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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마지막을 맞이할 때쯤 연초에 다짐했던 바를 잘 지켰는가를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아마 담배를 끊는다거나, 운동을 시작한다거나, 돈을 모아보겠다는 다짐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내 아이가 크는 것을 좀 더 지켜보고, 병원이 아닌 다른 곳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들을 하는 이들도 있다. 왠지 쉬워 보이는 다짐이지만, 이들에게는 절박한 소망이다.

​그런 소망을 가진 이들이 맞는 한 해의 마지막은 사랑으로 넘쳐난다. 모든 순간에 감사하며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민다. "빵 한 조각보다, 작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다"는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이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누구보다 생기있고,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어느 자리에서 그런 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완치자들과 함께한 7번째 백혈병환우회 송년모임

백혈병환우회 송년모임 '겨울밤 행복이야기'에 참석한 환우들의 단체사진
 백혈병환우회 송년모임 '겨울밤 행복이야기'에 참석한 환우들의 단체사진
ⓒ 백혈병환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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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백혈병환우회는 지난 14일 백혈병 환우들과 함께하는 송년 모임을 서초동 큐브 아고라에서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오래전 완치된 사람부터 막 치료가 끝나 완치를 기대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환우들이 함께 했다.

이번 행사는 완치된 환자와 신규 환자의 만남을 통해 완치에 대한 희망과 투병 당시의 마음가짐 등을 나누기 위해 열렸다. 또 완치 후 각자의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다른 정기 환우 모임에서는 서로 아픔을 공유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런 시간이 환우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송년 모임에서 만큼은 완치의 기쁨을 나누고 격려를 통해 용기를 북돋는 것이 먼저다. 새해가 시작하기 전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마음의 각오를 다지는 것도 환우들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한국백혈병환우회의 그간 활동 내용을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전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날 참석한 130여 명의 사람 중 대부분은 백혈병환우회의 후원자이기도 하며, 투병 당시 환우회의 도움을 받은 인연이 있다. 오래전의 완치자들도 그 인연을 끊지 않고, 환우회의 활동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며 지원하고 있다.

한국백혈병환우회는 창립된 지 12년된 환자 단체다. 2001년 '글리벡'이라는 만성 골수성 백혈병에 탁월한 효력을 가진 약을 국내에 공급하기 위해 결성한 연대가 시초가 돼 만들어진 환자 단체다. 백혈병 환우들을 위해 투병지원 사업과 제도 개선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올해로 7번째 백혈병환자들과의 송년회를 맞게 된 백혈병환우회는 감회가 새롭다. 백혈병환우회 안기종 대표는 행사를 시작하며 "예전에 싱가포르에서 동남아시아 환자단체끼리 워크숍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한 암 완치자는 자신을 더 이상 환자라 하지 않고 생존자라고 소개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라며 "우리가 예전에는 환자로 모였지만 지금은 생존자로서 이 자리에 함께 해서 정말 다행입니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완치자들의 에너지 받기 위해 찾아온 투병 가족

당일 퇴원한 강민재 군과 가족을 소개하는 아버지 강덕유 씨
 당일 퇴원한 강민재 군과 가족을 소개하는 아버지 강덕유 씨
ⓒ 백혈병환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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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참석한 백혈병 환우들과 그 가족들의 소개로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완치된 지 10년 차 완치자부터 2, 3년 차 완치자들까지 다양한 환자 가족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소아 백혈병에 걸린 아이들은 그들 부모가 대신해 사연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아직 자신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또 어느 정도 치료가 됐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꼭 완치를 이뤄내겠다는 부모의 의지 덕분인지, 아이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없었다.

사실 그 자리에 백혈병 완치자들만 온 것은 아니었다. 이제 막 치료가 끝난 뒤 경과를 지켜보는 환자들도 있었다. 본래 백혈병은 재발 위험 때문에 치료 뒤 5년이 지나도 쉽게 완치됐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완치자들이 모인 자리에 온 이유는 바로 완치자들의 '기'와 '운'을 나눠 받기 위함이다.

한 가족은 백혈병 투병 중인 아들의 입원 치료를 끝내고 퇴원 30분 만에 그 자리에 참석했다. 강민재군의 아버지인 강덕유씨는 이 자리에 꼭 참석해야했던 이유를 밝혀 격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오늘 우리 아들 민재가 마침 퇴원하는 날이었습니다. 수치가 안 좋게 나왔으면 참석 못했을 텐데 운 좋게 올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꼭 오고 싶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고 완치되신 분들의 기 좀 받으려고 왔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자리가 있으면 참석해 좋은 기운도 계속 받으면서 꼭 우리 아들 민재가 건강해진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1년의 의미가 남다른 이들

한해의 소망을 담은 타임캡슐을 봉인함에 넣는 중인 한 가족
 한해의 소망을 담은 타임캡슐을 봉인함에 넣는 중인 한 가족
ⓒ 백혈병환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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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사에서는 백혈병환자들이 지난해 송년 모임에서 봉인한 타임캡슐을 열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백혈병환우회에서 진행하는 타임캡슐 이벤트는 항상 1년을 주기로 개봉한다.

보통의 타임캡슐은 저장한 뒤 10년 혹은 100년이 지나서 다시 열어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10년 이상의 세월은 너무나 길고 예측하기 힘든 시간일 수도 있다. 투병 당시 1년 앞을 내다보기 힘든 처지에 있었던 백혈병 환자들은 1년 전의 자기 소원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이번 타임캡슐 개봉은 매우 기쁜 소식이기도 했다. 개인 사정이 있어 불참한 사람들 외에 타임캡슐이 모두 개봉됐기 때문이다. 모두가 1년 동안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참석자들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소원을 적은 종이를 캡슐에 넣으며 다음 해의 송년모임을 기약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 어떤 공연보다 뜨거웠던 분위기

동료와 함께 기타연주와 노래를 부른 서준배 씨(위)

프로에 가까운 가창력을 선보인 유진혁 군(아래)
 동료와 함께 기타연주와 노래를 부른 서준배 씨(위) 프로에 가까운 가창력을 선보인 유진혁 군(아래)
ⓒ 승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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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의 마지막은 두 백혈병 환우들의 공연으로 장식됐다. 두 사람 모두 투병 당시 자신의 버킷리스트 1순위에 올려놓았던 것들을 이룬 사람들이다.

"투병 당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기타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5년 전 완치가 되고 나서부터 틈틈이 배운 것이라 아직 어설프지만 여러분 앞에서 꼭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완치 8년 차인 서준배씨는 같이 기타를 배운 동료를 초청해 합동 공연을 펼쳤다. 곡명은 조용필의 '강원도 아리랑'과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였다. 초반에는 매우 긴장한 듯 보였지만 사람들의 호응이 뜨거워지자 금방 공연에 몰입하면서 앵콜곡까지 여유있게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다음 차례에서는 유진혁군이 등장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18살 때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을 진단 받고 한동안 투병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2년이 지나 현재는 치료가 거의 마무리돼 통원 치료 중이며, 예전에 투병과 학업 준비 때문에 하지 못했던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등장한 유진혁군은 임재범의 '너를 위해'와 라디의 '엄마'를 열창했다. 가수 지망생다운 훌륭한 가창력을 뽐내며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덧붙이는 글 | 환자단체연합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백혈병, #백혈병 환우회, #타임캡슐, #겨울밤 행복이야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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