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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신 정원용 묘 표지판
 조선시대 문신 정원용 묘 표지판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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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속담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이름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 죽어간 사람은 수없이 많으나, 이름을 남기는 이는 그들 가운데 소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이들이 더 많은 게 현실 아닌가.

12월 들어 동장군이 서슬 퍼렇게 위력을 떨쳤다. 그래도 반짝 추위가 풀리는 때가 있었다. 지난 20일은 바람이 온기를 살짝 품은 것 같은 날이었다. 오후에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는 정원용 묘소를 찾았다.

아는 이보다 모르는 이가 더 많은 정원용

조선 후기 문신 정원용은 이름을 역사에 이름을 남기긴 했으나, 널리 회자된 인물은 아니다. 그를 아는 이보다는 모르는 이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무덤이 있는 광명시에서는 그를 기리고 그의 자취를 더듬은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광명에는 역사적인 인물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면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사약을 받고 죽은 슬픈 운명의 여인 소현세자빈 강빈과 조선시대 청백리로 손꼽히는 오리 이원익 대감이 있다. 이들 외에도 또 한 사람을 꼽으라면 경산 정원용을 들 수 있다.

정원용은 세도정치가 힘을 발한 조선 후기에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역임하고 그 외에도 주요한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아흔두 살까지 장수한 문신이다. 그는 스무 살에 문과에 합격, 벼슬길에 나서서 아흔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여 년 동안 관직생활을 했다.

그의 삶은 탄탄대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아들과 손자, 사위까지 전부 주요 관직에 등용되었으니 그 시대에 그의 가문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광명시 노온사동에 자리 잡은 경산 정원용의 묘소는 소박했다. 비석 역시 화려하지 않았으며, 주변 또한 힘주어 관리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묘소가 그의 정치적인 입지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소박한 것은 그가 한평생 근검 절약을 강조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양철원 광명시 학예연구사의 설명이다. 정원용은 신도비조차 세우지 않았다.

조선 후기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고 세력을 떨치던 시기였다. 그 때 소론 가문 출신의 정원용은 김조순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고위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풍양 조씨가 세력을 떨칠 때도 그의 일가는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처신의 달인이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그가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연한 처신과 더불어 겸손하면서도 검소하게 살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원용 묘소
 정원용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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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용은 자신이 모셨던 임금들에게도 근검절약을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말뿐인 강조는 의미가 없다. 정원용은 검소하면서 소박한 삶을 실천해왔기에 그런 조언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1783년에 태어난 정원용은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까지 다섯 임금을 섬겼다. 특히 강화도령으로 일컬어지는 철종을 강화도로 직접 가서 한양으로 모셔온 것은 유명하다.

양철원 학예연구사가 펴낸 <경산 정원용 소전(小傳)>은 정원용이 철종을 임금으로 옹립하기 위해 강화도로 간 상황을 세세하면서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정원용은 강화도령 철종을 옹립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고, 강화도에서 철종을 모셔오는 역할까지 맡았던 것이다.

이원범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정원용은 판중추부사의 자격으로 순원왕후 김씨의 뜻을 적극적으로 받들어 논의를 주도하였으며 강화도로 가서 철종을 모셔오는 역할도 맡게 되었다. 왕족이라하나 빈농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던 물정 모르는 19살 강화도 시골뜨기가 위엄을 갖춘 67세의 노회한 정치가와 처음 만난 것은 정원용에 대한 철종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었다. - <경산 정원용 소전(小傳)>에서

당시 철종을 임금으로 옹립하기 위해 정원용은 강화도로 가긴 했으나 그와 함께 간 이들 가운데 철종의 얼굴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하다못해 당시 강화유수조차 이원범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몰랐다.

철종이 살고 있던 허름한 집에 도착해 집안에 있던 남자 3명을 일일이 불러서 이름을 확인한 뒤에야 철종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철종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안동 김씨는 세도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그런 철종을 선택했다.

헌종 때 66세의 나이에 영의정이 되었던 정원용은 철종 때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다. 그리고 철종 11년, 77세의 나이에 세 번째로 영의정이 되고 철종 13년, 철종 14년에 또 영의정이 된다.

정원용은 철종 재위 시절에 영의정에 4번이나 임명되었던 것이다. 영의정 재임기간은 짧았으나, 철종은 재위기간에 그를 4번이나 영의정으로 세우면서 그에 대한 신임을 보여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마지막으로 영의정에 임명된 것은 고종 10년으로 그의 나이 여든여섯 살이었다.

스무 살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 아흔두 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여 년을 관직생활을 했던 정원용은 살아서 복을 온전하게 누린 인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그의 삶에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조선 시대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 여섯 번이나 제수되었다는 것은 그가 능력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도정치 아래서 권력을 충분히 향유했다고 풀이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옛날, 무죄추정의 원칙을 실천한 인물

정원용 묘소 비석
 정원용 묘소 비석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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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용이 광명시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소 때문이었다. 아버지 정동만이 사망한 뒤 묘소를 마련했으나, 송사에 휘말려 묘소를 옮길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부모의 묘자리로 좋은 곳을 찾던 그는 당시 시흥현 남면 아왕리에서 터를 찾았고, 이곳에 부모를 모셨다. 이후 정원용은 부모님의 묘소 관리 등의 목적으로 아왕리(지금의 광명시 노온사동)에 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원용의 아버지 정동만의 묘소는 현재 정원용 묘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정원용은 부모를 합장해서 모셨으며, 그 역시도 부인 강릉 김씨와 합장되었다. 잘 자란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묘는 풍수지리 문외한인 내가 봐도 명당으로 보인다.

정원용이 관직생활만 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문장이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되는 정원용은 많은 저작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창작했던 시는 3000수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부만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문집인 경산록을 포함해서, 영변부사 시절의 글을 모은 <약산록>, 회령부사 시절의 <경산북정록>, 평양감사 시절을 기록한 <기성록>이 전해지며, 살인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책으로 조선 후기 지방 사회생활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는 <유경록>도 그의 작품이다. 또한 그는 일기문인 <경산일록>을 남겼는데 평생 동안 일기를 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양철원 학예연구사는 "정원용이 오랜 세월 동안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겸손하고 유연하게 처신했기 때문이지만 꼼꼼하게 글로 정리하면서 기록으로 남긴 것도 한몫을 했다"고 풀이한다. 정원용은 꼼꼼하고 세밀하게 기록을 남기면서 이를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체화시켰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정원용이 좋은 관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 양 학예연구사의 설명이다.

지방관 시절 백성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면 잘못한 백성들에게 우선 징벌을 주기보다 전후 사정을 살펴 온화하게 대하여 개선토록 하였다. 또한 죄인은 전체 죄상이 밝혀지기 전에는 무죄로 추정하여 대우토록 하였으며 되독이면 무거운 죄보다 가벼운 죄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살인사건 기록과 처리 기록인 <유경록>을 남긴 것도 힘없는 백성 중에 억울한 죄인이 없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 양철원의 <경산 정원용 소전(小傳)>에서

물론 정원용에 대한 평가가 후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서는 명분에 얽매이는 보수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와 외세에 대해 쇄국적인 태도를 보여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원용은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화이근신(和易勤愼)'을 좌우명으로 삼아 평생을 흐트러지지 않고 살아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화이근신은 조화, 소박, 성실, 신중을 의미한다.

1874년 1월 3일, 정원용은 추운 날씨에 찬 공기를 쐬지 말고 이불에 들어가라는 주변의 권고에 "추운 날씨에 불도 못 때는 가난한 집 사람들은 이 같은 날에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대답을 했고, 몇 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아흔두 살이었다.

70여 년 이상을 관직생활을 하고 더불어 장수를 누린 정원용은 죽음 또한 고통 없이 편안하게 맞이했다. 유복하게 태어나 큰 굴곡 없이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평탄하게 살아온 그는 죽음 또한 편안했으니 복 받은 삶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왼쪽은 정원용 묘소, 오른쪽은 그의 아버지 정동만 묘소.
 왼쪽은 정원용 묘소, 오른쪽은 그의 아버지 정동만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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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묘를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광명시 노온사동에 썼기 때문일까? 정원용과 그의 아버지 묘소를 둘러보면서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그렇다면 명당은 따로 있는 것이고, 후손들은 명당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일까? 하긴 그렇다고 굳게 믿는 이들이 있으니 지관이 존재하는 것일 테고, 명당을 찾아 헤매는 이들이 있는 것이겠지.

영의정을 6번이나 지냈고, 나라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지만 평생을 근검절약을 실천하면서 살아왔던 정원용은 어쩌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는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가다보면 긍정적인 면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높은 관직에 올랐으면서도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추구하고 자식들뿐만 아니라 임금에게도 '소박한 생활'을 권한 정원용의 정신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지 않을까?

동장군이 날이 제대로 선 칼을 휘두르면서 바람을 몰고 오는 한겨울, 가난한 이들을 걱정하며 삶을 마감한 정원용의 묘소를 찾은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살아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음은 결코 피해가지 못하는 것. 후대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면, 그래서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 경산 정원용의 삶은 양철원 광명시 학예연구사의 <경산 정원용 소전(小傳)>을 참고했습니다.



태그:#광명기행, #정원용, #노온사동, #광명시,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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