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상처는 흉이 지기도 한다. 또 그 흉터는 영원히 남아 지워지지 않을 수 있다. <5일의 마중>은 바로 이렇게 흉터가 된 중국인들의 아픔에 대해 그린 영화이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처음 우리나라를 찾은 <5일의 마중>은 <인터스텔라>의 기염에는 밀렸지만 개봉 두 달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상영관을 꿰차고 있다. <인터스텔라>가 아버지의 사랑, 부정(父情)을 담아냈다면 이 영화는 부부간의 사랑, 즉 부정(夫情)을 담아낸 영화라 할 수 있다.

기억을 잃은 펑완위(공리 분)는 눈앞에 있는 돌아온 남편, 루옌스(진도명 분)를 알아보지 못하고 매달 5일이 되면 그를 마중하러 나간다. 몇 년이 지나도 한결같이 그를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면서,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상처 입은 개인의 자아를 단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영화를 관통하는 시대적 흐름은 바로 중국의 '문화 대혁명'이다. 이 사건을 통해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반공분자로 몰리면서 감옥에 수감되었다. 영화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하나의 무용극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영화는 무용극이 끝난 뒤 관객과 무용수가 모두 일어나 사회주의를 위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실력은 있지만 반공분자로 몰린 아버지 탓에 구석자리 단역을 맡은 단단(장혜문 분)의 슬픈 표정을 함께 담았다. 한 장면 안에 시대적 상황과 이를 겪는 개인의 모습을 무용이라는 도구로 아름답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단단 역시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큰 아픔을 겪는 인물이다. 모택동의 공산주의에 세뇌된 교육을 받은 단단은 순간의 철없는 행동으로 기억을 잃은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내쳐진다. 둘이서만 살아왔던 모녀이기 때문에 자신을 보고 싶지 않다는 어머니의 말은 단단에게 큰 상처가 된다. 그럼에도 항상 낮과 밤에는 집을 찾는 단단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한 모녀의 관계를 통해서 지나간 과거일지라도 아픔의 흉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평완위는 기억을 잃은 뒤, 혼자 문화대혁명 시대에 머물러있다는 느낌을 준다. 단단이 아직도 무용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며 5일 새벽이 되면 언제나 그렇듯이 남편을 마중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루옌스는 그런 아내 옆에서 팡 선생님, 편지를 읽어주는 친절한 옆집사람, 때로는 피아노 수리공이 되어준다. 아내는 유독 팡 선생에 대해 광적으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자신을 상처 입힌 폭력적인 대상에 대한 트라우마로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단단의 대사를 통해 팡 선생님이 '문화 대혁명' 당시 평완위를 위협해왔던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 말을 듣자 팡 선생님을 직접 찾아가 그녀를 대신해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팡 선생 역시 그때의 자신처럼 어딘가에 수감되어있는 상태였고 루옌스는 오히려 팡 선생의 아내에게 가해자로 몰리기도 한다.

"어서 남편을 풀어주지 못해?"

팡 선생의 아내는 되려 루옌스에게 소리친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문화 대혁명 시대로 인해 평완위의 상황과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평완위가 겪는 아픔은 개인의 아픔을 넘어 중국 전체의 아픔을 대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그 아픔은 개인의 복수로도 해결될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흉터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국의 모습은 6.25로 인해 분단을 겪은 우리나라의 아픔과도 닮아있다. 정치적 이념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휴전선 너머의 가족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겪지 않았던 아픔일지라도 분단에 대한 상처는 여전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5일의 마중> 역시 자신의 부모가 직접 겪었던 문화대혁명시대의 아픔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장예모 감독의 바람이 녹아있다. 장예모 감독은 인터뷰에서 직접 부모세대들이 겪었던 아픔을 이 영화로 풀어내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평완위는 나이가 들어도 남편의 옆에서 여전히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눈이 내리는 5일, 이제는 걷지 못할 정도로 노쇠하였지만 저 멀리 기차역을 바라보고 있는 평완위의 모습 뒤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루옌스가 있다. 해결될 수 없는 마음의 흉터를 간직한 그들이지만 서로가 곁에 있기에 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관객에게 큰 울림을 준다. 어쩌면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남편이 아닌, 돌아올 수 없는 아름다운 과거가 아닐까. '찬란한 슬픔의 봄', 결코 다시 맞을 수 없는 그들의 지난 날들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5일의 마중 장예모 공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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