물로 차나 술을 우려 마시며 물줄기를 감상한 것이 이 지역의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오는 모양이다. 안타까운 것은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물 부족으로 지금 지난의 식수는 인근의 황허물을 끌어다 정수해 먹는다고 한다.

차나 술을 빚기 위해 포돌천물을 길어가는 지난 시민들의 모습이다.
▲ 신의 선물인 포돌천의 물 차나 술을 빚기 위해 포돌천물을 길어가는 지난 시민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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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와 건륭제의 비석이 서 있는 안쪽으로 요임금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모신 아영사(娥英祠)가 있다. 흔히 태평성대를 말할 때 전설에 나오는 요순(堯舜)시대를 거론하는데, 서양의 세계관이 미래가 더 발전적이고 평화로울 것이라고 믿는 반면 동양의 가치관은 고대를 더 평화로운 시대로 상정하는 것도 흥미롭다.

아무튼 요임금이 두 딸 아황과 여영을 순(舜)에게 시집을 보내 그의 사람됨을 평가하고, 비록 자식이 아니었지만 그의 능력이 뛰어남을 보고 임금의 자리를 그에게 선양(禪讓)했다. 순임금이 경작을 하며 아황, 여영과 살던 곳이 지난 근처여서 지난의 도로명이나 상호에 순이 들어간 곳이 많다. 아황과 여영은 순임금의 후(后)와 비(妃)가 되었으며 순임금이 죽자 상(湘)강에 빠져 죽어, 훗날 전설의 여신인 상군(湘君)과 상부인(湘夫人)이 되었다고 한다.

사방의 물줄기가 연결되어 있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
▲ 포돌천의 물은 사철 18도 사방의 물줄기가 연결되어 있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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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는 송대 유명한 여성작가 이청조(李淸照) 고거가 있다.
▲ 수옥천(漱玉泉) 그 옆에는 송대 유명한 여성작가 이청조(李淸照) 고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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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돌천에서 퍼져나간 물줄기를 따라 공원을 한 바퀴 도는데, 대리석으로 사각형 우물 모양을 한 곳에선 어김없이 지하수가 올라오는 풍경이 신비할 따름이다. 포돌천의 물은 사철 18도의 온도를 유지한다고 하니, 여름에 더위를 식히기 딱 좋은 곳이다. 물에 손을 담가 보니 초겨울인데도 정말 차갑지가 않다.

공원의 서쪽에 만죽원(萬竹園)이 있는데 청나라 포송령(蒲松齡)이 쓴 괴기소설집인 <요재지이(聊齋志異)>의 '호가녀(狐嫁女)'에 나오는 금으로 만든 잔 이야기의 무대인 흉가가 이곳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수옥천(漱玉泉) 옆에는 송대 유명한 여성작가 이청조(李淸照) 고거가 있다. 이청조가 중양절에 남편 조명성(趙明誠)에게 <취화음사(醉花陰詞)>라는 글을 지어 보냈는데, 남편이 뛰어난 아내의 글 솜씨에 감탄해 자신도 사흘 동안 밤을 새워 15편의 사(詞)를 지어 <취화음사>와 함께 친구 육덕부(陸德夫)에게 보여주었는데, 친구가 좋다고 한 세 구절은 모두 아내 이청조가 쓴 것이었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져 동문으로 빠져나오는데 포돌천에서 배를 타고 대명호로 가는 관광안내 동영상이 걸음을 붙잡는다. 물이 흐를 때 어떤 구멍이든 다 메우고 난 후에야 앞으로 나아간다는데(盈科而後進) 자연과 인문이 어우러진 포돌천에 아직 뭔가 아쉬움이 남아서일 것이다. 동문을 나서니 바로 길 건너 환하게 불을 밝힌 천성공원(泉城公園)의 멋진 야경이 그 아쉬움을 달래준다.

포돌천의 동문으로 나가면 바로 천성공원(泉城公園)이고 물길이 이어져 있다.
▲ 천성공원(泉城公園) 포돌천의 동문으로 나가면 바로 천성공원(泉城公園)이고 물길이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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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포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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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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