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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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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은 1976년부터 조합원들을 업종별로 조직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청계천에는 조그마한 피복 제조업체가 수백 개로 분산돼 있어 조합원을 조직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게다가 같은 피복 제조 업체라 해도 다양한 업종들이 있다. 이를테면 대인복, 아동복, 작업복, 학생복, 숙녀복, 와이셔츠, 바지 업체 등이다. 이것들을 노동조합이라는 큰 틀로 묶을 수는 있어도 실질적인 투쟁 조직으로 엮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조합원을 조직하기 위해 조합 간부들이 갖은 심혈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상가별, 지역별로 구역 위원회 제도를 두고 직종별, 나이별, 취미별, 성별 등의 분류를 동원해 조직을 꾸렸다. 이와 같은 방법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 방법은 일정한 성과가 있음에도 현장 대중 조직화의 방법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노동자들이 일상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소홀히 해 현장 내의 투쟁에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고 현장 대중들의 요구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업종별 조직을 강화, 발전하기로 했다.

물론 업종별 조직은 이전에 시도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각 업종에 대한 구체적인 실태 파악과 업종의 특성 그리고 현장 대중들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깊게 연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이번에는 보다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업종별로 조직하기로 했다.

와이셔츠 업종은 무엇보다도 옷의 디자인이 단순해서 어떤 공장에서 옷을 만들더라도 작업 형태가 비슷하다. 따라서 근로 조건도 각 공장마다 비슷하다. 와이셔츠 업체는 타 업체보다 비교적 규모가 커서 대개 한 공장에 노동자 숫자가 30명 안팎이다. 뿐만 아니라 와이셔츠 업종은 다른 업종에 비해서 계절을 타지 않으므로 비성수기가 짧다.

이와 같은 유리한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서 조합원들을 조직화하면 조합원들의 요구를 중심으로 투쟁을 이끌어낼 수 있고, 투쟁을 통해서 조직을 대중적으로 강화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조합 간부들은 청계천에 있는 모든 와이셔츠 업체의 실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각 공장의 위치, 사용주 성명, 가게 위치, 규모, 자본 크기, 조합원 분포 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각 공장의 근로 조건 실태와 조합원들이 시급히 개선하고자 하는 요구가 무엇인가를 조사했다.

'오야 미싱사'를 중심으로 조직

영화 '아름다운청년 전태일' 장면
▲ 평화시징 작업장 모습 영화 '아름다운청년 전태일' 장면
ⓒ 기획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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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기초적인 자료를 조사한 다음 와이셔츠 업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에리' 미싱사(와이셔츠 깃 재봉사)를 조직하기로 했다. 와이셔츠는 무엇보다도 에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에리를 비롯해 앞판 쪽을 재봉하는 것이 상당히 까다롭고, 기술을 요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리 미싱사는 고참 중에서도 기술이 뛰어난 미싱사다.

이들은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오야 미싱사'라고도 불리는데, 이 '오야 미싱사'가 일손을 놓아 버리면 다른 공정이 돌아간다 해도 완성된 제품이 나올 수 없었다. '오야 미싱사'는 다른 직종과는 달리 재단사보다도 임금이 많았다. 당연히 공장 내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노동자였다.

이들은 한 공장에 보통 한 명이고,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은 2명 정도였다. 노동조합에서는 전체 와이셔츠 업체 '오야 미싱사'들을 망라해서 모임을 만들었다. 와이셔츠 업체 '오야 미싱사'들의 모임에서는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각자의 공장에서 근로기준법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항을 찾아내고, 공장 내에서 고쳐야 할 문제점에 대해서도 토론을 했다. 이런 가운데 그들은 자연스럽게 공전이 인상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물가는 날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오르는데 임금은 제자리 걸음이니 노동자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와이셔츠 업체 노동자의 공임은 와이셔츠 한 벌을 만드는 데 34원이다. 이 공임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한다. 매년 공임이 올라봤자 1원이 오르고 많으면 2, 3원이다. 이것은 거지한테 동정해주는 격이었지, 결코 임금 인상이 됐다고는 볼 수 없다. 더구나 지난해에는 시다 임금을 사용주들이 직접 지급한다고 해서 미싱사 공전을 5원씩 깎아 버린 일도 있었다.

이 셔츠업체 노동자들은 '오야 미싱사'뿐만 아니라 일반 미싱사, 시다들까지 조직을 확대하고, 지금까지의 침묵을 깨고 공전인상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공전 인상 투쟁의 첫 단계로 현재의 공임 34원을 50원으로 인상해줄 것을 각 공장마다 일시에 요구하기로 했다.

1977년 5월 2일, 각 공장마다 '오야 미싱사'들이 중심이 되어 전체 노동자들이 공장장이나 사장한테 현재의 공전을 50원으로 올려줄 것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의 공전 요구에 사용주들은 한결같이 놀라 나자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매년 1~3원 정도 올려주던 공임을 한꺼번에 16원을 인상해달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와이셔츠 노동자들이 34원에서 50원으로 공전을 인상해달라고 요구한 근거는 한국노총에서 최저생계비를 산출한 것과, 그동안 물가가 오른 것을 감안해 최소한 공전이 50원은 돼야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사용주들은 공전 인상 요구에 놀라고만 있었는데, 나름대로 알아보더니 와이셔츠 공장은 모두 다 똑같은 요구를 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다음날 각 공장에서 조합원들한테 공전을 40원까지 올려줄 수는 있다고 말하고, 40원에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그만두라고 했다.

사용주들은 성실히 협상에 응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고압적인 자세로 조합원을 대했다. 분개한 조합원들은 협상을 통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파업 농성을 벌이기로 한 계획대로 실력 행사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해 5월 4일, 이날 아침 출근 시간에 와이셔츠 업체의 모든 '오야 미싱사'는 각 공장으로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교실로 모였다. 이들은 오전 내내 대책회의를 했다. 각자 공장에서 있었던 사례를 발표하고, 앞으로 어떻게 투쟁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어떤 사람은 즉각 파업 농성을 하자고 주장했다. 또 어떤 사람은 "오늘 오전 근무를 하지 않은 것으로 우리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일단 경고의 의미가 있으니 반응을 보고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가자"고 주장했다.

상당 시간을 토론한 결과 오늘은 일단 오후부터 작업에 들어가고, 저녁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내일 아침부터 전면적인 파업농성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결정에 따라 모두 점심을 간단히 먹고 오후부터 각자의 공장으로 출근했다. 이들이 오후에 출근하니 사용주들이 왜 늦게 출근했냐고 야단만 치고, 공전 인상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전혀 없었다.

'오야 미싱사'들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끝까지 참고 저녁 8시까지 일을 마치고 노동 교실로 모였다. 노동 교실에 모여 예정대로 내일부터 파업 농성에 들어갈 것을 재확인하고 파업 농성에 대비해 준비할 것들을 최종적으로 점검한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파업 농성 시작... 결론은 '승리'

'오야 미싱사'를 비롯한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 농성에 성공했다.
 '오야 미싱사'를 비롯한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 농성에 성공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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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오야 미싱사'들은 정상 출근 시간에 맞춰 공장에 나가서 출근하는 사람들을 몽땅 노동 교실로 보내 버렸다. 이렇게 되니 청계천 일대의 와이셔츠 공장의 모든 기계가 멈춰 버렸다.

노동 교실은 약 250여 명의 와이셔츠 공장 노동자들로 꽉 들어차 임금 인상의 구호 속에 투쟁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사용주들은 그때서야 허둥대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노동청 중부 지방 사무소에서도 노동 조합으로 찾아와서 지부장을 붙잡고 어떻게 해야 작업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중부 경찰서 정보과에서도 찾아와 전후 사정을 알고자 법석을 떨었다.

이소선은 농성 조합원들이 흔들리지 않고 농성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들을 격려하면서 함께 자리를 지켰다. 지부장은 종일 사용주와 노동청 직원들을 만나 이번 문제는 요구 조건을 수락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 방법임을 강조했다. 이와는 별도로 조합 간부들은 파업 농성 소식을 알리는 유인물을 시장 상가에 배포하고, '37.5% 인상'의 리본을 조합원들한테 달아주었다.

밤이 되어서도 농성 조합원들은 해산하지 않고 계속 농성을 이어갔다. 뿐만 아니라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조합원들까지 합류했다. 이에 경찰들은 당황했다. 중부 경찰서 정보과에서는 조합원들의 해산을 강요해서 무마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는지 자신들이 수습에 앞장섰다. 경찰은 노사 협의회 사용주 측 의장인 동화상가 최용갑 전무를 불러내어, 그로 하여금 와이셔츠 업체 사용주들을 모이게 했다.

와이셔츠 업체 사용주들이 모인 가운데 최용갑 전무는 공전 인상을 해주지 않고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면서 사용주들의 올바른 판단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용갑 전무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력이 있으며 추진력과 과단성이 있는 사람으로 업주들을 통솔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노사협의회 석상에서도 다른 사용주들은 노조의 요구에 막무가내로 반대만 하는 데 비해 최전무는 들어줄 것은 들어주고, 안 될 만한 것은 사용주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했다.

동화상가 전무실에서 철야 마라톤 회의 끝에 새벽쯤에야 결판이 났다. 결정 내용은 노동조합 측에서 요구한 공전 50원이었다. 그야말로 완전한 승리다. 노조가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조합원들은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했다. 어떤 조합원들은 서로 껴안으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고 감격했다. 이들의 승리는 과연 단돈 16원일까? 결코 공전 16원 인상의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당한 멸시와 천대를 깨부수고 노예적 삶에서 자주적 삶으로 바뀌는 승리였다.

농성장에 모인 조합원들은 승리에 취해 모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 8시경 지부장으로부터 마무리 말을 듣고 모두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장에 출근했다. 그 아침은 5월의 따사로운 햇볕이 온 누리에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와이셔츠 업체는 이때의 승리로 전체 사업장이 근로기준법을 지키게 되었다. 조합원들의 이러한 승리에도 1977년 7월 대의원 대회에서 이승철 지부장은 불신임을 당했다. 이승철 지부장은 대의원들이 자신을 불신임할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대의원 대회를 유회시키려고 했으나 대의원들과 중견조합원들이 힘으로 의장석에 앉게 해서 대회를 치렀다. 이처럼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지켜보는 이소선의 마음은 착잡했다. 이로써 전태일과 함께 활동했던 바보회 맴버는 노조 지도부에서 빠지게 되었다. 차기 지부장으로 양승조가 선출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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