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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공원을 찾은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위원회 일행들이 참배를 마치고 기념촬영했다
 제주4.3평화공원을 찾은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위원회 일행들이 참배를 마치고 기념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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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이랬으면 좋았는데 저렇게 해서 국가가 불행해졌다"는 얘기는 종종 듣는 소리다. 하지만 제주 4·3사건이 발발하기까지 불행한 사건을 막을 몇 번의 변곡점이 있었다.

"만약에…했었더라면!"이라는 아쉬웠던 상황을 되돌아보는 건 다음에 또 다시 그런 상황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판단할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제주가 겪었던 몇 가지 상황을 되돌아본다. 제주 4·3위원회가 제공한 자료에 근거해 몇 가지 변곡점을 재구성해 보았다.

흉흉해진 민심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들어와 군정을 실시했다. 광복직후 자주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해 건국준비위원회(아래 건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제주도에서도 대정면 건준이 결성되었다.

여수에도 제주와 같은 평화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제주4.3평화공원을 찾은 일행들. 왼쪽부터 국회의원 김성곤, 여수유족회장 황태홍,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이사장 김병호. 뒤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위원회 일행 기념관에 참배하고 있다.
 여수에도 제주와 같은 평화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제주4.3평화공원을 찾은 일행들. 왼쪽부터 국회의원 김성곤, 여수유족회장 황태홍,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이사장 김병호. 뒤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위원회 일행 기념관에 참배하고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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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준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고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치안활동에 주력했다. 1945년 군정 업무를 담당할 제59군정중대가 제주에 도착한 것은 11월 9일이었다. 미군은 도청과 경찰 요직에 일제 때의 관리나 우익인사를 앉혔다. 미군의 경제정책은 생필품 수급과 물가 안정에 역점을 두었으나 가격이 폭등하고 광복 후에 귀환한 6만 명의 귀환인구는 식량난을 가중시켰다.

1946년 6만 명이 귀환한 가운데 보리농사는 대흉작을 기록하고 도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칡뿌리와 바다 것들, 톳과 보릿겨 등을 섞어서 만든 톳밥, 밀범벅 심지어 돼지 사료로 활용되던 전분박까지 먹을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지긋지긋했던 일제의 공출이 끝났는데도 또다시 공출이 일어났다.

첫 번째 변곡점, 3·1사건과 총파업 제대로 된 진상조사 이뤄졌더라면...

1947년 3월 1일. 미곡수집 정책의 실패와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져가고 있는데 제주도 좌익진영은 두 번째 3·1절 기념행사를 전도민적으로 열었다. 미군정은 3·1절 행사 때 시위는 절대 불허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몇 차례를 협의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3·1절 행사가 강행됐다.

3·1절 기념대회는 각 읍면별로 치러졌고 제주북초등학교에는 제주읍, 애월면, 조천면, 주민 3만명이 모여 기념식을 마쳤다. 오후 2시에 행사를 마친 군중들은 곧바로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다치는 사고가 났다.

이때 다친 어린아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했던 무장경찰들이 발포해 6명의 사상자가 났다. 이 발포사건으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됐고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발로 156개 기관 단체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에는 심지어 현직 경촬관까지 동참했다.

기념관 내에 기록된 희생자들의 이름으로 김아무개씨의 처와 아들 등 일가족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름이 없는 걸 보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묘역 담당자의 양해를 얻어 사진을 게재한다.
 기념관 내에 기록된 희생자들의 이름으로 김아무개씨의 처와 아들 등 일가족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름이 없는 걸 보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묘역 담당자의 양해를 얻어 사진을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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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합동조사반을 파견했으나 공식적인 진상 발표를 하지 않았고, 현장에 온 조병옥 경무부장은 담화문을 발표해(3월 19일)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조작발표하고 주동자와 참가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3·1사건이후 다음해  4·3사건이 터지기 직전까지의 1년 동안 2천 5백명이 검속돼 제주도민의 가슴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두 번째 변곡점,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의 평화협상됐더라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고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공격했다. 동시에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했다.

희생자들의 묘역에 놓인 꽃. 하얀 눈과 묘비들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희생자들의 묘역에 놓인 꽃. 하얀 눈과 묘비들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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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경찰 4명 사망, 부상 6명, 행발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 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피해가 났다. 미군정청은 무장봉기가 발생하자 4월 5일 전라남도 경찰 100명을 응원대로 제주에 급파하며 서북청년단원들을 증원했다.

일행을 안내하던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전 소장이었던 김창후씨가 최근에 있었던 서북청년단의 활동에 대해 한 마디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서북청년단이 다시 활동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제주도민들은 경악했습니다. 가장 악랄하게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던 장본인들이 아닙니까?"

미군청은 4월 17일, 모슬포에 주둔 중인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그러나 경찰에 비해 민족적 성향이 강했던 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과 같은 극우세력의 횡포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간주해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1948년 4월말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 측 군사총책 김달삼 등이 만나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등의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돌아가신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조각상과 비석 뒤로 눈덮인 한라산이 보인다. 말없는 한라산은 진실을 알고 있을까?
 돌아가신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조각상과 비석 뒤로 눈덮인 한라산이 보인다. 말없는 한라산은 진실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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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4월말 평화협상은 미군정 하지사령관의 무력진압 방침 결정으로 깨졌다. 5월 5일 제주에서 미군정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긴급대책회의가 열렸고 선무귀순공작의 필요성을 역설한 김익렬 연대장은 문책을 받아 해임되고 강경진압이 채택됐다. 당시 평화협상이 성사됐더라면 어찌됐을까?

세 번째 변곡점, 5·10선거 거부 현명하게 행동했더라면...

통일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여러 정치세력들의 반대 속에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총선거에는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 참가 세력과 중도계 인사들이 참가를 거부하고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일부 중도세력만 출마했다.

무장대는  5·10단선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투쟁을 전개했다. 선거사무소를 집중 공격하고 선거관계 공무원을 납치 살해하는 한편 선거인명부를 탈취했다. 결국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는 투료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5·10선거의 거부를 미군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미군은 강경진압을 명령했다. 기존의 9연대 1개 대대 외에도 2개대대가 추가로 파견돼 3개대대로 강화됐고 박진경 연대장이 새로 부임했다.

이승만 정부는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른바 '초토화작전'이다.  

자료에 의하면 초토화작전이 시작되기 전 1948년 9월 말까지 사망자 수는 대략 1000명 미만으로 알려져 있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약칭: 4·3위원회)는 2002년 처음으로 희생자 심사를 실시하여 2014년 5월 23일까지 희생자 14231명과 유족 5만9225명을 결정했다.

4.3진상규명위원회가 발굴한 집단매장지 모습. 유골이 너무 많아 유골마다 하얀 종이로 번호를 매겼다고 한다
 4.3진상규명위원회가 발굴한 집단매장지 모습. 유골이 너무 많아 유골마다 하얀 종이로 번호를 매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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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위원회에서 심사하여 확정된 가해자별 통계는 토벌대 84.3%(1만2000명) 무장대 12.3%(901명)이다. 특히 10대 이하 어린이 5.4%(770명)와 61세 이상 노인 6.3%(901명)이 전체 희생자의 11.7%를 차지하고, 여성의 희생(21.1% 2,990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장인은 94세를 마지막으로 3년 전 돌아가셨다. 제주 4·3사건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 미군통역을 했던 장인이 돌아가시기 전 내게 해주신 말이다.

"4·3당시 제주도에서는 애먼 사람들이 많이 죽었네. 학교문턱에도 안 가본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무엇이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어찌 알겠는가?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이 시대를 잘못만났던게지"

부질없는 짓이지만 나도 장인이 살아계셨더라면 미군의 역할과 4·3진상규명에도 도움 될 말씀을 많이 해주셨을텐데라는 가정을 해본다.

덧붙이는 글 |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위원회 일행으로 12월 5일부터 7일까지 답사한 후 연재하고 있습니다.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제주4.3평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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