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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태의 껍질은 검정색, 속이 파래서 속청이라고도 부른다.
▲ 서리태(속청) 서리태의 껍질은 검정색, 속이 파래서 속청이라고도 부른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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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횡성에서 갑천 물골에서 거둔 서리태의 모양새는 그리 좋지 않았다.

가뭄이 한창일 때 더는 시기를 놓치면 안 되기에 그저 되는대로 심었다. 그리고 검질 한 번 제때 해주질 못했고, 추수하는 시기도 잘 맞추지 못했다. 메주콩이야 서리가 오기 전에 거두지만 서리태는 10월께 서리를 맞은 뒤에나 수확을 하고, 서리를 맏으면서도 자란다고 하여 '서리태'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알았다.

게다가 가을햇살에 말린 것도 아니고, 하우스에서 말렸으니 이래저래 파종에서 수확까지 덤벙덤벙 가꾼 것이다. 그래도 생명의 힘이라는 것은 대단하다. 그래도 고마운 일은 뿌린 것보다 많이 거두었다는 것이다. 거의 원시적인 방법으로 콩을 털었는데 키질이라도 할 줄 알면 좋으련만 키질도 못하니 그저 대략 눈대중 손대중으로 검불과 돌을 골라내고 대충 자루에 담았다. 그래도 그렇게 담아놓으니 서리태인 줄은 알겠다.

이렇게 농약 한 번 안 주고 키웠어도 유기농이라고 하면 한 방 얻어맞을 수도 있겠다. 최근 이효리와 관련한 유기농콩 논란을 보면서 '사람들 해도 너무 한다' 생각을 했다. 나의 농사철학으로는 화학비료 안 주고 키웠거나 아니면 태평농법(심고 그냥 방치하기)으로 가꾼 것은 다 유기농이다. 인증을 받지 않았으니 혹은 이런저런 유기농 인증관련법을 들어 반박을 한다면 그러시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유기농 인증을 받으려면 상당히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다고 한다. 몇 년 동안 그 땅에 화학비료를 안 준 것은 물론이고, 주변 농지에서도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단다. 그러니까, 아무리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들 그걸 충족하지 못하면 유기농이 아니라는 것이다.

각설하고, 그렇게 두어달 망에 넣어 말렸다가 찬바람이 쌩쌩 불어 외출을 하지 못하고 집에 푹 박혀있을 수밖에 없는 오늘에서야 소일거리를 찾다가 서리태 고르기 작업에 들어갔다. 나는 하나 하나 골라낼 작정이었는데 아내가 쟁반을 준다. 쟁반에 서리태를 두어 줌 올려놓고 기울이니 동그란 놈들이 '자르르르' 파도소리를 내며 아래로 구른다.

'어허, 이런 방법이!' 제법 재미있었다. 규칙적인 운동이 한 시간을 넘기기까지는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서리태를 골라내는 일이 한 시간 여를 넘어가자 슬슬 권태감이 밀려오고 피로했다.

그래도 일이 끝이 보이니 마루리는 해야겠다. 그런게 서리태에는 서리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메주콩도 간혹 섞여있고, 팥도 있다. 그리고 온전히 잘 익은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 찌그러지고 상처도 나고 벌레먹고 쪼개진 것들도 있다. 아내는 콩국물 한 방울이라도 나올 것 같으면 합격시켜 주라고 한다. 허긴, 팔 것도 아닌데 최상품만 합격시킬 필요가 없다. 아, 우리 아이들 대학입시도 이러면 얼마나 좋아!

서리태를 골라내고 남은 쭉정이들과 검불들
▲ 쭉정이 서리태를 골라내고 남은 쭉정이들과 검불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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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태를 고른 후 이런 글을 썼다.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을 것이다.
한동안 알곡과 쭉정이가 동거를 했지만, 결국 이렇게 구분되는 날이 오늘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런 날은 그래서 도둑같이, 급작스럽게 오는 법이다.

서리태를고르면서 콩국물이 조금이라도 나올 것 같은, 완전한 알곡이 아니더라도 완벽한 쭉정이가 아니라면 알곡에 둔다. 간혹 메주콩과 팥도 둘어있는데 그것 조차도. 왜? 만일 가게에서 돈 주고 사는 것이라면 실한 것만 들어있는 것을 선택했겠지만 직접 농사를 지은 것이므로...

콩국을 할까...콩죽을 쑬까? 콩나물을 기를까, 청국장을 담글까? 가만히 집에 앉아있으니 제법 할 일이 많다. 살림이 왜 죽음이 아닌지 실감난다. 그래, 그 날은 급작스럽게 오는 거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망에 걸려있던 그들이었으며, 나 역시도 오늘 오전에 그것을 고르겠다는 계획이 없었다. 그냥 날씨가 추웠고, 다리가 불편해서 외출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그래서 집안에서의 소일거리가 필요했고, 아내에게 소일거리를 요청한 끝에 '서리태 고르기'라는 소일거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입장에서서는 그야말로 최후의 심판과도 같은 날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네 삶도 이런 일들이 우연을 가장하여 필연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현실은 아무런 연관성 없이 내게 주어진 것 같지만 그동안의 모든 삶들이 오밀조밀하게 날줄과 씨줄로 엮여진 결과가 아닐까? 그런 생각에 미치니 하루하루 작은 일이라도 온 힘을 다해 성실하고 맑게 살아야 할 일이다.


태그:#서리태, #속청, #이효리, #메주콩, #유기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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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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