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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점퍼 소재에 대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오리나 거위의 깃털을 가장 많이 떠올리지 않을까? 오리털 점퍼는 오늘날 겨울철 필수품으로 간주되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까지만 해도 겨울 점퍼는 대부분 솜으로 만들었다. 국내에 오리털 점퍼가 처음으로 소개된 때는 1980년대 중반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낡아서 구멍이 생긴 내복도 버리지 않고 기워 입었던 그 시절, 오리털 점퍼는 대중적인 소비재가 아니었다.

나는 쇼핑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사람들로 붐비는 장소를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혼잡한 쇼핑몰을 돌아다니다 보면 온몸에 기가 빠져 버린 듯 몹시 피로를 느낀다. 그래서 쇼핑은 필요한 물건만 빨리 구입하는 방식으로 해치운다. 이런 내게 겨울 점퍼 구입은 달갑지 않은 일이다. 동물의 털을 소재로 하지 않은 점퍼를 찾기가 쉽지 않아서 자연히 쇼핑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산 채로 털이 뽑히는 고통

의류의 모피 장식
 의류의 모피 장식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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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을 결심한 후, 나는 동물의 털과 가죽으로 만든 제품도 구입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대다수의 채식주의자들에게 공통적인 원칙인데, 그 이유는 그런 제품이 동물의 고통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국제동물보호단체 페타(PETA·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는 세계 최대 앙고라 생산지인 중국의 농장에서 비밀리에 촬영한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는 농장 인부들이 앙고라 토끼의 털을 무자비하게 뜯어내는 광경이 담겨 있었다.

토끼는 좀처럼 울음 소리를 내지 않는 동물이지만, 영상 속의 토끼는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중국의 앙고라 농장에서 토끼들은 3개월에 한 번씩 이런 방식으로 털이 뽑힌다고 한다. 영상에는 털이 뜯긴 피부가 벌게진 토끼들이 극심한 고통으로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모습도 담겨 있었다(해당 영상 보러가기). 이 영상이 공개된 후 스웨덴 의류 브랜드 H&M은 앙고라 털을 소재로 한 제품을 생산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깃털로 속을 채운 의류, 침구 역시 오리·거위의 고통으로 생산된다. 페타가 촬영한 영상에 따르면, 수백만 마리의 오리·거위들이 1년에 수차례씩 산 채로 깃털을 뽑히는 수난을 당한다. 농장 인부들은 새들을 강제로 제압한 다음 마구 깃털을 뽑아내는데, 이런 과정에서 피부가 찢어지면 실과 바늘로 상처를 꿰매어 수습한다. 물론 마취제나 진통제는 사용되지 않는다(해당 영상 보러가기).

밍크·여우·라쿤(아메리카 너구리) 등의 털가죽으로 만든 제품의 잔혹한 진실은 유명하다. 한때 모피코트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동물의 고통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모피코트는 '혐오의 상징'이 되었다. 세계 최대 모피 생산지인 중국에서는 동물들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가죽이 벗겨져 죽임을 당한다. 이런 학대의 산물이 과시를 위한 사치품이라는 사실은 더욱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해당 영상 보러가기).

모피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업계는 핀란드·노르웨이·폴란드·스웨덴·프랑스·이탈리아 등지에서 생산된 모피에 '오리진 어슈어드(Origin Assured; OA)' 라벨을 붙여 차별화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OA라벨은 모피 생산 과정에서 동물들이 인도적인 대우를 받았음을 보증한다고 하지만, 이 라벨을 붙인 모피 역시 인도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페타에 따르면, 인도적인 모피를 생산하는 농장의 동물들은 더럽고 비좁은 케이지(우리)에서 굶주림, 목마름, 질병에 방치되어 있었다.

감금 스트레스로 자해를 하거나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동물들이 많았으며, 극도의 스트레스로 동족을 잡아먹는 정신질환인 카니발리즘도 목격되었다. 죽은 동물의 사체가 살아있는 동물들 곁에 그대로 방치되었고, 이런 환경에서 용케 살아남아 털가죽이 벗겨진 동물들은 전기 감전을 비롯한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도살되었다(해당 영상 보러가기).

이렇게 비상식적인 현실에 충격을 받고 모피 생산자를 동물학대범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동물을 그토록 가혹하게 대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그러나 동물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 과연 생산자에게만 있을까? 모피업계의 관심사는 최대한 많은 이윤을 거두는 것이다. 게다가 소비자는 제품 가격이 높아지는 걸 원치 않는다. 그 결과 생산비용을 최대한 낮출 수밖에 없다. 자연히 동물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사육될 수밖에 없고, 죽는 순간까지 배려 받지 못한다. 결국 모피를 위한 가장 비싼 대가는 소비자가 아니라 동물들이 치르고 있다. 

각종 매체를 통해 불편한 진실이 알려지면서, 고기는 못 끊어도 털이나 가죽은 소비하지 말아야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모피코트를 구입하지 않는 것은 보통의 사람들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점퍼의 오리털 충전재, 옷깃의 털 장식까지 구매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나면 선택의 폭이 상당히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오리털 소재 아닌 점퍼 있나요?"

동물의 고통 없는 폴리에스테르 100% 겨울 패딩을 두 벌이나 구입했다.
▲ 며칠 전 구입한 점퍼 동물의 고통 없는 폴리에스테르 100% 겨울 패딩을 두 벌이나 구입했다.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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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 매장에 가서 오리털로 만들지 않은 점퍼가 있는지 물으면, 그런 건 없다는 대답을 듣기 일쑤다. 게다가 요즘 유행하는 점퍼는 대부분 모자에 모피 장식이 부착되어 있다. 다리가 아프게 매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아무리 유행이라지만 왜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옷을 만드는 건지 화가 난다. 고생 끝에 한 벌이라도 건지면 해당 업체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너 하나 안 입는다고 뭐가 달라져?" 

가족들은 종종 이런 핀잔을 준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 하나의 실천으로 당장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변화를 위한 모든 실천이 무의미하다. 나라도 수요를 늘리지 않으면 적어도 나로 인한 동물의 고통은 줄일 수 있다. 내게는 '선택'의 문제이지만, 동물에게는 '고통'의 문제가 아닌가.   

올해도 발품을 팔 각오를 하고 쇼핑몰에 들어섰다. 여성 의류 매장이 밀집해 있는 층으로 가서 판매원에게 별 기대 없이 물었다.

"오리털을 넣지 않은 점퍼도 있나요?"

어라? 내 말을 듣자마자 판매원이 전시된 점퍼들 사이에서 몇 벌을 가져온다. 디자인이 썩 마음에 든다. 점퍼 안쪽에 달린 태그를 확인하니 겉감·안감·충전재가 모두 '폴리에스테르 100%'라고 적혀 있다. 입어보니 마음에 쏙 들고 가격도 적당하다.

기분 좋게 계산을 마치고 다른 브랜드 매장으로 간다. 이게 웬일인가? 여기도 폴리에스테르 100% 점퍼가 있다. 결국 쇼핑몰에 들어선 지 30분도 안 되어 소재는 물론 디자인, 가격 모두 만족스러운 한겨울용 겨울 패딩 점퍼를 두 벌이나 구입했다. 쇼핑이 이리도 쉽다니! 기분이 조금 얼떨떨했다. 

'고통 없는' 제품의 확대·재생산은 소비자의 몫

베이직 하우스와 동물자유연대의 '퍼 프리' 캠페인
 베이직 하우스와 동물자유연대의 '퍼 프리' 캠페인
ⓒ 베이직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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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국내 의류업체 베이직 하우스는 자사 제품에 리얼 퍼(진짜 모피)를 사용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동물이 받는 고통을 최소화할 것을 약속하는 '퍼 프리(Fur Free)' 캠페인을 위해 동물자유연대와 공식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동물의 희생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희망하는 사람으로서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기업이 오리털 의류는 여전히 판매하고 있어서 실망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불만은 한국에서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동물의 고통 없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틀린 건 아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현실을 생각하면 그런 불만은 다소 과하게 들린다. 

기업은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다. 세계적인 모피 소비국인 우리나라에서 기업이 모피반대 캠페인에 참여하기로 한 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다. 이것만이라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 아닐까? 그런 기업을 부족하다고 비판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고통 없는 의류에 대한 수요를 창출시켜 그런 제품도 시장성이 있다는 걸 업계에 인식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면 고통 없는 제품 생산에 참여하는 기업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고통 없는 제품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기업의 책임만이 아니다. 그런 제품을 지지하는 소비자의 몫이기도 하다.

모피반대 캠페인은 "채식주의자가 아닐 바에야 모피에 반대할 자격이 없다"는 반박에 부딪히곤 한다. 인간의 소비 때문에 야기되는 동물의 고통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모피반대를 '위선'으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모피반대 캠페인은 오로지 모피에만 반대하고 다른 동물의 희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동물이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고통을 느끼는 생명임을 인식하고, 가장 불필요하고 잔인한 제품부터 줄여나가는 운동이다.

동물의 털가죽은 현대에 더 이상 필수가 아니며 얼마든지 다른 소재로 대체될 수 있다. 고통을 입지 않겠다는 의지로 잔인한 제품을 시장에서 도태시키고 대안을 요구하는 소비자의 실천. 그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패션이 아닐까?


태그:#모피반대, #오리털, #고통, #패딩, #점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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