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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티 남쪽 구역에 있는 건물
 코티 남쪽 구역에 있는 건물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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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코트부써 토어(Kottbusser Tori) 역에 내려보지 않은 사람이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장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다. 하지만 지하철 U1과 U7이 교차하고 로터리를 중심으로 7개의 작은 도로들이 몰려들지만, 그렇다고 이 곳을 '교통의 중심지'라고 부르기는 애매하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움직이고 모이는 이곳. 하지만 유명세와 달리 이 장소의 외관은 무척 이상하다. 이 장소를 감싸고 있는 건물군은 지어질 당시 그리고 지어진 이후 꽤나 오랫동안 '베를린에서 가장 못 생기고 가장 실패한 계획'이라고 평가받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코트부써 토어는 '코티'(Das Kotti)라는 귀여운 애칭까지 붙여질 정도로 인기 있는 장소가 됐다.

코티는 모든 유행, 논란 그리고 베를린스러움이 쏟아져나오는 베를린 문화 중심지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베를린의 한 지역구)의 주요 장소 중 한 곳이다. 버려진 철도기지를 여전히 버려진 듯이 활용하고 있는 엘아베 템펠(관련기사 : 가난하지만 섹시한 베를린 이용법)도 그렇듯이 베를린에서 유명하다는 장소는 대개 왜 유명한지 단번에 이해하기 힘들다.

'유럽' 기대하고 갔다가 후회할 수도 있어요

두 구역은 도로와 철도로 나뉘어있다.
▲ 코티 북쪽 구역의 건물군의 모습과 남쪽 구역의 건물군 모습 두 구역은 도로와 철도로 나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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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티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우리가 흔히 좋고, 아름답고, 인기 있고 혹은 '유럽스럽다'라고 여겨지는 장소와 전혀 다르다. 단순히 유럽의 젊은이들과 관광객뿐만 아니라 부동산 투자가들까지 몰려드는 이곳을 소문만 듣고 찾아간다면 되레 실망할 가능성도 매우 크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그리고 무너진 이후로도 적지 않은 세월 동안 버림받았던 장소인 크로이츠베르크의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장소가 왜 사랑받는 장소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코티는 베를린의 중세 도시 성곽이자 세관의 역할을 했던 악치제 성곽(Akzisemauer)의 성문 중 코트부스(Cottbus, 베를린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도시)라는 도시를 향하는 성문의 이름으로부터 유래했다. 일반적으로 '토어(Tor, 문을 뜻함)'라는 이름이 붙은 지명 중 대다수는 악치제 성곽의 성문 이름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베를린이 겪은 험난한 역사로 인해 악치제 성곽 원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나, 몇몇 장소에는 새로 복원된 성곽이 남아있기도 하다.

빈집 점거하는 사람들

코티 북쪽 구역에 있는 다양한 터키 상점과 음식점 모습
 코티 북쪽 구역에 있는 다양한 터키 상점과 음식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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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은 오래 전부터 가난한 지역이었다. 19세기 무렵 진행된 산업화로 베를린으로 몰려든 외국인 노동자들과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막사형 임대 주택이 대량으로 건설된 곳 중 하나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임대주택군은 심하게 파괴됐다. 이후 1964년에는 이를 철거한 뒤 새로운 건물과 새로운 도로를 건설한다는 도심 재개발 사업(Flächensanierung)이 수립됐다. 물론 당시 세워진 임대주택이 수십 년이 지나 현재 가장 사랑받는 주택이 될 것임은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도심의 임대주택은 파괴됐고, 도시 외곽에는 당시 기준으로 모던한 디자인의 대단위 주거단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곽 주거단지 개발사업은 도심에 비해 속도가 더뎠다. 그로 인해 주택 수요가 급증했다. 개발이 느렸던 이유는, 공사 비용 절감을 위해서 한 구역를 동시에 철거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방식으로 인해 철거 계획이 지정된 구역에는 1년 이상 방치된 빈 건물들이 다수 발생했다.

이때 저렴한 집을 찾던 이들은 '스쾃'이라고 불리는 '건물점거운동(Hausbesetzung)'을 벌이면서 주인 없이 방치된 빈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이후 경찰들은 그들을 퇴거 시켰다. 점거와 퇴거가 지속적으로 반복됐다. 1981년에 들어서는 약 160개의 주택들이 점거되기도 했다.

저항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전개로 크로이츠베르크에서의 도심 재개발 사업은 전면 중단되기에 이른다. 쇠퇴하던 철거구역은 건물점거운동 등을 거치면서 가난한 예술가와 학생 등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도심 재개발 사업이 진행된 곳이 있었다. 전면적인 도시철거사업 계획 이전에 따로 계획을 수립해놨던 코티 일대의 개발과 코티로부터 지하철 U1로 두 정거장 떨어진 거리에 있는 메링 광장(Mehringplatz) 일대의 개발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이 지역의 잔혹한 개발을 목격했기에 이후 동일한 방식으로 이뤄질 도심재생사업에 반대하고 저항하면서 사업을 저지했다.

참고로 약 80채를 점거했던 주택점거자들은 시 당국과 임대인간 협상을 통해 정식계약을 맺고, 지금까지 지역 혹은 동네의 정치적 혹은 문화적 거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외의 점거자들은 차례로 퇴거했고, 그들 중 소수는 끝까지 법적 테두리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며 정식 계약 제안을 포기한 채 끝까지 저항하다 퇴거당하기도 했다. 코티는 당시 이런 건물 점거운동뿐만 아니라 전면 철거를 통한 도시 개발에 대한 저항 그리고 각종 사회·문화운동의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과거 마약 판매로 악명이 높았던 거리였다.
▲ 코티 건물 뒷편의 드레스데너 거리(Dresdener Str.) 과거 마약 판매로 악명이 높았던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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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코티 일대의 건물들이 모두 철거됐지만, 1964년이 돼서야 남쪽 구역의 건물이 완공됐다. 그리고 철거 후 19년이 지난 1974년, 북쪽 구역의 새로운 크로이츠베르크 센터(아래 NKZ, Neue Kreuzberger Zentrum)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이 완공되면서 현재 코티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건물은 완공됐지만, 주변 사무실과 상점은 텅텅 비어 있었다. 또한 범죄율은 날이 갈수록 치솟았다. 코티 건물 주변에서는 단순 범죄뿐만 아니라 이주민과 독일인과의 충돌 그리고 마약 판매 등 끊임없는 사회갈등이 생겨났다.

그로부터 20~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코티에는 여전히 마약 거래, 인종 갈등 등이 존재한다. 크고 작은 사건과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사회, 주민 그리고 지자체의 노력을 통해 그 갈등의 정도가 약해졌을 뿐이다. 덕분에 이제 이곳은 주민들, 힙스터, 여행객, 예술가, 학생, 이주민 등이 걱정 없이 사람을 만나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

저항하는 사람들이 '코티'를 만들었다

시위를 떠나서 이 곳은 지역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모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이기도 하다.
▲ 코티 남쪽 구역의 게체콘두(Gecekondu)의 모습 시위를 떠나서 이 곳은 지역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모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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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곳은 다시금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베를린의 임대료 상승에 저항하는 이들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부터다. 코티 상회(Kotti & Co.)라는 이름의 단체는 정부 소유의 사회주택이었던 코티가 부동산 관리 회사에게 매각된 이후 대책없이 상승하던 월세를 반대하고, 대안을 강구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치적인 뒷배경도 없고 학벌에 얽메이지 않는 평범한 동네 아주머니들이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단체를 만든 것이다. 이들은 월세 상승에 저항하는 운동뿐만 아니라 그 범위를 넓혀 지역내 인종차별 문제 그리고 베를린시의 주택 정책 문제까지 다양한 사안에 관심을 두고 여러 행사들을 주최하며 노력하고 있다.

2013년 중순, 이 단체는 코티 남쪽 구역에 게체콘두(Gecekondu, 터키어로 '밤 사이에 지어진'이라는 의미, 일반적으로 빈민가의 주택을 지칭)라는 이름의 나무집을 세우면서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다.

코티에서 MYFEST 길거리 축제를 향해 몰려가는 사람들
 코티에서 MYFEST 길거리 축제를 향해 몰려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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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코티는 다양한 축제가 열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축제는 2003년부터 시작된 마이페스트(MYFEST) 길거리 축제다. 이 축제는 매년 5월 1일(노동절) 코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라니엔 거리(Oranien Str.) 일대서 열린다.

또한 이 축제가 있는 밤에는 베를린의 전통이자 전세계 노동자들의 전통과도 같은 대규모 노동절 집회가 열리기도 한다. 이는 코티와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이 저항의 역사가 깊이 남아있는 장소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코티를 설명함에 있어서 이 건물이 못 생겼느냐, 예쁘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이 장소의 역사와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사건 그리고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곳을 매력 넘치는 곳으로 만들었는지를 소개했다. 단지 못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장소가 외면받는다면, 그것은 비상식적인 일임이 자명하다.

도시는 건축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거리 뒷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코티
▲ MYFEST 길거리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 거리 뒷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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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티 일대에 있는 건축물은 훌륭한 건축물이 아니다. 하지만 도시를 만드는 것은 훌륭한 건축물의 존재 유무가 아니다. 코티가 이 명제를 스스로 증명해내고 있다.

최근 영국의 유명한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가 베를린 신 국립미술관(Neue Nationalgalerie) 보수공사 건축가로 선정됐다. 그는 내년 초부터 시작되는 보수공사를 앞두고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세상에 둘도 없는 위대한 도시가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짧은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은 베를린에 대한 예리한 평가와 해석이 담겨 있었다. 그가 말한 '베를린이 위대해질 수 있었던 이유'에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는 포함되지 않았다(심지어 그가 보수할 국립미술관 건축물 자체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는 '베를린이 아름답지 않음을 인정할 줄 아는 자세'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시민들의 주인의식' '사회 문제에 대한 시민 참여와 저항' '분단과 통일이라는 역사와 그로 인한 사회적 다양성' '도시의 활력' 등을 이유로 꼽았다.

밤에 본 코티의 모습
 밤에 본 코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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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도시를 만든다. 하지만 도시를 건축물만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 안에 사람들의 일상 그리고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이 글을 읽고 코티를 방문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왜 이 장소가 인기가 있을까'라는 의심이 생길 것이다. 코티의 외형은 건축적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외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품을 수 있는 의심 덕분에 도시라는 것은 하나의 화려한 건축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한강만 봐도 그렇다. 강 위에 둥둥 띄워놓은 인공 건축물 하나만으로 한강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한강 둔치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리 밑에서 버스킹을 감상하고, 가족들이 함께 싸온 도시락을 먹고, 설레는 마음으로 연인을 기다리고, 둥둥 떠있는 건축물을 비판하고, 친구들끼리 작은 축제를 만드는 등 너무나 평범하지만 우리가 조금씩 잊고 있는 우리의 일상 문화와 그 속에 있는 사람이 도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태그:#독일, #베를린, #코티, #건축,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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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과 도시를 이야기합니다. 1. 유튜브: https://bit.ly/2Qbc3vT 2. 아카이빙 블로그: https://intro2berlin.tistory.com 3. 문의: intro2berlin@gmx.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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