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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사단 윤 일병은 군 입대 후 112일 만에 부모 한 번 못 만나보고 선임병들의 구타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을 계기로 육군이 단 18일간 조사한 결과 3919건의 군내 가혹행위가 적발됐습니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가혹행위가 자행되고 있다고 추정됩니다. 군이 병영문화를 개선하겠다고 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여전히 심각합니다. 이제 군에만 맡기지 말고 외부에서 본격적으로 감시하고 개입할 때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병영에 햇빛을' 기획 연재기사를 싣습니다. 기획을 마무리하면서 타이완 현지취재를 통해 타이완 시민사회와 군이 장병 인권 문제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타이완의 병영 인권 상황 개선 노력을 통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우리 군이 나가야 할 방향을 짚어봅니다. [편집자말]
전 타이완 군 검찰관 장운충(44)씨. 상관의 비리를 조사하려고 했던 그는 이 일이 빌미가 되어 1년간의 옥살이를 했다.
▲ 장운충 전 타이완 군 검찰관 장운충(44)씨. 상관의 비리를 조사하려고 했던 그는 이 일이 빌미가 되어 1년간의 옥살이를 했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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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군의문사를 계기로 지난 20년 동안 군인 인권 개선 운동을 펼쳐온 타이완 군중인권촉진회 대표 첸피에씨. 첸씨는 처음 정부를 상대로 싸움을 시작했을 때 막막했다고 했다. 평생 주부로만 살아온 첸씨에게 군대는 물론이고 군법은 전혀 낯선 세계였다.

첸씨가 홀로 외로운 투쟁을 이어가고 있을 때, 그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있었다. 현역 군인 신분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불익을 감수하고 용감하게 나섰던 이는 바로 장운충(44)씨다. 군 법무관이었던 그는 첸씨의 법률자문 역을 자임했고, 때론 거리 시위를 함께하기도 했다. 

지난 9일 기자는 첸씨 자택에서 장씨를 만날 수 있었다. 언론 앞에 나서길 한사코 사양하던 그는 첸씨의 간곡한 설득으로 인터뷰를 허락했다.

타이완 국방관리학원(법무, 의무, 경리 등 전투근무지원 인력을 양성하는 군 교육기관 - 기자 주) 법학과를 졸업하고, 육군 법무장교(군 검찰관)로 근무하던 장씨는 지난 1996년 상관인 사단장의 비리 첩보를 입수하고 조사를 진행하려다 보직 이동을 당하게 된다. 상부의 불법적인 조사 방해와 부당한 인사 조치에 항의하던 장씨는 첸씨와 함께 국방부 앞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공론화 시켰다.

하지만 이것이 빌미가 되어 1998년 '직위방종죄'(품위유지 위반 및 명령불복종)로 구속되어 1년간의 옥살이를 한 후 강제 전역됐다. 시위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장씨가 조사하려고 했던 고위 장성은 기소되거나 사법처리 되지는 않았지만, 타이완 검사원 연례보고서에 관련 사실이 기재됨으로써 장씨가 제기한 의혹은 사실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사령관 비리 보고가 빌미 되어 옥살이까지

첸피에 대표는 장운충씨가 군 검찰관 시절 사령관의 비리 혐의를 포착하고 보고서를 올린 사건에 대해 "새우가 고래를 건드린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 장운충씨(왼쪽)와 첸피에 대표(오른쪽) 첸피에 대표는 장운충씨가 군 검찰관 시절 사령관의 비리 혐의를 포착하고 보고서를 올린 사건에 대해 "새우가 고래를 건드린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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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의 시위와 구속 등 일련의 사건은 타이완에서 군내 법치주의 확립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시켰다. 이후 타이완의 군 사법체계는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1999년 10월 타이완 입법원이 군 사법기관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일반 형사소송절차와 군 형사소송 절차의 차이점을 제거하는 내용으로 군사심판법을 대폭 개정한 것이다.

먼저 각 부대 지휘관에게 집중되었던 수사와 재판 권한이 모두 국방부 장관의 권한으로 전환됐다. 또 군 검찰 및 군사법원의 인사 교류가 금지됨으로써 군 검찰 및 군사법원은 (지휘관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수사 및 재판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아직도 한국 군사법원법에 남아 있는 심판관 제도(법조인이 아닌 일반 장교가 군사재판에 심판관으로 참여하거나 재판장을 맡는 제도)나 관할관 제도(사단장 이상 지휘관이 군 검찰과 군사법원 행정을 총괄하는 제도)가 타이완에서는 이때 없어진 것이다.

타이완군 사법체계의 일대 변화를 가져온 장본인이었지만, 군에서 쫓겨난 후 장씨는 노점상 등을 전전하며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장씨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기꺼이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군에서도 '법치' 확립되어야...

- 군 검찰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타이완 군에서의 법치(法治) 문제에 대해 고민이 깊었다고 들었다.
"예전 군 사법체계는 법을 모르는 지휘관들이 그들의 경험에 의해 판결하고 형량을 정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군사재판에 개입해서)원칙과 절차 대신 몸에 배인 관성에 따라 명령했다. 하지만 나는 관성이 아니라 법과 규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원칙을 지키려고 지휘관에 항명한 적도 있었다고 알고 있다.
"동인(東引, 중국 푸저우성에 인접한 타이완 섬) 방어사령부에 근무할 때, 선임병의 지시에 따르지 않은 후임병이 폭행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사령관은 폭행한 선임병을 '즉각 구류하라'고 지시했지만, 나는 (인신을 구속하기 위해서는) 사건에 대한 조사가 먼저라고 생각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 일로 사령관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나는 윗사람의 말을 잘 듣는 착한 군인은 아니었다."

- 사령관의 비위 혐의를 보고한 것도 같은 부대에서의 일이었나.
"그렇다. 그곳에서는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타이완에서 배를 타고 6시간이나 가야하는 동인에서 사령관은 비리와 부조리를 일삼으며 마치 제왕처럼 군림했다. 군 검찰관으로서 나는 이런 일들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사령관과 고급장교들에 대한 비리 첩보를 입수해서 육군 사령부와 국방부에 보고했다."

- 사령관을 기소한 것인가.
"당시까지의 타이완 군 사법체계상 위관급 검찰관은 위관급까지만 조사하고 기소할 수 있었다. 사령관은 중장(한국군의 소장에 해당 - 기자 주)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에 대한 조사와 기소 권한은 육군사령부와 국방부에만 있었다. 그래서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던 것이다."

- 보고서를 올린 다음에 어떻게 되었나.
"문제가 불거지자 사령관은 본토로 소환됐지만, 사법처리는 받지 않고 단순 '실수'로 처리됐다. 사령관이 소환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도 보직 이동됐다. 소환된 사령관은 작전차장이라는 요직을 거친 후 전역했다. 끝내 아무런 사법 처리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사령관은 무사히 전역하고 나는 다른 곳으로 전출 당했다. 하지만 그에게 비리가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밝혀졌다. 황마마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5번이나 이 섬을 방문했고 백방으로 노력했던 결과다."(인터뷰 도중 첸씨는 당시 장씨의 계급이 중위였다면서 "새우가 고래를 건드린 사건"이라고 했다)

- 전출당한 후에는 상부의 부당한 명령과 외압을 주장하면서 시위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후 국방부는 내가 수집한 사령관 비위 자료를 내놓으라고 계속 압박했다. 동시에 회유도 했지만 나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사건이 발생하고 3년 뒤인 1998년 6월 감옥에 가게 되었다. 장교로서의 품위유지 위반 등이 이유였다."

법조인이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은 '자기부정'

- 사령관의 비리를 문제 삼지 않았다면, 법조인으로서 순탄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후회한 적은 없는가.
"법조인이 법에 따라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부정'이다. 난 한 번도 내가 한 일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군 검찰관으로서 군내의 부조리와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감옥에 가기 전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내가 법조인으로서 한 일을 들으시고는 '왜 군법이 아직도 바꾸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발전하지 않는 군대의 모습이 유감스럽다'고 하시더라. 이런 아버지 말씀에 나는 내가 한 행동이 정당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 당신은 타이완의 군 사법제도가 개정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저 군 검찰관으로서 규정대로 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군사심판법의 개정을 목표로 했던 것이 아니다. 단지 법조인으로서의 양심에 따라 법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행동의 결과들이 잘못된 군 사법제도를 개혁하는데 일조했지만,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 제대 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다. 근황은.
"몇 년 동안은 길거리에서 주쉬에까오(돼지의 피를 응고해 만든 타이완 전통 떡의 일종- 기자 주)를 팔았다. 지금은 새로운 일을 찾고 있다. 지난해 '홍중추 상병 사망 사건' 이후 평시에 군 사법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군 법무관 시절 동료들도 군대를 나와 실업자 신세가 됐다. 비록 그들은 연금을 받고 나는 받지 못한다는 차이가 있지만..."(웃음) 

상관의 비리를 조사하려다 1년간의 옥살이를 한 후 강제 전역 당했던 전 군 검찰관 장운충씨는 여러 해 동안 노점상을 했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 노점상 시절의 장운충씨 상관의 비리를 조사하려다 1년간의 옥살이를 한 후 강제 전역 당했던 전 군 검찰관 장운충씨는 여러 해 동안 노점상을 했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 장운충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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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역 : 박종순



태그:#지앙운충, #군 사법제도, #타이완 군사심판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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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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