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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 회장을 아빠로 둔 어떤 분이 어쩌다가 그 회사의 부사장이 됐고, 어쩌다가 회사 비행기를 타게 되어 마카다미아를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마카다미아가 봉지째로 그분에게 건네졌고 '우리 항공기 서비스는 이렇지 않아'라고 굳게 믿었던 건지 맘이 상한 그 분은 막 뜨려던 비행기를 회항 시켜 자신을 불쾌하게 했던 사무장을 떨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상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일명 '땅콩회항'의 전모다. 사건 발생 이후 (아직 그 전모가 다 밝혀지진 않은 것 같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비난의 수위를 높이며 서로 공감하고 지지를 보내고 있다. 마치 조현아같은 상사가 주변에 있기라도 한 듯 분풀이 하는 모양새다. 자신의 권력을 총동원해 일개 직원을 해코지하는 교활한 상사가 실제 주변에 있다면 더 한숨이 나오겠지. 아니면 '우리 상사는 저 정도까지 미친 XX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거나.

일명 '땅콩리턴' 논란을 빚은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12일 오후 서울 강서구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에서 조사를 받기 위해 도착, 취재진이 준비한 포토라인으로 걸어오고 있다.
이날 조 전 부사장은 승무원과 사무장에게 사과하겠냐는 질문에 "진심으로 사과하겠습니다"고 말했다.
▲ 모습 드러낸 조현아 "진심으로 사과하겠습니다" 일명 '땅콩리턴' 논란을 빚은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12일 오후 서울 강서구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에서 조사를 받기 위해 도착, 취재진이 준비한 포토라인으로 걸어오고 있다. 이날 조 전 부사장은 승무원과 사무장에게 사과하겠냐는 질문에 "진심으로 사과하겠습니다"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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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을 당한 승무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이륙을 앞두고 안전점검을 위해 긴장하고 있었을 그들. 비행기 이륙을 앞두고 직업 정신으로 무장하며 움직이고 있던 그들 틈으로 한 진상 승객이 끼어들어 '왜 날 제대로 챙겨주지 않느냐'고 징징대며 어리광 피우는 상황. 앞으로 기내에 진상 재벌3세 전담팀이라도 배치해야 하나.

사건 당사자였던 대한항공 박창진 사무장이 지난 12일 용기를 내어 "무릎을 꿇린 상태에서 모욕을 줬고 삿대질을 계속했다"며 당시의 부당한 상황을 미디어에 설명하지 않았다면 진실은 또 다시 미궁에 빠졌을 것이다(조현아 전 부사장은 폭행폭언에 대해 "모르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러 외압에도 굽히지 않은 직업인으로서의 양심과 긍지에 박수를 보낸다. 조현아 전 부사장은 뒤늦게 사태수습을 위해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진상 갑질'의 대표 아이콘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듯하다.

허나 이 분만 진상 갑질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건 아니다. 2013년 포스코에너지의 한 임원도 비행기를 궁궐로 착각했는지 임금님 행세를 하며 진상을 피우지 않았나.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임원은 기내식 밥이 제대로 익지 않은 것을 이유로 라면을 주문했으나,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승무원에게 재차 다시 끓여오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이 알려지면서 한동안 '진상 갑질'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갑부계 진상들뿐 아니라 승무원을 '아가씨'라 부르며 하인 부리듯 하는 승객들도 떳떳해 보이진 않는다. 일단 승객들마다 제 각각 편한 대로 승무원을 부른다. '승무원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걸까? 땅콩과 마카다미아 논란보다도 화제가 되지 않는 비행기 승무원의 권리가 계속 마음에 걸린다.

비행기 승무원은 다 친절? 여긴 달랐다

외국의 한 비행기 안 모습.
 외국의 한 비행기 안 모습.
ⓒ free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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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나가는 비행기를 처음 탔던 건 2000년이 넘어서였다. 남들 다 가는 어학연수 한 번 제대로 못 가본 나에게 비행기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모든 승무원들은 친절했고 무엇보다 승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듯보였다.

앉아 있노라면 밥도 나오고 술도 나오고 땅콩도 나왔다(슬프게도 마카다미아 넛은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했다). 비행기만 타면 어린아이처럼 창 밖을 보며 신기해 했던 나였으나 해외 출장 및 여행 10년차가 넘어가니 각 비행기의 기내 서비스를 비교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비교의 대상은 대개는 승무원들이다. 입사하기 위해 몸무게 조절까지 해야 하는 한국의 승무원. 그 마른 몸으로 승무원들은 좁은 좌석 사이를 지나 열심히 기내식 카트 및 면세품 판매 카트를 날랐다. '비행기 승무원은 다 이렇게 과도하게 친절하고 마냥 웃는구나'했다가 미국과 유럽 항공을 타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2000년대 초 프랑스 도빌 영화제를 다녀올 때 탔던 에어 프랑스 항공.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기내식 업체가 파업을 해 기내식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무시무시한 안내방송을 했다. 10시간 넘게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밥을 못 먹으면 무엇을 먹나? 그들은 대신 어디선가 공수한 샌드위치를 나줘주고 컵라면을 원하는 사람은 승무원들이 있는 쪽으로 와서 먹으라고 했다. 컵라면은 셀프였다.

그 많던 승무원들은 밥을 찾아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인지 기내를 드문드문 오갔다. 제대로 된 식사가 제공되지 않았건만 누구 하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엄청 욕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겉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독일과 브라질 항공 승무원들은 기내식을 '던지는' 수준의 서비스를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웃지 않았다. 막 탑승하는 승객을 맞이할 때 짓는 미소를 제외하곤 거의 무표정에 가까웠다. 기내 면세품도 팔지 않았다. 그런데도 승무원들은 바빠 보였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은 기내의 책임자들이었고 테러 위협 정도가 아니라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대개는 그들의 손바닥 안이었다.

생각해보면 마치 어린아이를 챙기듯 승무원들이 승객들 모두를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챙겨줄 이유는 없었다. 그들의 할 일은 승객을 접대하고 안전하게 지키는 것뿐이다. 그 이상의 서비스를 하고 싶다면 그건 승무원 개인의 자유 의지다.

최고의 승무원 경험은 지난해 미국 내 환승을 위해 탔던 아메리칸 에어라인에서 벌어졌다. 처음 타보는 항공사 비행기였는데 국내선이라 기내 환경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 국내선에선 비행 시간이 5시간을 넘어가도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승객이 알아서 탑승 전에 먹을 걸 사오든가(반입이 된다) 기내에서 파는 차디찬 샌드위치를 사서 먹어야 한다. 대개는 비싸고 맛없는 기내 샌드위치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를 사 들고 탑승해서 대충 한끼를 때운다. 그들에게 있어 비행기는 최단 시간을 위해 선택하는 교통수단일 뿐이지, 비행기 탑승 순간 계급이 '갑'으로 바뀌는 환상의 공간이 아니다. 

미국 국내선에선 비행 시간이 5시간을 넘어가도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승객이 알아서 탑승 전에 먹을 걸 사오든가(반입이 된다) 기내에서 파는 차디찬 샌드위치를 사서 먹어야 한다.
 미국 국내선에선 비행 시간이 5시간을 넘어가도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승객이 알아서 탑승 전에 먹을 걸 사오든가(반입이 된다) 기내에서 파는 차디찬 샌드위치를 사서 먹어야 한다.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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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비행 시간은 점심 때였다. 내 뒤에 앉아 있던 승객은 승무원을 불러 샌드위치를 주문하려 했다. 그러나 승무원은 샌드위치가 이미 동났다고 말했다. 그 승객은 "밥도 안 주면서 승객 수만큼 샌드위치를 가지고 타야 하는 게 아니냐. 샌드위치가 품절돼서 비행기 내에서 밥도 못 먹는다는 게 말이 되냐"며 엄청 화를 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다지 크게 화를 내지 않는 미국인들의  특성상 그녀의 목소리는 굉장히 컸다. 국적이 어떠하든 누구나 배가 고프면 민감해지는 법이리라. 그런데 승객의 고함 소리에 승무원이 한 술 더 떴다(무릎따윈 꿇지 않는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도 회사가 말을 듣지 않아요."

그러더니 아예 그 승객 옆에 앉아 대화판을 열었다.

"샌드위치가 많이 남는다고 승객 수보다 훨씬 적게 실으니 이런 일이 발생하죠. 이런 건 우리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어요. 승객분이 제발 회사에 불만 좀 표해주세요. 제발이요."
"아니. 이게 말이나 되냐고요. 승객이 배가 고픈데 어떻게 할 거요!"
"더 웃긴 건 뭔지 아세요? 그 샌드위치에는 우리가 먹을 분량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회사가 돈 아낀다고 승무원들이 비행 중에 먹을 밥도 안 줘요. 각자 알아서 싸오든가 사서 먹으라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되나요? 이 담요도 보라고요(담요를 들고 있었다). 원래 담요도 기본으로 지급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담요도 안 나눠주고 승객이 요청해야 가져다 준다고요. 우리 일이 더 많아진 셈이에요. 샌드위치 무게 때문에 기름이 더 많이 든다고 하는데 그깟 샌드위치 무게가 얼마나 나간다고.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말문 터진 승무원의 말에 빠져든 승객은 자신의 허기를 잠시 잃었는지 오히려 승무원을 위로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더니 둘은 잠시 동안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최악의 서비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이어지는 승무원의 말.

"배고프시면 저희가 땅콩이라도 좀 더 드릴게요."

그 승무원이 승무원으로서 베풀 수 있는 친절은 거기까지였다. 어쩌면 그녀는 가장 연장자 승무원으로서 고객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을 제대로 꿰고 있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속내야 어찌하든 이 상황은 나에게 있어 굉장한 문화충격이었다.

승무원이 회사에 대해 투덜거리는 것도 그랬지만, 그보다 먼저 승무원이 승객과 마주 앉아서 마치 친구처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나로선 생경한 경험이었다. 언제나 승무원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승객은 서비스를 받는 입장 아니었나? 승무원과 승객 사이의 대화란(그걸 대화라고 한다면) "치킨이요? 소고기요?" 하면 "소고기요" 하는 수준의 것이 아니던가.

비행기 안에서 '갑을' 관계는 없다

이런 미국 비행기를 타면서 얻은 깨달음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와 받는 자가 '갑을'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 내 고객 서비스 경험이 대체로 그러하다. 내 돈을 내고 서비스를 이용하지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한국처럼 언제나 방글방글 웃고 콧소리를 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한국의 친절도가 10이라면 미국은 한 3정도의 친절이랄까.

비록 고객을 응대하는 미소도 없고 무뚝뚝하기 그지 없지만 진심어린 안부인사와 감사를 보낸다면 그들도 미소로 화답한다. 말이 잘 풀리면 그 이상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 낫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문화적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무원이란 이유로 직업적 책임 이상의 요구에 마땅히 응해야 하고 과도한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등의 감정 착취를 당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항이나 비행기 어디에도 당신이 비행기를 타면 갑자기 '무한 갑질'을 할 수 있다고 써있지 않다. 비행기는 장거리용 교통수단일 뿐이다. 미국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오갈 때마다 승무원은 땅콩을 주면서 늘 같은 말을 한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으시면 프레첼을 드릴게요."
"아뇨, 땅콩 주세요."

땅콩을 봉지째 받으면서 해야 하는 말도 늘 정해져 있다. "접시에 담아와라, 매뉴얼 모르냐"는 말이 아니라, "감사합니다"라는 말이다. 이 상황에선 누구도 갑이 아니고 누구도 을이 아니며 무언가를 받으면 감사를 표시하는 게 소통의 기본이다.

사건이 연일 논란을 낳고 있는 가운데 '땅콩 회항'과 관련해 16일, 국토교통부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을 검찰에 고발하고 대한항공도 운항 정지나 과징금 처분을 내리기로 했다. 그런데도 걱정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남은 승무원들이 억울하게 피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 기우일까? 기우이길 바란다. 앞으로 비행기에서 작은 땅콩 봉지를 받아들 때마다 어떤 기분이 들까? 쓴 웃음이  나오겠지.

덧붙이는 글 | 글쓴이 홍수경은 문화 칼럼니스트로 이 글은 '글 쓰는 여자들(www.singlesparks.net)'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조현아, #땅콩리턴, #승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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