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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에 취업한 회사의 워크샾. 설악산에서
 20대 중반에 취업한 회사의 워크샾. 설악산에서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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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서 2년 과정의 전산학을 전공하고 졸업하자마자 취직이 됐다. 그 당시는 인터넷이 보급되는 시기라서 전산분야의 일자리는 부족하지 않았다. 컴퓨터 전산망을 관리하는 회사에 취직한 때가 1996년,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1년 전이었다.

애니메이션 만화영화로 유명한 외국영화사에 파견돼 전산망 서버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한 주5일 근무에 6시 칼퇴근이었고, 행여라도 야간 잔업을 하게 되면 야근수당을 지급했다. 특이한 것은 계약직(템퍼러리 temporary라고 불렀다)의 비정규직원들이 몇 명 있었다는 점이었다.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업무평가를 통해서 재계약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퇴사를 했다. 무척 낯선 일이었지만 외국회사에서는 자연스러운 고용구조였다.

외국회사의 자유스러운 근무환경과 수평 구조의 조직 시스템에 차츰 익숙해져 갔다. 가끔, 본사에 들어가면 수직구조의 회사문화가 답답했다.

IMF외환위기 1년전인 1996년 외국영화사에 파견근무하던 시절.
 IMF외환위기 1년전인 1996년 외국영화사에 파견근무하던 시절.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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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IMF 외환위기의 핵폭탄이 터졌다. 많은 봉급생활자는 회사에 남는 자와 떠나는 자로 나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협력을 맺고 있던 원청 기업들이 연쇄부도로 쓰러져갔다. 월급을 자진 삭감하면서 '함께 살자'고 버텼지만 결국 50% 인원을 감원해야 회사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장의 호소에, 나는 스스로 떠나는 자의 대열에 줄을 섰다.

퇴사 후에 여러 곳에 이력서를 보냈고, 같은 업종의 중견회사에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동기들의 경력에 비하면 내가 운좋게 채용됐구나 생각할 만큼 IMF의 후폭풍이 컸음을 알 수 있었다. 이 회사에서도 근무지는 본사가 아닌 재벌그룹의 계열사 전산실이었다.

24시간 운용되는 전산실에는 여러 곳의 협력회사에서 파견나온 직원들이 있었다. 내게 맡겨진 업무는 회사 전체의 업무용 컴퓨터를 관리하고 유지·보수하는 일이었다. 전산서버를 관리하는 업무보다는 하드웨어를 다루는 일에 관심이 있던 때라서 일은 재미있었다. 후배직원 두 명과 파견근무를 했고, 나의 직급은 대리였다.

옷 색깔로 사람을 구분하다

"오 대리님, 근무복 이것으로 갈아 입으라고 하는데요."

후배직원이 옅은 청색의 점퍼를 가져왔다. 이 회사의 직원들 근무복은 여러 가지 색상이었다. 근무복 색깔로 그 사람의 학력과 하는 일을 알 수가 있었다. 생산공장의 노동자는 짙은 청색이나 흰색, 기술직은 옅은 청색, 사무직 여직원도 대졸사원은 베이지색 점퍼, 고졸은 남색이 들어간 점퍼였다. 보수적인 기업이라고 들었지만, 근무복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어이없었다.

그 기업의 로고와 회사명이 새겨진 근무복을 입지 않고 회사에서 받은 점퍼를 입고 다니자, 어느날 전산실의 계장이 불렀다.

"오 대리, 우리 회사의 근무복 왜 안 입으세요?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전산실 퇴근시간에 맞춰주세요. 급한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우리 직원들 보기에도 안 좋고..."
"일이 있으면 당연히 야근을 합니다. 할 일도 없는데 전산실 직원들 퇴근시간(8~9시)에 맞추라는 것은 말이 안 되죠. 협약서에도 6시 퇴근으로 되어 있습니다."

갑과 을의 원청과 하청의 관계는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있었다. 원청회사 직원들의 퇴근시간에 맞추라는 지시에 따르지 않자, 사소한 꼬투리로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퇴근시간에 맞춰서 고장난 컴퓨터를 가져오는 일도 있었다.

어느날, 본사의 부장이 전산실에 나타났다.

"사회생활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이런 일로 내가 불려다녀야겠냐. 비위 맞춰가면서 일 좀 하자."

서른 살에 탈 직장 선언을 하다

그래도, 할 일이 없으면 칼퇴근을 계속했고, 결국에는 본사에서 나를 불러들였다. 주로 원청업체의 영업지점을 방문하여 컴퓨터 시스템을 유지보수 하는 일을 했다. 직원들이 상사의 퇴근을 기다리는 분위기에도 별로 개의치 않고, 정시에 퇴근을 했다.

회사의 매출실적이 떨어져서 연말 보너스가 안 나온다는 말이 들렸다. 사장은 자가용을 신형 모델의 고급차로 바꾸었는데, 직원들 보너스를 안 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직원들의 술자리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다.

"사장이 빌딩을 구입했는데,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아야 한다고 보너스 안 준다고 하던데."
"빌딩은 개인 재산 아닌가? 회삿돈을 그렇게 써도 되나."

회사에서는 자금사정이 좋지 않다며 연말 보너스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인력을 줄이는 구조조정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어느날 부장이 호출을 했다.

"컴퓨터프로그램 전공했지. 회사 홈페이지 만들어봐."
"제가 배운 것으로는 홈페이지를 만들지 못합니다. 업체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못한다고? 당신 그거 하라고 뽑은 거야. 언제까지 만들 거야?"

치사한 방법으로 구조조정이 시작되었고, 나도 퇴출 리스트에 올라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새해에는 임금이 동결되고, 업무의 강도가 더 높아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IMF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에 태어난 아들과 관악산 계곡에서
 IMF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에 태어난 아들과 관악산 계곡에서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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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밀레니엄 새해를 며칠 앞두고 세 살배기 아들을 보고 있는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갈수록 일이 힘들어지고, 내 삶에서 월급쟁이로 계속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아. 직장생활은 이제 그만 하고,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해.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마."
"당신은 회사같은 조직에 안 맞는 사람이야. 믿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준비하는 일 잘 해봐. 난 정말 괜찮아."

사표를 쓰고, 영원히 탈(脫)직장을 선언했다. 나중에 아내는, 결심이 확고하고 말릴 수가 없는 사람인 것을 알기에 격려는 해줬지만 많이 걱정했다고 한다.  집의 방 한 칸을 소호(SOHO, Small Office Home Office, 소규모 사무실이나 집에 사무실을 둔 자영업) 사무실로 쓰면서 컴퓨터 조립판매와 A/S를 시작했다. 2년 뒤에는 국내에는 생소한 컴퓨터튜닝 상품을 만들고, 인터넷 쇼핑몰을 10년간 운영했다.

덧붙이는 글 | 기사공모 '그래, 나도 장그래였다' 응모글입니다.



태그:#IMF, #전자계산원, #비정규직, #하청,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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