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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3일부터 21일까지 독일과 스페인 답사에 나섰다. DMZ 보존 실태, 도시 재생, 지역개발 성공 사례 견학이 목적이었다. 이 기사는 그 답사에 동행한 18명의 행정자치부 직원을 비롯한 지자체 공무원과의 토론 또는 대화를 토대로 작성했다. 도움을 준 윤광희, 이근행, 심창우, 이재연, 최숙자, 박광근, 문상규, 김규식, 양경종, 이재훈, 김선익, 고미경, 이상심, 김대성, 이유섭, 조광래, 김세학님께 감사드린다... 기자말

바르셀로나. 유럽에서 로마와 파리에 이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도시다.
 바르셀로나. 유럽에서 로마와 파리에 이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도시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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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좋아하시는 분들! 이곳에서는 가능하면 호날두 이야기는 하지 마시고, 메시 선수에 대한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난 11월 1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우리 일행을 맞은 현지 안내원은 첫 마디를 그렇게 꺼냈다. 무슨 말일까. 축구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은 세계적 스타 플레이어인 포르투갈 출신 호날두 선수가 속한 팀이 '레알 마드리드'라는 것쯤은 안다. 메시 선수의 소속팀은 바르셀로나다.

바르셀로나·마드리드, 두 도시가 앙숙이 된 이유

도시계획이 잘된 도시, 세계에서 잘 만들어진 도시를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은 주저 없이 바르셀로나를 말한다. 이 도시 출신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셀로나는 19세기 중반 '일데폰스 세르다'라는 토목기사가 도시계획을 했단다. 바둑판 모양으로 짜여진 도시, 200여만 인구를 보유한 바르셀로나를 처음 방문한 사람도 지도 한 장만 있으면 절대로 길을 잃을 일이 없는 이유란다.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국기를 단 집은 한곳도 없다.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국기를 단 집은 한곳도 없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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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빌딩에 걸린 게 어느 나라 국기 같아요?"

노란색 바탕에 4개의 붉은 줄이 그어진 깃발이 건물 옥상을 비롯해 주택 난간에 걸려 있다. 확실한 건 스페인 국기는 아니다. 스페인 기(旗)는 노랑 바탕에 두 개의 붉은 선을 기준으로 가운데 왕국 상징물이 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시가지의 관공서나 공공건물 어디에도 스페인 국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은 스페인 깃발 대신 '카탈루냐 주기(州旗)'를 단다.

"마드리드 사람들은 '스페인에서 올림픽을 치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대체 무슨 말인가. 우리는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이 열린 것을 기억한다. 몬주익(바로셀로나 외곽 마을 지명)의 영웅 황영조 선수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졌다. 그런데 많은 스페인 사람들은 자국에서 올림픽이 열린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올림픽은 바르셀로나에서 열렸지 스페인에서 열린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고. 올림픽 기간 중 바르셀로나 선수촌에도 스페인 국기 대신 카탈루냐 주기를 달아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 안내원의 설명이다.

바르셀로나 시내. 도시계획이 잘 되어 있어 누구라도 지도 한장만 있으면 길을 잃는 경우가 없다.
 바르셀로나 시내. 도시계획이 잘 되어 있어 누구라도 지도 한장만 있으면 길을 잃는 경우가 없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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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는 스페인 수도인 마드리드 다음으로 큰 도시다. 이들 두 지방이 어쩌다 원수가 되었을까. 가이드의 말을 듣다 보니 그 정도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인 몬터규가와 캐풀렛 집안을 닮았다. 프리메라리가에서 레알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두 팀이 만나면 그 살벌한 분위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경기가 아닌 전쟁이라고 표현할 정도란다.

전 세계의 유명 선수들을 사들여 초호화 군단을 꾸린 레알마드리드. 어떻게든 바르셀로나에게 리그 우승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쓴다. 시민구단인 바르셀로나 또한 레알마드리드에 지지 않기 위해 유명선수를 사들였다. 대표적인 선수가 아르헨티나 출신 '메시'다. 마드리드를 꺾을 수 있다면 기꺼이 주머니를 여는 주민(州民)들의 극성도 한몫했다.

15세기 말까지 지금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496년 카스티야(마드리드) 이사벨 1세(여)와 아라곤(바르셀로나) 페르난도 2세의 결혼으로 두 나라는 합병됐다. 이후 왕이 카스티야 계통으로 승계되면서 카탈루냐 사람들의 불만은 쌓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1936년 내전으로 표출됐다.

바르셀로나 전통시장. 내가 살고 있는 화천 재래시장에 접목할 것을 찾았다. 가지런한 물건 진열과 가격표시다.
 바르셀로나 전통시장. 내가 살고 있는 화천 재래시장에 접목할 것을 찾았다. 가지런한 물건 진열과 가격표시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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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의 도시인 바르셀로나는 항만도시인 까닭에 일찍이 공업이 발달한 데 비해 마드리드 사람들 다수는 귀족층이었다. 그 때문인지 바르셀로나는 진보 성향이 강했고 마드리드는 보수주의 사람들이 다수였다. 두 도시 사람들의 갈등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사람들이 앙숙이 된 결정적 원인은 1936년 내전 이후였다. 마드리드 우파의 승리로 끝난 내전. 그리고 프랑코가 정권을 잡으면서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프랑코 정부는 카탈루냐 사람들에 대한 차별화 정책을 폈다. 공공기관에 카탈루냐 출신을 고용하는 일이 없었다. 노골적으로 탄압을 가했다. 카탈루냐 언어도 금지했다.

바르셀로나 축구팀을 사랑하는 카탈루냐 사람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 마드리드 축구팀을 창단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프랑코는 바르셀로나 사람들을 싫어했다. 마드리드 팀에 왕실의 칭호인 '레알'을 붙일 만큼 바르셀로나 축구팀을 이기길 원했다. 결국 1960년 레알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를 꺾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것이 또 카탈루냐 사람들을 자극했다. 바르셀로나 시민구단(FC바르셀로나)이 활성화된 이유다. 

세계인들이 찾는 관광도시, 영어로 된 간판이 없다

바르셀로나 한복판에 세워진 이정표. 세계적 관광도시임에도 영어로 표기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바르셀로나 한복판에 세워진 이정표. 세계적 관광도시임에도 영어로 표기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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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사람들은 에스파냐어 즉, 스페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카탈루냐어는 스페인 사투리가 아닌 완전히 다른 언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진학하면 가장 먼저 카탈루냐어를 배우고, 고학년이 되면서 제2외국어로 스페인어를 선택한단다.

바르셀로나 몬주익 인근에는 국립 미술관과 체육관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국립'이란 표현이 스페인을 말하는 국립이 아니고 카탈루냐 주정부를 의미하는 국립이라는 거다. 주민(州民)들이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갈망하는 일종의 시위란다.

한나절 바르셀로나 시내를 걸어도 영어로 쓰여 있거나 스페인어로 표기된 간판을 보지 못했다. 바르셀로나는 유럽에서 로마와 파리에 이어 세 번째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도시다. 그런데 관광객들 편의는 안중에도 없는지 온통 카탈루냐어로 쓰인 간판 일색이다. 그곳 사람들의 자부심과 고집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어떤가. 시골동네를 가도 한집 건너 영어로 표기된 간판이 즐비하다. 그것도 모자라 영문을 한글로 표기한 집들도 수두룩하다. 그렇게 해야 장사가 잘 되고, 뭔가 있어 보이는지는 모르겠다. 세계인도 인정한 한글의 우수성을 스스로 외면하는 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신광태 기자는 강원도 화천군청 기획담당입니다.



태그:#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에스파냐,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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