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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6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화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수용소의 식사는 항상 배가 고플 정도로 주었다. 그렇다고 음식을 건강에 지장을 줄 정도로 배가 주리게 주진 않았다. 그러나 밥은 알량미 밥으로 끈기가 없어 언제나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았다. 피복은 한국 군인보다 훨씬 잘 입었다. 날마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밖에 나가 5열종대로 앉아 점호를 받았다. 일과는 낮에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수용소 밖으로 나가 돌을 주워다가 영내에 깔곤 했다. 저녁이 되면 다시 인원 점검을 받았다.

나는 부산진 서면수용소에 있으면서 주변 산천과 지질을 살펴보았다. 사방의 산은 그리 높지 않고 땅들도 그다지 비옥해 보이지는 않았다. 부산 부두에도 가서 일을 했다. 부산항에는 큰 군함이나 어선들이 많이 정박하고 있었다.

늘 배가 고팠던 부산진 서면수용소

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전투기가 가미카제 전법으로 미 군함의 굴뚝으로 날아들어 피해가 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배들의 굴뚝을 아무리 봐도 비행기가 날아 들어갈 정도로 큰 굴뚝을 가진 배는 보이지 않아 '어떻게 자살 공격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부산 거리를 보니 건물은 초라하고 북한의 공업 도시처럼 크고 좋은 건물은 별로 없었다.  남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에 초가집이 왜 이리 많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부산은 전쟁의 폐허가 없어 다행이었다.

길거리에 나가면 수많은 피난민들이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모두들 오랫동안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면서 고생을 해서 얼굴이 형편없었다. 우리가 길에 나가면 피난민들은 포로인 우리들 가운데 혹시나 자신들의 자녀가 있을까 두리번거렸다. 

어느 날 우리는 부산 제 2부두로 일을 가다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오십여 대의 트럭이 한 대 당 포로 100명씩 가득 싣고 열을 지어 달리고 있었다.

트럭 한 대가 커브를 돌 때 속력을 줄이지 않고 달리다 많은 사람들이 한쪽으로 쏠리는 바람에 사십여 명이 차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추락한 사람들은 운이 없게도 경사 길에서 미끄러져 차바퀴에 깔려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거대한 군용 트럭에 압사된 사람들은 외상이 참으로 끔찍해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동 중에 동료들이 불의의 큰 사고를 당했지만 우리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부산 제2부두로 이동한 후 철도 침목 운반 작업을 해야만 했다.

부산 방파제 밖에 정박해 있던 영국 상선 한 척은 참으로 거대했다. 굴뚝이 무려 4개나 달려 있었다. 그 큰 배에서 작은 배에 물건을 내리면 작은 배는 제 2부두로 왔다. 우리는 작은 배에서 물건을 다시 부두 위로 올리는 작업을 했다.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하루 종일 작업을 했는데 매우 힘이 들었다.

우리가 작업을 하는 바로 옆에는 오천 톤 급 미국 화물선이 정박해 있었다. 그 곳에선 밀가루 하역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 말이 일하던 포로 한 명이 밀가루 더미에 깔려 죽었다고 했다. 길가에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밀가루로 하얗게 덮인 시신이 보였다.

하역되어 노적가리로 쌓인 거대한 밀가루 더미를 보니 자칫 잘못하면 사고를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이 아무리 고될지라도 우리 일이 더 나아 보였다.

나는 다음 날에도 제 2부두로 작업 차출이 되었다. 어제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를 감시하던 한국인 경비가 포로인 우리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욕을 하고 때렸다. 옆에 있던 미군이 말려 다행히 더 심한 봉변을 당하지는 않았다.

며칠 후 부산 제 2부두에서 다시 일을 하는데 일이 몹시 힘들었다. 배에서 짐을 내리는데 일본서 만든 자동차를 내리고 있다. 풍전(도요타) 자동차였다. 또 다른 짐들도 많이 있는데 포장을 보니 일본어로 표기된 것을 볼 수가 있다. 일본어로 '주의해서 운반하시오'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큰 기선들이 정박해 있는데 작은 배가 큰 배를 밀어 부두에 대었다. 부산항은 평온해 보였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피난민들의 생활은 참으로 비참했다. 많은 피난민이 거리에 가득 차고 가마니나 거적을 깔고 처마 밑이나 논두렁 같은 곳에서 잠을 잤다. 때론 산비탈 아무 곳에나 임시로 집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12월 초순이 되었다. 부산 제 2부두에서 계속하여 철도 침목 하역 작업을 하였는데 일이 힘에 부쳤다. 하루는 점심이 지나 일을 하는데 포로인 동료가 말했다.

"이 노적가리가 뭔지 아니?"

주변에는 노적가리가 많았는데 모두 천막으로 덮여 있었다. 그가 말하길 이 노적가리는 모두 설탕이며 자기가 설탕을 먹어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도 들키지 않게 먹어보라"고 하였다. 나는 기회를 엿보다 미군들의 눈치를 피해 노적가리 속으로 천막을 들치고 들어갔다.  

정말로 설탕 포대가 있었다. 설탕 포대를 열고 한 입 떠먹었다. 하얀 설탕이 입에서 살살 녹아 아주 맛있어 정신없이 마구 먹었다. 한참을 실컷 먹고 나와 입을 닦고 시치미를 떼고 다시 일을 했다.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저녁이 되면 부산진 서면수용소로 다시 돌아왔다. 고된 일 탓인지 저녁밥을 먹을 때가 되어 갈증으로 목이 타올랐다. 당시 수용소 내에는 수도 시설이 없어 물이 귀했다. 나는 수용소 밖으로 나가 샘물을 마시고 들어왔다.

밤이 되자 갑자기 배탈이 나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아팠다. 새벽이 되자 피똥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질에 걸린 것이다. 참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바지에 피가 묻고 똥이 묻어 일어나 앉을 수도 없게 되었다. 나는 사흘 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 상태가 점차 악화된 후에야 비로소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부산진에서 동북쪽에 있는 야전 병원으로 실려 갔다.

피똥 싼 지 사흘 만에 입원, 침대엔...

야전병원에 가니 나를 진찰한 군의관이 한 천막으로 입원을 시켰다. 천막 안 병상에는 이미 수많은 환자들이 누워 있었다. 끔찍한 것은 그 중 한 침대에는 입을 반쯤 벌리고 죽은 시체가 누워 있었다. 간호병은 내게 그 시체를 치우라고 하였다. 나는 주검을 땅에 내려놓았다. 주검이 있던 침대 위에서는 피와 물이 고여 있었다.

간호병이 걸레로 피와 물을 대충 닦더니 나에게 그 침대에 올라가 누우라고 하였다. 나는 기분이 몹시 나빴지만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침대 위로 올라가 앉아 침대 밑에 놓인 시체를 바라보았다. '나도 머지않아 저 사람처럼 되고 마는 것 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전 병원에서 이질치료라는 것이 하루 두 번씩 약을 주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고 단지 죽을 먹는 것이었다. 죽 외에는 일체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다행히 이틀 뒤 피똥이 멎고 일주일이 지나 차도가 있었다.

야전병원에서는 포로수용소에 도는 전염병 탓에 하루에도 백 명이 넘게 사람이 죽어 나갔다. 한 차에 죽은 사람 70여 명을 가득 실어 어디론가 나르곤 했다. 많은 사람이 병사한 이유는 수용소의 열악한 위생 환경으로 돌림병인 이질 환자가 급증하고 의료진과 치료약 및 의료 장비 모두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었다.

천막 안 병상에서 환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가 아침 식사 때가 되어 밥을 먹으라고 깨워도 아무 대답이 없고 조용하면 그 사람은 밤새 죽은 사람이었다. 나는 내 옆에서 이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버린 사람을 여럿 보았다. 

입원한 지 일주일이 지나 군의관이 나에게 퇴원하라고 하였다. 나는 인솔자를 따라 대기실로 옮겼다. 대기실에서 며칠 있다가 이상이 없으면 다시 수용소로 이송되는 것이었다.

나는 한 천막으로 들어갔다. 좁은 천막에는 완쾌된 환자 수십 명이 머물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취침 시간이 되었지만 자리가 비좁아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나는 모포를 든 채 여유가 있는 천막이 어디 없나 다른 천막을 두리번거렸다.

어느 천막을 살펴보니 안에 중공군 포로들이 오십 여명 있었다.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을 했다가 중공군이 참전하여 후퇴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중공군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호기심에 들어가니 한 사람이 중국말로 뭐라뭐라 물었다.

내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니 한 사람이 일어로 일본말을 할 줄 아냐고 물었다. 안다고 대답하니 "왜 왔냐?"고 묻는다. 내가 잠자리가 비좁아서 왔다고 하니 여기는 넓으니 같이 있자고 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그 곳에서 중공군 포로들과 함께 잠을 잤다. 

그 사람은 중국에 있을 때 일본인에게 일본어를 배웠다고 했는데 잘하는 편이었다. 그는 중국 인민 해방군은 중국을 완전히 통일했으니 앞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고 잘 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대화를 하는 것이 신기했던지 다른 중공군들이 옆에 모여 구경을 하곤 했다. 그렇게 닷새를 보내다가 중공군 천막에 있는 나를 본 한국인이 한국 사람이 왜 중공군과 같이 있냐고 하여 나는 다시 한국인 대기 천막으로 돌아갔다.

며칠 후 나는 부산을 떠나 가야수용소로 보내졌다. 낙동강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우 차가왔다. 가야수용소에서는 작업도 안 하고 그냥 실내에서 지냈다. 모처럼 한가한 가운데 들리는 소문에 지금 서울은 중공군에게 함락 당하고 국군이 남으로 계속 밀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1·4 후퇴를 한 것이었다.

수용소 밖을 내다보면 많은 피난민들이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기차 지붕과 열차와 열차 사이에도 사람들이 꽉 차 있어 보기만 해도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하늘에서는 B 29기들이 하얀 연기를 뿜으며 남으로 날고 있었다. 나는 아득한 비행기를 보고 '저 높은 곳에서는 고향이 보일까' 생각하곤 했다.

가야 수용소 밖 들판에서는 한국군이 매일 박격포 연습을 하였다. 멀리 좁은 길에는 자동차의 행렬이 밤낮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날마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논밭이나 산비탈에 오두막집을 짓고 서성거리고 있는 모습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그들을 볼 때 마다 북에 두고 온 부모님과 가족 생각이 났다.  

소문에 남한 각지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약탈, 좌익과 우익 간 보복이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 고향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처음에는 모두들 전쟁이 한 달이면 끝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유엔군과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이제는 국제전이 되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몰랐다.  

가야수용소에서도 식수가 귀해 우리는 가끔 수용소 밖으로 물통을 갖고 가서 골짜기에서 물을 한 통씩 길어 왔다. 이 물에 전염병을 막기 위해 미군들이 하얀 소독약을 한 수저씩 넣었다. 약 20분 후에 약이 가라앉으면 먹는 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산에 가서 물을 날라 식당에서 밥하는 물로 사용하였다. 오가는 길에 전쟁통에 생계가 없어 몸을 파는 여자들을 보았다. 젊은 여자와 군인이 논두렁 아래로 내려가면 사람들이 근처에서 몰래 구경하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부산의 날씨는 매우 추웠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가끔 낙동강 서쪽 멀리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도 보였다. 치열한 전투로 큰 산불이 났다고 했다. 빨치산과 교전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수영비행장에서는 밤낮없이 비행기가 이착륙하였다. 나는 가야수용소에서 2개월 정도 있다가 1월 하순에 갑자기 이동하게 되었다.

거제 포로수용소로 이동, 배고픈 줄 몰랐다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안에 있는 흥남철수작전기념탑 조형물.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안에 있는 흥남철수작전기념탑 조형물.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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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과 함께 트럭을 타고 또 다시 부산항 부두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서 큰 군용 백 하나와 피복을 지급 받았다. 그리고 원산에서 부산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LSD에 탔다. 나는 갑판 위에 올랐다.

우리가 탄 배가 부산 부두를 빠져나가는데 '경복환'이라고 쓴 큰 배를 보았다. 그것은 경복궁의 이름을 딴 일본의 관부연락선이었다. 배가 부산 부두를 벗어나자 모두 수군거렸다.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몰랐다. 멀리 대마도가 보였다. 일본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야단들이었다. 배가 오륙도를 지나 먼 바다로 나갈 때 선수를 서쪽으로 돌려 대마도가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멀리 육지 쪽에서 검붉은 큰 불길이 치솟기도 했다. 

바다의 풍랑이 거세지며 날도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배 뒤를 보면 하얀 물보라가 푸른 바다를 가르는데 파도가 끝없이 부서지는가 싶었다. 고물 쪽으로는 검고 큰 물고기가 등을 내밀었다 들어갔다 하면서 따라온다. 사람들이 돌고래라고 했다. 나는 '야! 물고기가 참 크다' 감탄하며 돌고래 구경을 했다.

배는 저녁 때 거제도 고현리 부두에 도착했다. 임시로 만든 부두였다. 배에서 내려 한 오리를 걸어 한 곳에 들어가 쉬었다가 다시 수월리로 갔다. 그 곳에는 천막은 없고 긴 초가집만 두 채가 있었다. 우리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건설 선발대로 도착한 것이었다.

우리는 매일 건축기사가 빨간 깃발을 매단 폴대를 갖고 측량을 하고 나면 그 자리에 말뚝을 꽂곤 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부두에 가서 끝없이 들어오는 수용소 건설용 나무와 시멘트, 철재들을 쉴 새 없이 하역하였다.

우리는 네 반으로 나뉘어 두 반은 부두에 가서 하역을 하고 다른 쪽에서는 실려 온 것을 현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그 중 하역 일이 더 고되어 서로 하역을 하러 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루는 서로 옥신각신하며 하역 순번을 피하다가 짐을 옮기는 일을 하고 돌아와 보니 내 소지품과 피복 일절을 도난 맞았다. 그러나 어디 가서 찾을 길이 없었다.

거제도, 나는 예전에 지도에서 거제도라고 남해에서 제법 큰 섬을 본 기억이 났다. 거제도는 산이 높고 나무도 많고 산봉우리가 잘생기고 아름다운 섬이었다. 나는 거제도 산천을 유심히 살피었다. 산에는 잡목이 깔끔하며 참나무와 소나무가 많았다. 산자락 여기저기에는 대숲이 있고 추운 겨울에도 하늘로 쭉쭉 뻗은 푸른 대나무가 가득했다.

그리고 산 밑에는 초가가 군데군데 모여 있고 들판은 기름지고 논도 많았다. 볏짚을 보니 작황이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농가 주위엔 감나무가 많아 평화롭게 보였다. 수월리 뒤에 있는 산봉우리도 몹시 아름다웠다. 해변은 모래 대신 돌이 많았는데 돌은 검고 둥글어 몽돌이라고 했다.

2월초 바다 한가운데 섬 거제도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나는 쓰레기통을 메고 둑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기도 했다. 오가는 길에 미군들의 최신 중장비들을 많이 구경할 수 있었다. 주민들도 섬에 최신 장비들이 들어와 비행장이 건설되는 것을 신기한 듯 바라보곤 했다. 나는 그 간의 고된 하역 일에서 벗어나 날마다 측량 기사가 측정한 자리에 말뚝을 박는 작업을 하였다. 

나는 일자로 기다랗게 지은 두 채의 초가집 중 두 번째 집에 살고 있었다. 집 주변은 말뚝을 박고 철조망을 나지막하게 두르고 쇠줄을 쳐서 울타리를 표시하였다. 이곳에서는 국군 경비병이 포로인 우리들을 감시하였다. 군인들은 초가집 입구에 보초를 섰다가 식사 때가 되면 우리와 한솥밥을 먹었다. 다른 수용소 때 보다 밥을 많이 줘서 우리는 배고픈 줄 몰랐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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