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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이 아침 9시였으니, 도대체 저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일까?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한시간을 기다렸다.
▲ 덕유산 곤돌라를 타기 위해 줄선 관광객들 이 시간이 아침 9시였으니, 도대체 저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일까?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한시간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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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설쳤다. 아이들 썰매 끌어주느라 피곤해서 일찍 든 잠자리였다. 하지만, 막상 누우니 생전 처음 보게 될 눈꽃이 눈앞에 아른거려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누가 꺾어가는 것도 아닌데, 날씨만 춥다면 그대로 유지될 터인데, 자고나면 녹아 없어질 듯 불안했다. 더구나 덕유산 눈꽃은 제대로 보기 어렵다고들 했다.

그 이유는 눈꽃을 감상하기 위한 3대 조건이 딱 맞아 떨어지는 날이 겨울 중에 며칠 안 되기 때문이란다. 첫째로 눈이 내려야 하고, 둘째로 날씨가 맑아야 하며, 셋째로 바람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눈꽃과 설경을 가슴에 품을 수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조건은 만족시켰으나, 맑은 하늘과 바람 없는 날씨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애들을 깨우고, 짐 정리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오전 9시 반부터 운행되는 곤돌라에 1등으로 탑승해서 아무도 밟지 않은 미지의 눈밭에 내가 길을 내리라. 천천히 가자고 투덜대는 아내를 채근해서 9시도 되기전에 숙소를 나섰다. 다행히도 하늘은 맑았다. 덕유산 정상에 바람만 없으면 삼박자가 완벽히 맞아 떨어진다.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휘파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곤돌라를 타기 위해 주차장에 들어갔더니, 이미 여러 대의 관광버스에서 내린 등산객들이 줄을 지어 표를 끊고 있었다. 주차장도 거의 들어찼고,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부지런하다는 사실과 나의 안일한 대처에 대한 원망과 후회의 감정을 추스르며 표 사는 줄에 동참했다. 9시 조금 넘은 시각에 이미 300여 미터는 될 법한 줄이 늘어져 있었다. 뛰는 놈은 늘상 나는 놈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인터넷 정보에 의하면 최소 한 시간은 기다려야 탈 수 있으며, 운 좋으면 삼십 분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딱 맞았다. 줄 선 지 거의 한 시간 만에 드디어 곤돌라에 탑승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만큼 서둘렀기에 망정이지, 오후에는 세 시간쯤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도 어디선가 들려왔다. 어른 1만4천원, 아이 1만 원(왕복 운행료)의 적지 않은 비용에도 사람들은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곤돌라를 처음 타보는 아들 녀석들의 신난 표정. 뒷편으로 눈 덮인 덕유산 자락의 멋진 풍경이 보인다
▲ 곤돌라 안의 나의 가족 곤돌라를 처음 타보는 아들 녀석들의 신난 표정. 뒷편으로 눈 덮인 덕유산 자락의 멋진 풍경이 보인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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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돌라 안에서 바라본 풍경. 카메라만 바깥으로 내놓고 어렵게 찍은 사진이다.
▲ 덕유산 곤돌라 곤돌라 안에서 바라본 풍경. 카메라만 바깥으로 내놓고 어렵게 찍은 사진이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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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추운 관계로 곤돌라의 창이 얼어붙어 바깥이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눈꽃에 눈이 멀긴 했지만, 난 엄연한 고소공포증 환자였기 때문이다. 땅을 밟지 않고 바라보는 풍경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특히나 그 풍경이 발밑에 존재한다면 애당초 포기다.

그럼에도 가자미눈으로 힐끔힐끔 바라 본 설경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아이들은 처음 타보는 곤돌라 자체에 재미를 느꼈고, 나보다 간이 세 배쯤 큰 아내는 바깥 풍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신이 난 아이들에게 절대 뛰어서는 안 된다는 반 협박을 한 것은 당연히 나의 몫이었다. 그렇게 불안감과 기대감, 그리고 경이로움이 혼합된 감정 상태로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곤돌라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눈 만드는 기계에서 뿌려지는 인공눈이 시선을 가렸다. 자연의 멋스러움을 방해하는 것은 늘상 사람이 만들어 낸 구조물과 그것들의 배설물이다. 휴게소 앞은 등산화에 아이젠을 장착하는 사람들로 복잡했다. 12월 15일까지는 등산로가 폐쇄되어 기껏해야 백련사까지 2~3킬로 남짓한 산행일 터인데, 날카로운 갈고리로 눈을 짓밟으려는 등산객들이 좀 얄미웠다. 장비나 복장은 말 그대로 히말라야행인 사람들.

덕유산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수 있는 구상나무 한그루가 눈옷을 걸치고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 눈꽃이 핀 구상나무 덕유산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수 있는 구상나무 한그루가 눈옷을 걸치고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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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북적대는 사람들만 아니었으면 신선으로 착각했을 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 덕유산 정상의 눈꽃-1 주변에 북적대는 사람들만 아니었으면 신선으로 착각했을 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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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볼수록 경이롭고, 신비하기까지 한 눈꽃.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 덕유산 정상의 눈꽃-2 보면 볼수록 경이롭고, 신비하기까지 한 눈꽃.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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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 앞을 빠져 나와 등산로 쪽으로 좀 올라가니 드디어 눈앞에 장관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 이것이 그 유명한 눈꽃이구나! 한라산과 덕유산 등 몇몇 산에만 존재한다는 구상나무에 맺힌 눈꽃은 정말이지 눈물겨웠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외로이 서있는 구상나무와 거기에 피어난 눈꽃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챙겨야 할 아이들도 잠시 잊은 채, 영혼이 눈꽃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눈꽃을 처음 본 심정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나의 미천한 어휘로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나, 굳이 몇 자로 기록해야 한다면 대충 이정도 수준일 것이다. 내림과 동시에 가지에 들러붙어 얼어버린 하얀 천국의 가루들이 대열을 이루었다. 그 가지런함이 붓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듯하고, 그 정적인 자태가 세상 어느 꽃에 비할 바 아니었다. 그 어우러진 풍경 또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다. 죽기 전에 꼭 봐야할 몇 가지가 있다면 그중에 으뜸은 바로 설경 속에 피어난 눈꽃이지 않을까?

정상에는 어른 무릎 높이정도의 눈이 있어서 아이들이 놀기에 더 없이 좋다
▲ 눈밭에서 뒹구는 아이들 정상에는 어른 무릎 높이정도의 눈이 있어서 아이들이 놀기에 더 없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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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에 눈이 멀어 잠시 정신이 혼미해 졌나보다. 아내의 도움 요청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들이 아예 눈밭에서 헤엄치고 있다. 향적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위치한 평지에는 아이들이 놀기 좋을 만큼 눈이 쌓여있다. 다행히 바람도 없어서 생각보다 춥지는 않았다. 눈밭에서 뒹구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내와 그 모든 장면을 품어내는 희고 푸른 자연의 경관을 미친 듯이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등산로 폐쇄 기간이라서 그나마 등산객들이 적은 기간이었는데도, 줄이 끊이질 않는다
▲ 향적봉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등산객들 등산로 폐쇄 기간이라서 그나마 등산객들이 적은 기간이었는데도, 줄이 끊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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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아지경에 빠질만큼 아름다운 눈꽃들
▲ 향적봉 가는 등산로의 눈꽃들 등산로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아지경에 빠질만큼 아름다운 눈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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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객들은 줄을 지어 백련사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아이젠이다 고어텍스자켓이다 요란을 떠는 그네들이 좀 얄미웠지만, 등산로를 향하는 걸 보니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등산화도 없는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등산로를 걸어올라 가는 것은 사실 좀 무리였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순 없다! 조금의 맛이라도 볼 요량으로 아내에게 아이들을 떠넘기고 대열에 합류했다.

등산로를 따라 백 미터쯤 가보니 과연 안 오면 후회할 뻔 했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 위를 가득 채운 눈꽃송이 가지들 밑으로 지나가는 그 기분이 천국의 계단을 걷는 듯했다. 이대로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산과 더불어 살아도 좋을 듯 싶었다.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이 나의 발길을 되돌리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덕유산 자락에 남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설경에 취하고 푹 빠져서 두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전혀 상투적이지 않은 풍경과 잘 맞아 떨어졌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무거울 정도로 덕유산 눈꽃은 나의 인상에 강렬히 남았다. 그리고 굳게 다짐했다. 등산화를 사서 다음에는 끝장을 보리라고. (다음 회에 계속)


태그:#덕유산 눈꽃, #덕유산 곤돌라, #향적봉,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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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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