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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6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화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그 이튿날 우리는 산성으로 갔다. 저녁 때 한 농가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이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졌다. 밖에서 누군가 "오, 여기 군인들이 벌써 자고 있네?" 말하며 주인 보고 "하룻밤 쉬고 갑시다"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문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들어온 군인은 중별 2개를 단 상좌였다. 그는 15사단이 지금 산성을 거쳐 북으로 후퇴하는 중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일행을 깨워 귓속말로 다른 곳으로 도망치자고 하였다.

우리는 방에서 몰래 빠져 나왔다. 밖에 나서니 문 밖에는 보초 한 명이 서있었다. 보초는 우리 보고 어디에 가냐고 물었다. 우리는 방이 좁아서 다른 집으로 옮기는 중이라고 말하고는 총총히 집을 빠져 나왔다.

길에는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군인들이 후퇴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행렬을 뚫고 맞은 편 산으로 기어올랐다. 잠시 후 누군가 우리를 발견하고 "산으로 가는 자가 누구냐!" 하고 외쳤다. 우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산으로 달음질쳤다.

그 때가 밤 11시경이었다.

우리는 방향도 모른 채 정신없이 산으로 올라갔다. 캄캄하고 무성한 숲속에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우리는 손을 더듬으며 무조건 산마루를 향해 계속 올라갔다. 얼마나 올랐을까, 산마루에 다다르니 어느덧 새벽이 다되었다. 동이 튼 후 주변을 보니 멀리 묘향산이 보였다.

그 곳은 매우 높은 고원지대였다. 평지에서 한 1000m 정도로 제법 높은 산에 올랐는데, 이 산 위에 이렇게 넓은 고원지대가 펼쳐질 줄은 정말 몰랐다. 넓은 고원은 평야를 이루고 주변에 야산들이 널려 있었다. 나는 산봉우리서 사방의 지형을 한참 동안 감상했다. 시야가 훤히 트여 멀리 개천 방면도 볼 수 있었다.

얼마 후 동이 환히 텄다. 농가를 찾아 농가의 문패를 보니 함경남도 영흥군 대행면 대흥리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살금살금 농가로 들어가 혹시 군인이 없나 살피고 주인을 찾았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청하자 주인은 우리를 보고 반갑게 들어오라고 하였다. 나는 일행과 함께 방에 들어가 편히 쉬었다. 집주인은 우리를 보고 고생이 많다며 위로해 주었다.

"치안대가 애국자 체포해서 죽이고 악질 행동 저질러..."

주인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우리는 불안한 마음에 낮에는 산에 올라가 있다가 저녁 때가 되면 다시 마을로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날마다 집을 바꿔가며 밤을 보냈다. 사람들 말을 들으니 국군이 지나가고 치안대가 조직되어 점차 치안이 잡혀 간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하루는 피난민 하나가 산으로 오르다가 우리를 보고 말했다.

"아래서는 치안대가 애국자를 체포해서 죽이고 말 할 수 없는 악질 행동을 저지르고 있어요. 지금 위대한 애국투사들이, 혁명가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나도 지금 죽을 걸 피해 간신히 도망쳐 왔어요."

그는 치를 떨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인민군이었던 나도 살아 날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매일같이 높은 산을 찾아 올라오는 피난민들도 있었다. 이들은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북으로 가지 못하고 산으로 피신해 오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일행은 산속에서 그들에게 마을 소식을 들으며 안전하게 자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며칠을 더 기다리니 아래는 치안이 유지되어 국군과 미군이 지프차를 타고 다닌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 드디어 때가 되었소. 우리 귀순하기로 합시다. 내일 아침, 맹산읍으로 가서 귀순합시다. 모두들 내일 아침 10시까지 사복으로 갈아입고 이곳으로 모입시다."

우리는 귀순 약속을 한 후 각기 흩어졌다.

새 옷을 지급 받고자 윗옷을 벗고 대기 중인 인민군 포로들. 그들 목걸이에는 각자 인적사항이 적혀 있다(인천, 1950. 10. 2.).
 새 옷을 지급 받고자 윗옷을 벗고 대기 중인 인민군 포로들. 그들 목걸이에는 각자 인적사항이 적혀 있다(인천, 1950. 10. 2.).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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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군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이집 저집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집을 다녀 봐도 산골 사람들이라 그런지 가진 옷이 별로 없었다. 집집마다 모두 마땅한 옷이 없어 옷을 구하지 못했다.

나는 발품도 헛되이 빈손으로 밤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무언가 시커먼 것이 내 앞을 스쳐갔다. 나는 깜짝 놀라 방아쇠를 당겼다.

"딱꿍."

고요한 산속에 갑자기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지며 어둠속에 날카로운 섬광이 번쩍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알 수 없는 검은 물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발사한 것이 전쟁 중에 내가 쏜 유일무이한 단 한 발의 총알이었다. 집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갑작스런 총소리에 깜짝 놀라 마당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집주인이 깜짝 놀랐다.

"그건 우리 송아지요. 아이고, 죽었으면 어쩌나."

집주인은 울상이 되어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도 걱정이 되어 얼른 주인을 뒤쫓았다. 천만다행으로 송아지는 총에 맞지 않았다. 뒤에 알고 보니 밤에 송아지가 갑자기 외양간에서 뛰쳐나와 내 앞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그날 밤 집 주인이 내게 말했다.

"옷을 줬으면 좋겠지만 옷이 없어요. 마침 중의적삼이 하나 있는데 다 낡았어요. 이거라도 입을 수 있으면 가져가세요."

주인은 내게 낡은 중의적삼 한 벌을 건네주었다. 나는 원하던 겉옷을 얻지 못해 못내 아쉬웠지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옷을 받았다.

그날 밤은 폭설이 내려 눈이 무릎까지 빠졌다, 게다가 한파가 몰아쳐 살을 파고드는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다. 나는 망설임 끝에 인민군 군복 상의만 벗고 내의는 그대로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사복을 걸쳤다. 바지는 인민군 동복을 입고 그 위에 중의를 껴입었다. 인민군 운동화와 발싸개는 그대로 신은 채 모이기로 한 장소로 서둘러 떠났다.

도착해 보니 나만 남루한 중의적삼을 껴입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따뜻한 무명옷으로 갈아입고 왔다. 나는 그들을 보고 '수단이 좋구나. 어디서 그리 좋은 옷을 얻었을까?'하는 생각에 부럽기만 했다.

우리는 지니고 있던 각종 신분증을 찢어 버렸다. 나는 그간 애지중지했던 아시보 장총을 분해하여 탄환과 함께 수풀 속에 버렸다. 우리는 휘몰아치는 바람이 어찌나 차가운지 살을 에는 듯이 매서운 추위에 모두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걸었다. 우리는 무릎까지 파묻히는 눈길을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헤쳐 산을 내려왔다.

생사 넘나드는 오랜 도피 생활 끝에 마침내 귀순, 그러나 

간신히 산을 벗어나 마을에 내려오니 뜻밖에 인민군 동복을 입고 있는 치안대원이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그의 인솔 아래 맹산읍 치안본부로 갔다. 생사를 넘나드는 오랜 도피 생활 끝에 마침내 귀순한 우리는 '이젠 살았구나'라는 생각에 모두 기뻐했다.

맹산군 치안본부에서는 귀순자들을 하나하나 불러내 정밀 몸수색을 하였다. 우리 일행 6명을 모두 일렬로 세워놓고 한 사람씩 몸수색을 해나갔다. 

서울 영등포에서 강제로 끌려온 의용군들은 전후사정을 설명한 후 모두 무사히 통과되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날 유심히 살펴보던 치안대원 하나가 내가 중의 속에 인민군 내의를 껴입은 걸 발견하고는 "야! 이놈, 가짜 귀순자다!"라고 소리쳤다.

나는 몹시 당황하여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그 옆에 선 군인이 나서 "이 놈이 똑바로 말을 할 때까지 쳐라!" 하고 명령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그곳에서 한국군과 헌병을 보았다. 여기저기서 개머리판이 마구 날아와 사정없이 온 몸을 후려쳤다. 개머리판에 이어 총구로도 찔렀다. 얼마나 아픈지 처음에는 입이 딱 벌어져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매가 잠시 그치고 심문이 쏟아졌다.

"이놈아! 너, 우리를 정찰하러 온 가짜지? 귀순하는 척하고 우리를 정탐하러 왔지? 너 산에 몇 명 있어! 소속은 어디야?"하고 연신 다그쳐 묻는다. 내가 아니라고 답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놈 봐라! 이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둘러대. 이 놈 입에서 똑바로 나올 때까지 쳐!"라고 외친 후 또 다시 온 몸을 마구 때렸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 호된 매를 맞았다. 군홧발에 채이고, 개머리판과 총대와 주먹으로 수없이 맞았다. 나는 얼마나 맞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무튼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터졌다.

내가 당할 때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의용군들이 내가 진짜 귀순했다고 구명해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옆에 선 헌병이 나서서 말을 가로 막았다.

"이 새끼들, 말하면 다 죽어!"

헌병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모두 아무 말도 못했다. 귀순한 우리 일행 중 의용군 다섯은 모두 다른 방으로 보내고 결국 나만 그렇게 호되게 당했다. 나는 귀순하면 국군이 환대해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죽어라 매타작을 당할 줄 몰랐다. 나는 억세게 맞아가면서도 초지일관 끝내 귀순자일 뿐 척후병은 절대 아니라고 버텼다.

계속된 심문에도 내 답변이 변치 않자 그들은 더 이상 나를 고문하지 않았다. 헌병은 함께 귀순한 다섯을 다시 불렀다. 그리고는 이 자가 정말 너희와 함께 귀순했냐고 물었다. 다섯이서 영원읍에서 도망했다가 숲에서 나를 만났던 얘기와 귀순하기까지의 과정을 낱낱이 털어 놓았다.

치안대장이 의자에 앉아 의용군들의 진술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되물었다.

"귀순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군복을 속에 껴입고 왔느냐?"

치안대장의 말투가 아까와 달리 조금 누그러져 있어 나는 해명에 마음이 급했다.

"산중에 사는 사람이 가난해서 옷이 없다고 하는데 어찌합니까? 그래서 주는 대로 받아가지고 입으려 했으나 하도 추워서 할 수없이 그렇게 입고 왔습니다"라고 빨리 답했다.

치안대장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의용군 5명을 불러놓고 말했다. "산중에 사는 사람들이 가난해서 옷이 없을 텐데 그렇게 좋은 옷을 순순히 주더냐?"라고 정색하고 물었다. 그런 후 그들의 뺨을 차례차례 힘껏 후려갈겼다.

치안대장은 다시 말하기를 "그들이 가난할 텐데, 산골짜기 사는 사람들이 웬 옷이 그렇게 많아서 좋은 옷을 줬겠어? 이놈들! 너희가 이 옷을 꺼내 입고 왔지?"하며 닦달을 하였다. 의용군 다섯은 빨갛게 변한 뺨을 움켜지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치안대장에게 뺨을 얻어맞는 것을 보고 마음이 후련해졌다. 치안대장이 진심으로 내 마음을 알아주었기 때문이었다. 치안대장은 우리를 보내면서 당부의 말을 하였다.

"그간 수고하였소.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내게는 따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귀순자 가운데는 불순분자들이 껴있고 척후임무들을 띠고 잠복하는 수가 있어서 그런 것이니 여기서 당한 일을 섭섭해 하지 말고 집으로 가거든 치안을 위해 협조해 주시오."

우리는 치안대장에게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려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떠나는 우리를 보고 치안대원이 주의사항을 말해 주었다. 앞으로는 산길이나 소로로 가지 말고 큰 길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한 사람씩 귀순증 한 장을 나눠주었다. 가는 길에 검문소에서 누가 묻거든 이 귀순증을 보여주고 집으로 가라는 것이다. 모두들 귀순증을 보며 마음이 든든해져 참으로 기뻐했다. 맹산읍을 빠져 나오면서 우리는 모두 이제 살았다고 매우 좋아했다. 나는 온 몸이 멍들고 아파서 이 모든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맹산읍에서 십리쯤 걸어 나오자 양덕읍으로 가는 길과 평양으로 가는 두 갈래 갈림길이 나타났다. 갈림길에 이르자 서울이 고향인 의용군 다섯의 마음이 달라졌다. 그들은 하루빨리 빨리 집으로 가고 싶으니 평양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바로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나는 그들과 갑자기 헤어지는 것이 몹시 섭섭하였다. 우리 집에 가서 며칠 쉬고 가기로 했는데 이별하게 되어 안타까웠다. 하지만 서로 갈 길이 달라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고향에 가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정든 우정을 생각하며 서로 편지를 하자고 다짐하였다. 또 앞으로 세월이 안정되면 서로의 집에서 만나자고 약속도 하였다. 우리 여섯은 각자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호주머니에 넣고는 헤어졌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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