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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그늘막을 사용했다. 이번에는 엄마 차례이다.
 다음 날 그늘막을 사용했다. 이번에는 엄마 차례이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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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아침밥을 먹은 후 현을 데리고 루즈 비치에 갈 때 필요한 그늘막을 사겠노라고 집을 떠났다. 반사적으로 쇼핑을 경계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쇼핑을 즐기는 타입이다. 그렇기에 쇼핑을 두고 가끔 신경전을 할 때가 있다. 때문에 남편이 집 안에 무엇인가 들여놓을 때는 처음부터 이실직고하든가, 아니면 발각 전까지 음지에 숨겨두거나 해야 한다.

캠핑을 하고 가족이 2:2로 떨어져 본 적이 없기에 느낌이 사뭇 이상했다. 그래도 잠시 뒤면 오겠거니 하고 쭈와 <여러 가지 바닷물고기> 책을 한 권 다 읽었다. 일거리를 달라는 쭈가 방 정리 및 청소까지 다 마쳤지만 남편은 돌아오지 않는다. 자동차 소리가 날 때마다 자꾸 밖을 쳐다보지만 오지 않았다.

운전이 위험하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고, 어제는 북아일랜드 할머니로부터 자세하게 경험담도 들었던 터라 이미 나의 상상 속에서 남편은 포르투갈 길 어딘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경찰은 남편의 신분을 확인하고자 차량을 뒤져 볼 것이다. 대한민국에 거주하지만 이미 여러 국가를 떠돌고 있는 남편의 여정을 추적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결국 사고지점 인근에 있는 몇 곳의 캠핑장 중 '투리스 캠포'하고도 609번 자리에 있는 나를 찾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까? 난 어떡하지? 여권은 어디 있지?

이미 상상 속 소설에서는 남편을 잃어 버린 엄마의 절망감과 상관없이 쭈는 심심해 죽겠다고 성화다. 할 수 없이 책 한 권을 챙겨 수영장으로 이동해 시간을 보내게 됐다. 담장 쪽에서 쭈를 부르는 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말 반가웠다. 일순간 긴장감이 쫙 풀리며 허탈감이 몰려왔다. 그 곁에 남편이 있는데 얘기를 듣자니 25분이면 가는 거리를 1시간이 넘도록 헤맸단다. 아이구야.

역시 필요한 것 외에 여러 가지 쇼핑을 즐기'시'고 온 남편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1만 4000원짜리 그늘막을 정말 힘들게 샀다며 꺼내놓았다. 순간 그 그늘막의 크기에 놀라 남편의 무사함에 안도했던 감사함이 싹 사라졌다.

"뭐야, 여보. 너무 작잖아. 우리 넷이 머리만 들이밀면 꽉 차겠다."
"작나? 많이 작나?"
"차라리 뒤집으면 괜찮겠는걸. 이건 뭐 넷이서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며 써야 할 크기구만. 훈이 나와, 현이 들어가. 현이 나와, 쭈 들어가. 쭈 나와, 엄마 들어가. 이래야겠네."
"내일 바꿀 수 있으면 바꾸고 다시 하나 사야겠다."
"안 바꿔주면 우린 새로 사고 그건 다비드(캠핑장 스태프) 줘."

이미 지쳤음에도 다시 예정된 쇼핑 덕분에 남편의 눈빛이 일순간 반짝였다.

"아~ 여보!"

네덜란드 개에게 물린 현, 병원에 가다

보비 이 개….
 보비 이 개….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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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수영장에서 일가족이 모였다. 어제 파두 콘서트에서 만난 네덜란드 노부부가 바에 앉아 있었다. 어찌나 두 분이 말이 없으신지, 물론 50년을 살아온 부부에게 매순간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계속 두리번거리며 또 심심해 죽겠다는 폼이다. 남편은 인사를 할 겸해서 그쪽으로 갔다.

할아버지 의자 밑에는 여행 중에 본 개 중 가장 소심해 보이는, 소의 크고 순한 눈빛을 가진 '보비'가 있었다. 바쁜 주인 덕에 늘 혼자 집에 있다는 불쌍한 보비는 현의 관심에 겁을 먹은 듯 주인의 의자 밑에 머물렀다.

그리고 나는 루드와 일상적인 대화를 하며 곁눈으로 보비를 쳐다봤다. 보비가 의자 밑에서 나와 '현의 관심에 부응하는구나'라고 생각한 순간 정확히 3초 뒤, 현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개가 현을 물었다. 아이들이 방긋 웃으면 생기는 팔자 주름 그 위쪽인 코 옆이었다. 거기서 피가 나는 듯 싶더니 입 안에서도 피가 나오고 개에게 물린 부분은 속살까지 보였다. 나는 순간 이성을 상실했다.

"뚫렸다, 구멍이 생겼다"가 영어로 생각이 안 나서 바둥바둥 하는 순간 남편은 현을 안고 의무실로 향했다. 남편이 '저쪽에 가서' 상황을 말하란다. 저쪽이라고 해봤자 식당인데... 나는 하도 정신이 없어 식당으로 가서 의사를 찾았다. 사고 전 아침에도 식당에 가서 대화를 텄던 터라 그들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식당에 의사가 있을 리 만무하고 그들은 세이프가드를 가리켰다.

그때서야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늘 그 자리에 노란 옷을 입고 앉아 있던 세이프가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와 함께 의무실로 들어갔다. 나에게 안긴 현은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대며 울었고 나는 정신줄을 완전히 놓은 상태였다.

"개에게 물렸어요. 개는 안전한 개일 거예요. 구멍이 났어요. 안쪽에서도 피가 나요."
"아, 이 분이 보시도록 가만히 있어봐."
"천만 다행이에요. 심각하지 않아요. 긁힌 상처예요."
"단순한 스크레치가 아니에요! 의사가 언제 오나요?"
"여기에서 의사는 납니다."

나는 또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신이 의사라구요?"
"아니요. 여기에서는 제가 의사라고요."

내 머릿속 세이프가드는 대한민국 휴가 1번지인 동해안에서 보았던, 구릿빛 피부의 세이프가드들이다. 가끔 무료하다고 판단될 때 물로 뛰어들어 유감없이 수영 실력을 뽐내곤 하던 그들을 보며 '그래, 이곳에선 저들이 의사지'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난 초조함과 화를 삼키며 마음속으로 '당신이 무슨 의사야'를 반복하며 외쳤다.

응급상황에서는 구급차를 부르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냥 우리 차를 이용해서 병원에 갔다 오는 게 좋겠다고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모든 순간 그는 진지했고, 진실했으며, 우리를 배려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일 처리 방식이 불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나 스스로는 현의 상태에 대해 '성형외과에 가서 최소 5바늘은 꿰매야 하는 지경'으로 진단을 내렸다. 반면 그는 '정말 운 좋게도 간단히 스친 상처만 난 상태'로 진단했으니 그 간극이 매우 컸다. 나의 표정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스태프 한 사람이 따라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마지막 부탁이 거절되자 난 그와 눈빛도 마주치지 않았다. 모든 기대를 내려놓은 나는 병원 이름이라도 내비게이션에 찍어달라고 했다. 그는 10분 거리에 있는 병원을 찾아줬다.

"내가 따라가고 싶지만 자리를 비울 수 없다. 그곳에 가서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나에게 전화해라. 내가 설명하고 도와주겠다. 아이 엄마를 이해한다."

세이프가드는 남편에게 전화번호를 주고 돌아갔다.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늘 있던 그의 자리로 말이다.

다음 날 다시 개에게 다가가는 아이... 한숨만 나왔다

개에게 물린 날 피를 흘렸기에 단백질 보충을 위해 열심히 먹고 있는 현.
 개에게 물린 날 피를 흘렸기에 단백질 보충을 위해 열심히 먹고 있는 현.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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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인 나를 이해한다"는 말을 들은 그 다음 날, 상황이 진정된 뒤 생각을 해봤다. '어제 내가 어느 정도로 이성을 상실했기에 그가 그런 말을 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성을 잃지 않는 건 엄마라 하기 어렵지 않을까.

잘 모르면서 "구멍이 난 것 같다, 안쪽에서 피가 났다"고 떠드는 엄마 앞에서 포르투갈 의사는 침착했다. 그는 그리 심각하지 않은 상처라고 결론을 내렸다. 꿰매지 않아도 되는 건 물론이란다.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았냐는 말에 순간 몹시 후회됐다. 남들 다 하는 선택접종도 안하고 나름 소신을 가지고 필수접종만 해왔던 일련의 과정이 생각났다. "아니요, 안했어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 20년 후에 딱 이런 공간, 이런 눈높이에 있는 현과 나를 상상했다. 환자용 침대에 누웠고 나는 의자를 끌어다 가까이 앉은 상황 말이다. 그러나 그건 출산이라는 상황을 상정한 거였지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르다. 현은 겨우 7살이었다. 공포심이 컸다. 귀에 대고 늘 자장가로 들려 줬던 노래를 다시 불러 주었다.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현~ 엄마가 현 사랑해."

그리고 병원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의사 선생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을 하는지, 그를 얼마나 믿을 만한지 얘기를 해주자 현도 점차 진정했다. 그리고 상처부위를 소독하고 드레싱을 하는 전 과정에서 현은 울지 않았다. 크지는 않지만 체계 있고 안정감 있는 진료 및 치료의 절차 속에서 나도 안정감을 찾았다.

딱 상처부위 크기의 치료 흔적을 가지고 우린 숙소로 돌아왔다. 많은 이웃들이 걱정을 해줬다. 이미 소문은 캠핑장에 다 퍼졌으리라. 전해들은 그들은 얼마나 놀라고 끔찍했을까. '부모로서 안전교육을 소홀한 탓에 많은 사람에게 이토록 큰 고통을 주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덜란드 노부부는 일처리 내내 전혀 동요하지 않아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겉보기와 달리 네덜란드 노부부는 아이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도 "오늘 밤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좀 미안했다.

큰 개만 봐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겠다. 그런데 어느 집 개인지 떠나질 않는다. 현은 자꾸 쓰다듬어주려고 한다. 엄마는 점점 예민해진다. 화가 끓어오른다.
 큰 개만 봐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겠다. 그런데 어느 집 개인지 떠나질 않는다. 현은 자꾸 쓰다듬어주려고 한다. 엄마는 점점 예민해진다. 화가 끓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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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이 먹은 저녁을 다 토했을 때 나는 한 번 더 이성을 상실했다. 얼굴에 흠집을 가지고도 옆 집 개에게 다시 다가가는 현을 짜증 만발한 채 쳐다봤다. 딸아이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저것이 제 정신인가?"

그날 밤 우리는, 그리고 노부부는 좀 많이 우울한 밤을 맞이했다. 그때, 쇼가 없는 날로 알고 있었는데 레스토랑 쪽에서 어제보다 더 흥겨운 판이 벌어졌다. 신나는 올드팝이 흘러 나왔다. 분명 사람들은 춤을 추며 엉켜 돌아갈 것이다. 이번 일만 아니었다면 흥이 많은 나도, 할아버지도 가족과 함께 엉켜 돌아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터이지만 이날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현이 무사히 하룻밤을 견뎌내길 기도해야 한다.

그래도 다행이다. 저 흥겨움이 있어 우리도, 노부부도, 풀에서 끔찍함을 함께 봐야 했던 관광객들도, 소문으로 건네 들은 모든 여행자들의 마음이 다소 산뜻해질 수 있었겠지….

덧붙이는 글 | 2012년 맞벌이 엄마, 아빠, 5살, 7살 두 딸은 직장과 유치원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쉼(태국), 사랑(터키), 도전(유럽캠핑)을 주제로 5개월간 여행하였습니다. 본 여행 에세이는 그 중 도전을 주제로 한 유럽캠핑에 관한 글입니다.



태그:#리씨네 여행기, #유럽캠핑, #포르투갈, #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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