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6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화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얼마쯤 가니 길가에 콩더미가 있었는데 누군가 불을 질러 콩이 타고 있었다. 나는 콩때기에서 탄 콩을 허겁지겁 주워 먹었다. 고소한 콩으로 실컷 요기를 한 후 다시 길을 걸었다. 한나절쯤 되어 양덕군 온천면에 도착했다. 이름처럼 온천과 별장이 있었다. 주변 경치도 무척 아름다웠다. 

이곳 마을 입구 검문소도 치안대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를 보고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나는 고향에 간다고 했더니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천이요"라고 답했다.

치안대원이 나에게 "당신 부모는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직 모르고 있지 않소? 그러니 일주일 늦게 가나 빨리 가나 마찬가지 아니요? 물론 집에 빨리 가고 싶겠지만 우리 치안대에 사람이 많이 부족하니 우리를 도와주다 가는 것이 어떻소?" 라고 말했다. 그는 부탁조로 말했지만 사실상 협박으로 느껴졌다. 만일 내가 거절한다면 어떤 해코지를 할지 무서워 협조하겠다고 했다.

치안대에 붙들려 허드렛일을 하다

처음에 한 일은 돼지를 잡는 일이었다. 큰 돼지를 잡아 온천으로 가서 물에 씻기고 털을 뽑았다. 온천은 노천 온천으로, 논 가운데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 나왔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온천물에 손을 담그니 추위가 씻은 듯 가셨다.

나는 조석으로 밥도 나르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치안대 뒷바라지를 하였다. 밤에는 뜨거운 온천물에 두 시간씩 몸을 담그며 몸을 풀었다. 그렇게 오륙일 동안 온천욕을 하였다. 그 덕분으로 맹산과 양덕읍에서 맞은 상처가 말끔히 나았다.

치안대에서 일한 지 일주일 만에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나는 온천면을 떠나 다시 마전을 향해 길을 걸었다. 가는 길은 큰 바위와 산줄기가 이어져 아름다웠다. 고개 밑에 이르러 사람들을 만나자 산속 곳곳에 잠복한 인민군이 불시에 출몰한다는 말도 들렸다. 

그날 밤은 불안한 마음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새벽같이 일어나 산세가 험준한 마식령산맥을 넘어 임진강 상류를 향해 길을 걸었다. 아흔 아홉 구비를 돈다는 아호비령 고개는 이름 그대로 매우 험했다. 그 가파른 굽이굽이 길마다 교전으로 전복된 차량과 주검들이 산재해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저녁에야 고개를 넘어 마전리에 도착했다. 마전에는 비행장이 있고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비행기로 원산 함흥 일대에 필요한 보급물자를 실어 나른다고 했다.

나는 한 농가를 찾아 하룻밤 숙박을 부탁하였다. 여기서부터 우리 집까지는 근 백리 길 이었다. 내일이면 그리운 집에 도착할 생각을 하니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눈을 뜨니 밖에는 세찬 비가 오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하루를 더 묵게 되었다.

다음날 길을 나서며 생각하니 나는 전쟁이 난 후 모진 고생을 했지만 어디에 가더라도 밥과 잠자리를 흔쾌히 마련해주는 따뜻한 인정을 만났다. 모두 하늘이 보살핀 덕분이었다.
'이제 하루만 참자. 고향까지는 백리 길, 드디어 집으로 가는구나.' 고향을 향한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나는 마전 비행장에 이르러 난생 처음 헬리콥터를 봤다. 잠자리 모양을 한 헬리콥터가 활주로도 없이 뜨고 내리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전투기들이 쉴 새 없이 비행장에 이착륙하면서 이 산 저산 골짜기에 기총 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비행장 위로는 커다란 수송기가 낙하산으로 떨어뜨리는 물자들이 내려 앉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도 곳곳에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튿날 이천으로 가려고 하니 그 길은 인민군이 많다고 하여 나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마전에 계속 머물 수도 없고 평양 방면으로 갈 수도 없었다. 곰곰 생각한 끝에 원산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얼마쯤 가니 미군이 포대로 진을 치고 있었다. 미군 병사 한 명이 날 발견하고 나에게 총을 겨눴다. 그는 땅을 향해 손짓하며 "Down!" 하고 소리쳤다. 난생 처음 보는 미군이었고 말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손짓을 보니 엎드리라는 표시 같았다. 나는 재빨리 땅에 엎드렸다.

잠시 후 미군 한명이 다가왔다. 커다란 손이 엎드린 내 몸을 구석구석 수색하였다. 미군은 일어서라는 손짓을 하며 "Up!" 하고 외쳤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치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군은 내게 "Hands Up!" 이라고 소리쳤다.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듣자 그는 양손을 머리 위에 얹는 흉내를 냈다. 나는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렸다.

나는 천신만고 끝에 고향을 눈앞에 두고 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미군 4명이 내 뒤에서 총을 겨누고 날 연행하였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비행장으로 끌려갔다. 비행장에는 큰 창고가 있었다. 그 속에 들어가니 어림잡아 수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붙잡혀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전사자들의 시신
 한국전쟁 당시 전사자들의 시신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엎드려"...고향 바로 앞에서 미군포로가 되다니

끼니가 되어 배가 고파도 미군은 밥을 주지 않았다. 단지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드럼통 하나만 달랑 주었다. 처음 사흘은 배가 몹시 고팠으나 곡기를 끊고 물만 마시다보니 속이 오히려 편안해졌다.

나는 엿새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군들이 우리를 트럭에 태웠다. 휘장을 덮은 트럭 한 대마다 오십 명 남짓씩 올랐다. 포로를 실은 차는 스무 대 정도였고 우리를 호송하는 차는 앞뒤로 오십 대가 넘었다. 칠십 여대나 되는 트럭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원산을 향해 출발했다. 공중에서도 두 대의 비행기가 떠서 차량을 엄호했다.

태백산맥을 넘는 큰 고개에 가끔 인민군이 출몰하여 기습 공격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작은 병력으로는 산을 넘어 가지 못한다고 했다.

아침에 출발한 트럭이 고개 밑에 이르러서 갑자기 멈추어 섰다. 아무리 기다려도 차는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비좁은 차안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으려니 몸도 결리고 지루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멈춘 차량 행렬 주변에는 미군 비행기들이 굉음을 내며 계속해서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차는 다시 출발했다. 차가 고개 마루에 올랐는데 방금 전투가 끝났는지 수많은 미군들이 길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 주변에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미군들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를 실은 차량 행렬을 보더니 갑자기 달려들어 총의 대검을 차량의 휘장 속으로 마구 찔렀다. 포로를 실은 차량 여기저기에서 갑자기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포로를 실은 차량 앞뒤에 타고 있던 미군들이 황급히 뛰어 내려와 대검을 휘두르는 동료들을 제지하였다. 덕분에 내가 탄 차량은 무사했다.

나중에 들으니 원산에서 평양을 향해 이동하던 미군 부대가 고갯길에서 예상치 못한 인민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미군 지원부대가 원산에서 급파되어 다시 인민군과 미군 사이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 때 죽은 미군의 복수를 우리에게 한 것이었다.

헬리콥터들이 부상당한 미군 병사와 사망한 미군들을 헬리콥터로 쉴 새 없이 실어 나르고 있었고 길가에는 기관총으로 중무장을 하고 사주경계를 하는 미군 차량들이 즐비하였다.

산마루에 올라가니 격추된 비행기 두 대의 잔해가 보였다. 한 대는 기체가 불에 타 형체가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다른 한 대는 겉보기에도 멀쩡한 동체가 참나무 숲에 거꾸로 쳐 박혀 있었다. 주변에서는 불도저가 동원되어 흙을 깎고 밀면서 간이 헬기장을 만들어 미군 부상병을 이송하고 있었다. 멀리 푸른 동해 바다도 훤히 보였다.

우리를 실은 트럭은 격전지를 무사히 지나 서행을 하다 오후 4시경 내리막길을 달렸다.
그러나 고개 너머 산골짜기에서는 아직도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는지 총소리, 포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어둠이 깊어지자 불꽃놀이를 하는 듯이 골짜기마다 예광탄이 수 없이 터졌다. 예광탄이 펑펑 터질 때 마다 산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밤이 되자 산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던 인민군의 공세로 다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전투지역을 통과하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차량 행렬은 밤 열 시경에야 겨우 무사히 원산에 도착했다. 미군은 우리를 원산형무소에 수감시켰는데 "Hurry! Hurry!" 라고 소리치며 방으로 등을 떠밀었다.

그날 밤 형무소의 좁은 방 하나에 서른 명이나 쪼그리고 앉아 밤을 새웠다. 이 방은 북한정권이 우익 인사들을 정치범으로 수감했다가 후퇴할 때 몰살시켰던 방이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식사로 주먹밥이 배식되었다. 흰쌀에 콩을 약간 섞은 콩밥에 반찬으로는 고등어 한 토막씩을 주었다. 엿새를 굶었던 탓인지 밥맛이 꿀맛이었다.

낮이 되자 포로들에 대한 개별 심문이 시작되었다. 심문관은 군복을 입었는데 생김새가 우리처럼 생겨 미군으로는 보이질 않았다. 그가 내게 일본말로 일어를 할 줄 아냐고 물어 그렇다고 답하니 일어로 질문하였다.

그는 "당신은 어디서 왔고 부대가 어디요?" 라고 물었다.
나는 "인민군 45사단 소속으로 영원서 탈출해서 왔소" 라고 대답했다.

그가 탈영할 때 부대의 규모와 도망 당시의 상황을 물어봐 나는 겪은 사실 그대로 설명을 했다. 나는 미군에 일본인이 근무하는 것이 이상하여 일본도 연합군으로 참전했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은 하와이에 사는 미국 국적의 일본인으로 미군이지, 일본군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는 내게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일단 모두 부산으로 데려 간 후 사회가 안정이 되면 각기 고향으로 보내 준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조만간 집에 돌아갈 희망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부산 포로수용소에 갇히다

11월 14일이 되었다, 우리는 원산 형무소에서 나와 다섯줄씩 서서 원산항을 향해 걸었다. 번화했던 시가지는 함포 사격과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큰 도로에는 수많은 정찰기들이 내려 앉아 있었다. 항구에 도착하니 미군 함정들이 바다 여기저기에 엄청나게 많이 떠있었다. 수 백 척의 함정들과 수송선들이 항구를 꽉 메우고 먼 바다에도 수없이 많은 대형 선박들이 정박해 있었다.

우리는 부산행 상륙함 LSD를 타기 위해 원산항으로 갔다. 그곳 함상에서 난생 처음 흑인을 보았다. 나는 말로만 들었지 흑인이 그렇게 까말 줄은 몰랐다. 어떻게 저렇게 까만가하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무섭게 보였다. 함정을 타면서 예전에 '명심도'라는 전도지에서 보았던 마귀의 소굴로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LSD 한 척에는 무려 삼천 오백여 명의 포로가 승선했다. 배의 공기를 환기 시키느라 환풍기를 쉴 새 없이 돌려대는 바람에 사람들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선내는 몹시 춥기만 했다.
배가 출발하고 몇 시간이 지나자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높은 파도가 치는 먼 바다에 나온 모양이었다. 배 멀미를 하여 토하는 사람들이 생겨나 여기저기에서 악취가 풍겨났다.

배에 있는 동안에 식사로 증기로 찐 주먹밥 한 덩어리씩을 주었다. 남들은 멀미를 하여 밥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나는 멀미를 전혀 안 했기 때문에 주는 밥을 언제나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원산서 출발한 배는 꼬박 이틀이 걸려 11월 16일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배에서 바로 내리지 못했다. 선상에서 하루 밤을 더 지낸 후 이튿날이 되어서야 배에서 하선하였다.

부산항 제 2부두에 도착해서 창문으로 내다보니 부산항 부두에는 많은 배가 정박하여 물자를 하역하느라 붐비고 있었다. 바로 옆 제 1부두에 관부연락선 흥안호가 정박해 있는 것도 보였다. 말로만 듣던 관부연락선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나는 '많은 한국 사람이 일본을 왕래하면서 수많은 곡절을 남긴 게 저 배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차에 실려 부산 수용소로 갔다. 입감 수속으로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카키색의 군복으로 갈아입었는데 앞과 뒤에 POW(Prisoners Of War)라고 적혀 있었다. 말 그대로 전범자가 된 것이다.

개인 사물로 밥사발, 나무젓가락 그리고 담요 한 장씩을 배급 받았다. 식사로 밥을 주는데 쌀알이 가늘고 길며 풀기가 전혀 없어 한 그릇을 다 먹어도 밥을 먹은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이 베트남 쌀로 지은 알량미 밥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우리는 거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 다음 날 서면 수용소로 갔다. 그때 군번이라며 내 번호를 알려주는데 63849라고 했다. 나는 그 때부터 포로수용소의 몸이 되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천막생활을 했다. 천막 하나에 80명씩 수용되어 매우 비좁았다. 잠은 맨 땅위에 가마니를 덮은 후 그 위에서 담요 한 장을 깔고 덮어 잤다. 겨울이라 날씨가 추웠지만 사람들이 부대끼는 온기로 견딜 만했다.

아침이 되면 천막 안에서 5열로 앉아 기상 점호를 받았다. 그 후 몇 백 명씩 짝을 지어 인근의 돌을 주워 마대에 담아 가지고 와서 수용소 영내 기반을 다지는 일을 하였다.

그런 일을 하는 동안 운동도 되고 부산 구경도 할 수가 있었다. 부산 서면 부산진 일대는 부산의 외곽으로 사방을 바라보니 산들이 큰 산은 아니나 제법 높았다. 산에는 나무가 없고 벌거숭이였다. 부산항에 가보니 절영도가 보였는데 산이 제법 높았다. 들에는 채소들이 잘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부산 제3부두와 제 2부두로 가서 하역 작업도 하고 밖에서 풀을 나르는 작업도 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했다. 방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과를 보내던 어느 날 인천 쪽에서 포로들이 수용소에 새로 들어왔다. 나는 그들 가운데 뜻밖에 형 친구 윤준섭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민주당에 근무하면서 형과 자주 우리 집에 놀러왔고 시간이 늦으면 자고 가기도 했었다. 나는 한걸음에 달려가 형님 소식을 물었다. 그러나 그도 잘 모른다고 대답하여 실망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 형님은 서면 민주당에 근무하다가 국군이 들어 온 후 집으로 갔다고 했다. 당시 국군이 서면 일대를 장악한 후 서면과 인근 지역에는 치안대가 조직되어 치안유지에 나섰다고 했다. 그래서 아마 형님도 치안대 활동을 하려고 집으로 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인민군이 후퇴를 하면서 산골인 판교면에 들어갈 때는 국군으로 가장하고 태극기를 들고 면에 들어갔다고 했다. 판교 사람들은 멀리서 태극기를 보고 국군이 오는 줄 알고 치안대가 앞장서 인민군을 환영했다고 했다.

인민군은 치안대를 모두 붙잡아 면사무소에 가둔 후 집단 사살했다고 했다. 그래서 판교면 치안대 치고 살아남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는 기독교 신자로 노동당에 가입했다가 탈당을 하셨다. 형이 치안대로 활동했다면 아마도 형과 함께 반동으로 처형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에게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는 서면 치안대에서 활동을 하다가 인민군에 밀려 연천까지 후퇴했다가 미군에게 잡혀 포로로 취급당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억울한 사정이 내 처지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우리 형님이 집에 돌아간 후의 소식은 전혀 들은 바가 없지만 아마 치안대 활동을 했다면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가족을 만나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부모님, 형님 내외. 누이동생 셋, 조카 생각에 그만, 참았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태그:#한국전쟁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논어지와 스토리를 만들어 일반인들이 논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