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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선언기념일인 10일, '서울시민인권헌장(아래 인권헌장)'은 끝내 선포되지 못했습니다. 서울시가 빠진 가운데, 시민인권헌장 제정 과정에 참여했던 시민위원 48명과 전문위원 29명은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헌장의 제정을 축하하며 서울시에 인권헌장의 선포를 촉구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시민위 전문위원인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시민인권헌장은 시민들이 헌신적으로 참여해 이룬 성과"라며 "시가 마지막 순간에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이유로 선포할 수 없다는 황당한 입장을 밝혀와 시민들이 직접 선포하기로 했다"고 발언했습니다.

박원순 시장님, 첫 번째 편지를 쓴 지 채 일 주일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편지를 올립니다(관련 기사 : 보수기독교에 무릎꿇은 박원순... 정말 실망입니다). 그 전에도 몇 번이나, 침묵을 고집하는 시장님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지만 '시민과 대화할 것'이라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0일, 시장님은 성소수자 농성단과 대화를 했지요. 이후 페이스북에 사과의 글도 올렸습니다.

시장님의 사과문... 또다시 실망했습니다

 박원순 시장의 페이스북. 10일 인권헌장 폐기 논란과 관련하여 사과의 글을 올렸다.
 박원순 시장의 페이스북. 10일 인권헌장 폐기 논란과 관련하여 사과의 글을 올렸다.
ⓒ 박원순 시장 페이스북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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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님은 페이스북 글을 통해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과정에서 벌어진 일들로 심려를 끼쳐드린 점,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현존하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 가겠다"며 "모든 차별행위에 맞서 '차별 없는 서울'을 만들겠다는 '처음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과에서 '뒤늦은 감'이 느껴진다는 생각과 더불어 아쉽기도 합니다. 서울시가 사실상 인권헌장을 '폐기'한 이후, 서울시 인권위원회가 '인권헌장 의결과 확정을 인정하고 선포할 것'을 권고했지만 서울시 측은 이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소통을 자랑으로 삼던 시장님의 모습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즐겨하시던 트위터에서도 '동파 우려' 소식만 가끔 전하는 등 소극적인 자세였습니다. 인권헌장을 선포하는 자리에 서울시는 결국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페이스북 사과문에서 시장님은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시민위원님들이 보여주신 헌신적인 과정을 잘 알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엄혹하게 존재하는 현실의 갈등 앞에서 더 많은 시간과 더 깊은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인권헌장을 선포할 수 없다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선택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묵묵히 지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지난 2일 <기독신문>에 보도된,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들과의 비공개 면담에서 했던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해명이 없었습니다. 동성애는 개인의 성향인 만큼, 혐오로부터 보호 받아야 할 사항입니다. '성적 지향'을 비롯한 인권은 누군가가 지지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 인권을 변호하는 인권 변호사 출신이기에 누구보다도 잘 아실 텐데 말이에요.

'말'만 있고 '행동'은 없는 사과문

박원순 시장 출근 기다리는 성소수자 단체 회원들 성소수자와 인권활동가들로 꾸려진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회원들이 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출근을 기다리며 면담을 요구하는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 박원순 시장 출근 기다리는 성소수자 단체 회원들 성소수자와 인권활동가들로 꾸려진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회원들이 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출근을 기다리며 면담을 요구하는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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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정치인의 태도라기엔, 해석의 여지가 많은 '말' 이외의 '행동'이 보이질 않습니다. 기독교 단체의 지도자는 논란이 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직접 만난 반면, 성소수자 단체는 시청에서 농성을 한 지 5일째가 되어서야 겨우 1시간 가량 면담할 수 있었죠.

게다가 '차별 없는 서울'을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도 마땅히 없었습니다. 시민위원회와 성소수자 단체에 쏟아지는 보수·기독교 단체의 비난을 제지하려는 서울시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지금도 시청의 무지개(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농성단을 향한 혐오 발언은 당사자들이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이번 일로 인해 제가 살아 온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상황은 힘들고 모진 시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라는 시장님의 글도, 삶과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며 평생을 살아온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과라기에는 민망하다 싶습니다.

시장님의 입장에서는, 이번 사과글로 종교 단체도 달래주었고 성소수자도 어느 정도 진정시켰다고 생각하시려나요? 하지만 여전히 비판의 목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번 인권헌장 제정이 국내에 만연한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바꿀 기회였음에도, 시장님이 이를 놓쳐 버린 셈이기 때문이지요.

시민위원회의 회의에 난입하여 고함과 욕설을 외친 혐오 세력을 서울시가 방관했기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덕분에 보수 기독교 단체는 기세등등해졌고, 차별과 혐오의 논리가 하나의 주장처럼 왜곡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봅니다.

지난 선거에서 시장님에게 투표한 저는, 사과문을 접한 뒤에도 또다시 실망했습니다. '서울시민인권헌장'은 사회가 어떤 곳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삶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을지라도, 제가 살아가는 서울시가 진보하고 있음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기대는 시장님이 '엄혹하게 존재하는 현실의 갈등'이라 언급한, 혐오라는 감정의 파도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시장님의 사과가 진심이라면, 애매한 표현의 사과문보다 정치인으로서 할 수 있는 뚜렷한 행동을 직접 보여주시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높은 공약 이행률로 유명한 시장님이, 공약 중 하나를 혐오세력의 반대로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것을 만회하려면 더욱 그렇습니다. 시장님이 사과를 했음에도 무지개농성단이 시청 로비에서 농성을 계속하기로 한 것도, 저는 이런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년 퀴어 퍼레이드, 시청광장을 허락한다면?

승강기에서 항의 받는 박원순 '독서모임 서로함께'의 진행을 위해 박원순 서울시장이 9일 오후 서울 성동구청에 들어서자 성소수자 지지 단체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박 시장에게 사과와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박 시장이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성소수자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 승강기에서 항의 받는 박원순 '독서모임 서로함께'의 진행을 위해 박원순 서울시장이 9일 오후 서울 성동구청에 들어서자 성소수자 지지 단체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박 시장에게 사과와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박 시장이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성소수자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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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사람들의 완벽한 몰이해가 아니라, 선량한 사람들의 천박한 인식이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알려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발언입니다. 이번 논란에서 성소수자 단체뿐만 아니라 다른 시민단체, 심지어 저와 같은 시장님의 지지자들마저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권의 가치'를 '사회적 갈등'을 이유로 보류한 시장님의 행보에 정말 안타까워 했지요. 큰 목소리로 "동성애 지옥"을 외치던, "에이즈는 동성애 때문"이라며 과학적 오류마저 주장의 근거로 쓰던 혐오세력보다도 더욱 크게 말입니다.

"인권운동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주어야 하는 것을 보류하고 있기에 하는 것"이라던 마틴 루터 킹의 말을 떠올려 봅니다. '성적 지향'은 피부색이나 출신 지역, 성별과 마찬가지로 정체성으로 인정되어 미국과 유럽에서 차별 금지의 대상이 되어가는 추세이지요. 한국에서도, 혐오를 권리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기 정당화를 위해 타인을 차별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봅니다. 시장님, 민주적인 사회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장님의 사과가 진심이라고 더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내년 퀴어퍼레이드(성소수자 축제)를 시청광장에서 하도록 허용한다면 어떨까요? 올해 6월 서울 신촌과 대구에서 열렸으나 혐오의 저주성 발언을 들으며 방해를 받아야 했던 것을, 내년에는 좀 더 열린 공간에서 차분히 진행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논란이 있었지만 세계인권선언일인 10일에 서울시민인권헌장이 발표된 것, 그 바탕이 된 시민위원회를 공약으로 도와준 것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시장님, 다가오는 겨울에는 시장님의 따스한 소식을 다시 트위터에서 반갑게 맞이하고 싶습니다. 그럼 감기 조심하시고, 다시 웃는 얼굴로 시정에 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지자의 부족한 편지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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