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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은 종종 틀림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틀림은 내가 속한 안팎을 경계로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든다. 그 벽은 투명하나 아주 단단해 외부의 웬만한 압력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벽을 허무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조건은 단 하나, 벽안의 사람만이 깰 수 있다는 거다.

빌리 가족의 진가는 구성원 개인이 입을 열고 대화에 참여하는 순간 빛(?)을 발한다.
 빌리 가족의 진가는 구성원 개인이 입을 열고 대화에 참여하는 순간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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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가족이 있다. 논리와 편견으로 무장한 크리스토퍼(아빠)와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엄마), 언어 관련 논문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우울증만 악화돼가는 다니엘(형)과 사랑에 꿈마저 희미해져가는 오페라 가수 루스(누나) 그리고 스스로를 가족 구성원으로서가 아닌 '마스코트'로 여기는 청각장애인 빌리(막내)까지, 겉보기엔 여느 가족과 다를 바 없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사실 이 가족의 진가는 구성원 개인이 입을 열고 대화에 참여하는 순간 빛(?)을 발한다.

단어 사용 하나까지도 자기식대로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크리스토퍼는 다니엘과 루스를 향한 못마땅한 시선을 거두지 못해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베스가 중재자로 나서보지만 헛수고로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 빌리는 이들의 대화를 묵묵하게 유심히 지켜볼 뿐이다. 일찍이 부모로부터 입술을 읽는 기술인 구순술을 익혔다곤 하지만 비유에 비난을 넘어 비아냥거림은 옵션으로 치고받는 격렬한 '말(言)의 전쟁'에 빌리를 위한 자리는 없다.

빌리가 가족에게 수화가 아니면 대화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장면
 빌리가 가족에게 수화가 아니면 대화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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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 트라이브스(Tribes)>은 청각장애인 빌리를 정상인처럼 살게 하고픈 바람에서 수화를 가르치지 않은 부모의 소신이 진정 올바른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원하든 아니든 태어남과 동시에 가족이라는 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신념과 가치관을 전달받는 게 옳은 일인지, 나아가서는 그렇게 형성된 일률적인 가치관이 오히려 가족의 소통을 방해하고 있진 않은지를 묻고 있다.

극은 가족과 소통, 표현수단으로서 언어가 갖는 한계 등의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며 빌리에게 끼친 가족의 강력한 영향력과 불통(不通)의 탈출구를 찾아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낸다. 빌리의 변화는 수화통역사인 실비아와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들뜬 마음으로 저녁식사에 실비아를 초대한 빌리는 구순술에 서툰 그녀와 대화하기 위해 애쓰는 가족의 모습을 보고 지금껏 배려 받지 못한 자신을 발견한다.

마침내 빌리가 가족에게 수화가 아니면 대화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이제까지 침묵해오던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빌리의 폭탄선언에 대한 가족의 생각과 실제 밖으로 내뱉는 말이 얼마나 다른지 자막을 활용해 연출한 장면은 참신한 발상이 돋보인다. 이를테면 빌리에게 "이해해"라고 말하는 동시에 자막으로는 마음으로 생각한 "이해 못 하겠어"가 제공되는 식이다.

들을 수 있는 세계의 다니엘이 빌리로부터 “사랑해”라는 표현을 수화로 배우고 있다.
 들을 수 있는 세계의 다니엘이 빌리로부터 “사랑해”라는 표현을 수화로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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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에게 '진짜' 소통은 너무 가까워 오히려 어렵다. 물론 방법은 있다. 말로는 쉬우나 실천은 어려운 '인정'이다. 인정의 첫 걸음은 나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빌리가 오랜 침묵을 깨고 들을 수 없는 자기 세계의 언어로 "난 소리를 못 들어요. 아닌 척 하지 마세요!"라고 말한 것처럼, 들을 수 있는 세계의 다니엘이 빌리로부터 "사랑해"라는 표현을 수화로 배우기 시작하는 것처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공감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지선의 공연樂서, #문화공감,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노네임씨어터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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