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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동아시아 정복에 광분하던 1939년 10월, 일본은 한국인들의 정신력까지 동원해 전쟁 분위기를 고조 시키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일본은 전년도인 1938년 7월부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가동했다.

동시에 한국 독립운동세력과 중국 공산당·국민당의 항일 투쟁도 절정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친일'과 '반일'이라는 두 개의 기운이 동아시아 상공에서 대립·충돌하던 때였다.

이토 히로부미 참배한 안중근의 아들... 대체 왜?

 연극 <나는 너다> 포스터.
 연극 <나는 너다> 포스터.
ⓒ 돌꽃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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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위기의 순간에 엉뚱한 사건 하나가 일어나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동아시아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아들이 일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한 것이다.

문제의 인물은, 지난 11월 27일부터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상연되는 연극 <나는 너다>의 주인공인 안준생(송일국 분)이다. 이 연극은 안준생이 아버지 안중근을 원망하고 자신을 한탄하다가 가상의 세계에서 아버지와의 정신적 화해를 이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버지 안중근이 아들 안준생을 향해 "나는 너다"라고 말하는 대목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급반전되는 연극이다.

안중근의 둘째 아들인 안준생은 1939년 10월 7일 자신이 거주하는 상하이에서 경성(서울)으로 건너와 미나미 지로 조선 총독을 방문했다. 그는 여드레 뒤인 15일, '보리사'란 사찰에 가서 참배 의식을 올렸다.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었던 이곳 보리사는, 정식 명칭 외에 '박문사'란 별칭도 갖고 있었다.

박문사의 박문(博文)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박문을 딴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당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친일 성향 신문인 <경성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안준생은 이등박문의 사당에서 향을 피우면서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報國)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1939년 10월 18일자 <매일신보>에 보도된 안준생 기사.
 1939년 10월 18일자 <매일신보>에 보도된 안준생 기사.
ⓒ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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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생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다음 날인 16일에도 이어졌다. 조선호텔로 간 그는 이곳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 아들인 이토 분키치와 만남을 갖고 그에게 용서를 빌었다. 이 사건은 10월 18일자 <매일신보>에서 '극적 대면, 여형약제-오월 30년 영석'이란 제목으로 보도됐다.

여형약제(如兄若弟)는 '형제처럼 친하다'는 뜻이다. 이토 분키치(당시 56세)가 안준생(당시 33세)의 형이라는 의미에서 이런 표현이 나온 것이다. 오월(吳越) 30년 영석(永釋)은 오나라와 월나라 사이에 존재했던 것 같은 적개심이 30년 만에 영구적으로 풀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조선총독부 외사부장이 주선한 그 자리에서 안준생은 "벌써 그것이 30년 전의 옛 일입니다만, 지금 생각해도 아플 만큼 그때의 일이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한 뒤 "어제도 박문사에 참배하고 고인의 영전에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속죄하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더니 오늘은 훨씬 마음이 가볍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에 그는 갖고 간 보자기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아버지 안중근의 위패였다. 사죄의 진정성을 보여주고자 아버지의 위패까지 들고 나간 것이다.

안준생의 사죄를 받은 이토 분키치는 "3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잘못을 가리면 무엇하겠나?"라며 '앞으로는 일본을 더 잘 이해하고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취지의 말을 하면서 용서를 해주었다. 두 사람은 17일 아침 10시에 함께 박문사를 참배하기로 약속한 뒤에 헤어졌다.

안준생은 안중근의 의거가 있은 1909년 10월 26일로부터 30주년 되는 달에 이토 히로부미의 영전에서 용서를 빌고 그의 아들에게 사죄를 했다. 중국 상하이에 사는 사람이 조선 경성까지 건너가서 그런 일을 한 것이다. 그는 하필이면 아버지가 의거한 10월에 그런 행동을 했다. 더군다나, 일본인들이 30주년 제사를 특히 중시하는 상황 속에서, 1939년 그런 행동을 했다.

일본에서 기획한 '쇼' 그리고 이에 동참한 안준생

안준생이 10월 7일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을 방문한 뒤에 경성 일정을 시작하고 총독부 외사국장의 주선 하에 이토 분키치를 만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안준생의 사죄 퍼포먼스를 기획한 쪽은 일본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정신적 통합을 통해 전쟁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킬 목적으로 이런 쇼를 기획한 것이다. 안준생은 어떤 사정에서였는지 그런 쇼에 휘말렸다.

하얼빈역에서 동아시아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상급법원 항소도 포기한 채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안중근. 그런 영웅의 아들이 30년 뒤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에 참배하고 그 아들에게 사죄한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일본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안중근의 아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의아함을 감출 길이 없다.

일본이 패망한 직후에 백범 김구가 '안준생 처단'을 중국 정부에 요청한 것도 그런 분노 때문이었다. 자서전인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이렇게 회고했다. 아래 인용문에서 괄호의 내용 역시 백범 김구가 쓴 것이다.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안준생은 왜놈을 따라 본국에 돌아와 왜적 이등박문에게 부친 의사의 죄를 사하고 미나미 총독을 아비라 칭하였다)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도록 중국 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  - <백범일지> 중에서

 이토 분키치(앞줄 오른쪽)를 만난 안준생(앞줄 왼쪽).
 이토 분키치(앞줄 오른쪽)를 만난 안준생(앞줄 왼쪽).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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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준생을 무턱대고 비판하기도 힘들다. <나는 너다> 속의 안준생이 절규했듯이, 일본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압력을 가했을 것이며 그로 인해 그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이를 감안하면 그에게 연민의 정이 생길 여지도 있다.

안준생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고국을 떠났다. 안준생이 세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한국인들의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안준생은 가난과 설움과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다. 아버지의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들이, 아버지로 인해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안준생의 배신 행위에는 분명히 동정할 만한 측면이 담겨 있다. 3·1운동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 같은 사람도 일본의 압력에 넘어가 친일파로 돌아서는 상황이었다. 그들 못지않은 압박을 받으면서도 그들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 있었을 안준생에게 "아버지의 명예를 무조건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가혹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조선 혹은 민족이라는 사회공동체 덕분에 큰돈을 벌거나 고등 교육을 받았거나 높은 지위를 얻지도 못했다. 도리어 이 사회공동체 때문에 시련만 당한 사람에게 "그 어떤 조건에서도 민족과 국가에 대한 의리를 잃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안준생의 행위는 물론 잘한 일은 아니지만, 무조건 비판만 할 일도 아닌 듯하다. 그가 '못난 사람'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악한 사람이라고 비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아들의 배신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중근의 위업

 안중근 동상.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안중근 동상.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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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정말로 대단한 점은 따로 있다. 그것은 안중근의 10·26 의거가 갖는 엄청난 힘이다. 일본은 안중근의 의거를 훼손하고자 아들 안준생까지 악용했지만,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안준생의 행위는 별로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안준생이 이토 분키치에게 사죄하는 수치스러운 장면이 아니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리는 통쾌한 장면뿐이다. 안준생의 행위가 안중근에 대한 국민적 평가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안중근에게는 아들의 배신행위 외에 또 다른 악재가 있다. 그것은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도 나오듯이, 그가 서민대중의 혁명운동인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하는 편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황해도 지주들이 중심이 된 의용대에 아버지 안태훈과 함께 가담한 안중근은, 서민들로 구성된 백범 김구의 동학군과 정면충돌할 뻔했다가 극적으로 휴전을 한 적이 있다. 또 '동학농민군은 친일파인 일진회의 조상'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자서전에 담은 적도 있다. 안중근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동학농민군을 혐오했다. 

안중근의 시대에는 지주계층이 일본군의 지원 하에 동학군을 제압했다. 당시는 동학에 대한 평가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당시의 지주들이 아니라 동학군의 입장에서 서술된 역사를 배우고 있다.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그들은 역사 속에서나마 승리를 거두었다.

이처럼 동학군이 역사 속에서 승리했는데도, 동학군 진압에 가담한 안중근의 행위는 한국인들의 의식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 사후에 벌어진 아들의 배신뿐만 아니라 생전에 벌어진 반(反)동학 행적에도 관계없이 민족적으로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행위가 갖는 고도의 역사적 의의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죽인 이토 히로부미는 동아시아 변방에 불과했던 일본을 짧은 시간 내에 아시아 최강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일본 근대화의 기점인 1868년 메이지유신 이전만 해도, 일본은 조선·청나라로부터 따돌림을 받던 동아시아의 변방국이었다. 이런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 등장 이후 급속한 변화를 겪는다. 1879년에 오키나와를 강점하고,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아시아 최강을 증명한 후, 1895년에 타이완마저 점령했다.

그것도 모자라 10년 뒤인 1904년에는 영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을 다투던 러시아를 격파하고 세계 정상급에 오르는 기적을 연출했다. 서양이 동양을 침략하는 '서세동점'이 대세였던 시대에, 거꾸로 동양 국가가 서양 강국을 격파하는 이변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 하에 일어났던 일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는 영웅이었다. 동시에 동아시아 국가 입장에서는 원수나 다름 없었다. 그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쓰러뜨리고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에 경고탄을 발사했으니, 안중근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하늘을 찌를만 하다. 안중근이 갖는 역사적 의의가 이처럼 엄청나기 때문에, 동학군 진압이나 안준생의 배신에도 끄떡없이 그가 변함없이 민족적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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