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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2014년 9월 17일부터 20일까지, 4일간 일본에서 이예다씨와 함께 징병 반대 활동을 하고 온 '안악희(가명)'라고 합니다. 이예다씨는 2012년 징병을 거부하고 프랑스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오로지 병역거부라는 하나의 사유로만 망명이 받아들여진 최초의 사례입니다. 저는 앞으로 진행될 연재에서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여러분께 알리고자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예다씨의 방일은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우선, 2014년 내내 벌어진 군 내의 사고와 맞물려서, 한국군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비인권적인 구습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지, 병사들에 대한 처우는 얼마나 열악한지를 외신 기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아울러 민주화 이후 자유국가가 되었다고 알려진 한국에서 아직까지 병역거부를 비롯한 인권 상황은 좀체로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릴 수 있었습니다.

이예다씨는 아주 바르고 반듯한 분이셨습니다. 덕분에 일본의 활동가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작가 아마미야 카린씨로부터는 '예다링'이라는 애칭까지 받았습니다. 4일 동안 벌어진 질풍노도와도 같은 이야기들을 이곳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기자 말

일정 중 유일한 개인시간에 들른 아사쿠사 센소지에서. 왼쪽부터 필자, 이예다씨, 김근태씨(실명이다), 평화주의 단체 "전쟁없는 세상"에서 오신 구로씨.
▲ 아사쿠사 센소지의 네 사람 일정 중 유일한 개인시간에 들른 아사쿠사 센소지에서. 왼쪽부터 필자, 이예다씨, 김근태씨(실명이다), 평화주의 단체 "전쟁없는 세상"에서 오신 구로씨.
ⓒ 최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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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호텔방이 눈에 들어왔다. 마시다 만 물컵도, 꽁초가 담긴 재떨이도 모두 그대로였다. 어제 한 일들이 믿겨지지 않았다. 달라이 라마나 일본 수상들이 회견한 장소에서 이예다씨는 망명객으로서 심경을 밝혔고, 나는 한국 군대의 인권 실태와 불합리함을 고발했다. 아마미야 카린씨는 징병제와 집단적 자위권의 위험성을 설파했다.

국제분쟁급 사고를 친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물론 이 기사를 쓰는 순간까지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다만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벌집을 쑤신 듯 난리였다.

오늘의 첫 일정은 오챠노미즈 역 근처의 데모쿠라(데모크라시)TV 방송출연 이었다. 데모쿠라TV는 유료 인터넷 방송이다. 쟁쟁한 학자나 언론인들이 패널로 출연하는 상당히 유명한 방송이다. 일본은 이런 식의 방송이 많이 활성화 돼 있는 듯했다. 물론 내가 출연한 것은 아니고, 이예다씨와 아마미야씨가 출연하기로 했다. 

꽉 짜인 하루 일정

숙소에서 나와 오챠노미즈로 가는 동안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한국의 평화운동 단체 '전쟁없는 세상'의 활동가 구로씨가 오늘 일정에 합류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전쟁없는 세상'은 한반도 비핵화, 군축, 병역거부 지원 활동을 하는 평화주의 단체다. 많은 병역거부자들이 '전쟁없는 세상'과 연대하여 병역을 거부하고 감옥에 갔다. 한국의 병역거부와 반군사주의를 이야기 할 때 늘 언급되는 단체다.

오챠노미즈 역 앞에 잠시 서 있었더니 구로씨가 도착했다. 연이어 예다씨와 양성택씨도 도착했다. 함께 걸어서 도착한 데모쿠라TV의 스튜디오에서는 이미 다른 패널들이 열심히 토론을 하고 있었다. 오늘 녹화는 아마미야 카린씨의 요청으로 특별히 징병제를 다뤘다.

데모쿠라 TV의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 이예다씨와 아마미야 카린씨. 일본과 동아시아의 문제에 관해 다루는 다소 진지한 방송이었다.
▲ 데모쿠라 TV의 특별 게스트 데모쿠라 TV의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 이예다씨와 아마미야 카린씨. 일본과 동아시아의 문제에 관해 다루는 다소 진지한 방송이었다.
ⓒ 최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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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미야 카린씨가 한국 군대 병사들이 받는 월급과 일상 통제를 이야기 하자, 경제학자라고 하는 한 패널은 "한국 이제 돈 많으니까 모병해도 될 텐데? 오히려 (이런 식의) 징병제는 마이너스가 될 텐데"라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징병 거부라는 이유만으로 프랑스에서 망명 신청이 허가됐다는 것 자체에 놀란 눈치였다.

데모쿠라TV의 녹화가 끝난 뒤, 우리는 잠시 유명 관광지인 아사쿠사로 향했다. 4일간의 일정 중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시간이었다. 우리는 아사쿠사 센소지와 그 주변을 거닐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미야 카린씨는 이예다씨와 망명 생활과 자유,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이때부터 이예다씨는 "예다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도, 양성택씨도 이예다씨에게 많이 감동했다.

특히 아마이야 카린씨는 작가이자 프레카리아트 운동가이기도 하다. 우석훈 교수와 아마미야 카린씨의 공동 저작 <성난 서울>은 한국어로도 출간됐다. 아마미야씨는 이예다씨가 겪는 고통과 생존 문제에 많이 공감한 듯했다.

한 차례의 홀가분한 관광이 끝나고 우리는 모 잡지사와 인터뷰를 위해 다카노바바로 향했다. 다카노바바에 도착하자 '우주소년 아톰'의 주제가가 울려 퍼졌다. 일본의 전철역은 역마다 열차 발차음이 다르다. 다카노바바는 설정상 아톰이 개발된 곳이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철도 밑 굴다리에 거대한 벽화가 눈에 띄었다. 데츠카 오사무의 만화 캐릭터를 모두 모아놓은 그림이었다. 양성택씨가 이예다씨를 잡아 끌며 이야기했다.

"예다링! 사진 하나 찍읍시다. 저쪽에 붓다도 있네요."

데츠카 오사무는 세계평화와 인류발전을 꿈꾸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예다씨가 데츠카 오사무에게서 영향을 받은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 데츠카 오사무의 벽화 앞에서 데츠카 오사무는 세계평화와 인류발전을 꿈꾸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예다씨가 데츠카 오사무에게서 영향을 받은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 최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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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포토라인이 형성되었다. 우리는 데츠카 오사무의 캐릭터 앞에 선 이 망명자 청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뜻밖의 일이었지만, 나는 이날을 회고할 때마다 이 사진이야말로 상징적인 어떤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다카노바바에서 만난 기자는 다수의 북한 르포로 일본에서는 매우 유명한 기자로 한반도 문제에 대해 많은 기사를 쓰는 분이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망명과 징병제에 관한 문제 뿐만 아니라, 한반도 문제, 군사주의와 인권 문제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기자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탈북자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탈남자'는 처음이네요."

'탈남자'가 나올 때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뭐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외로 많은 취재진들이 모여들었다. 아사히 신문에서 온 기자 한 분은 행사 이후 뒷풀이에 오셔서 이예다씨와 아마미야씨와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예다씨에 관한 기사는 2014년 10월 27일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마가9학교의 안내문 생각외로 많은 취재진들이 모여들었다. 아사히 신문에서 온 기자 한 분은 행사 이후 뒷풀이에 오셔서 이예다씨와 아마미야씨와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예다씨에 관한 기사는 2014년 10월 27일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최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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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자 하이라이트인 "마가 큐 학교(マガ9 学校)"에 도착했다. 도쿄의 NPO 센터에서 열린 이 이벤트는, 아마미야 카린씨가 필진으로 있는 시사 전문 웹진 '매거진9'의 편집부에서 정기적으로 주최하는 토크 이벤트다.

이날은 아마미야 카린씨의 진행으로, 우리 일행이 총 출동한 자리였다. 시간도 이야기 할 만한 주제도 넉넉했다. 게다가 오늘 합류한 구로씨도 게스트로 출연했다. 실질적으로 한국에서 비종교적 병역거부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활동한 구로씨의 증언은 매우 중요한 발언이었다.

특히 이날은 어제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못한 언론인과 일반인이 많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넉넉한 시간 덕택에 심도 있는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심지어 관객석에는 이란에서 온 망명신청자도 있었다. 이란에서 좌파 정당 활동을 하다 일본에 온 그는, 14년 동안 망명 신청을 세 번이나 했다가 받아 들여지지 않았는데 이제 캐나다에 망명이 허용되어 곧 일본을 떠난다고 했다. 그는 이예다씨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군대 다녀오면 남자다워진다고?

질의응답 시간도 충분히 있었으므로 이날 나온 몇 가지 질문을 소개한다. 질문 중에는 한국에 대한 오해로 약간 엉뚱한 질문도 있어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 병역거부를 한 사람의 가족이 한국 정부로부터 법적인 처벌이나 위해를 받지는 않습니까? 병역 거부를 지원하는 단체나 개인이 정부로부터 조사를 받는 일은 없습니까? 오늘 여기 나온 여러분들의 가족이 한국 당국에 의해 잡혀가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일단은 자유 국가이기 때문에 당사자 이외가 연좌 처벌하는 일은 없어요.(안악희) 다만 병역 거부자들의 가족이 직장이나 이웃으로부터 '범죄자의 가족'이라는 시선을 받는 경우는 있죠.(구로)"

- 일본에서 징병제가 도입된다면 어떤 형태로 도입될 것이라 생각하세요?
"일본에서 집단적 자위권이 통과됐다고 해서 갑자기 한국형 징병제가 도입될 가능성은 일단 없다고 봅니다. 된다 하더라도 병역 거부권과 대체 복무제도가 있고, 징병제라 하더라도 아주 양호한 형태인 독일식 제도가 추진되겠죠. 다만 잠재적으로나마 징병제를 도입할 의도가 있다면 군사와는 무관해 보이는 부분부터 준비될 가능성이 큽니다. 먼저 성인 남성들의 건강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한 신체검사 등을 할 겁니다.(안악희)"

- 북한과 준 전시상태라는 상황이 징병제의 가장 큰 이유로 보통 설명되는데, 한국이 징병제를 폐지한다면 국가가 붕괴하지 않나요?
"명목상으로는 그렇지만 화력이나 경제력 수준을 감안 할 때 북한과 남한과의 전쟁은 헤비급과 라이트급의 싸움이라 볼 수 있어요.(구로) 생각해 보세요. UN의 식량지원을 받는 국가와 무역량 세계 10위권의 국가가 대치하고 있어요.(안악희) 오히려 국민 통제를 목적으로 한 성격이 강하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구로) 북한이 없어지면 다음은 중국, 일본이 징병제 유지를 위한 명목이 될겁니다.(이예다)"

- 이렇게 많은 문제가 있는데 왜 폐지, 혹은 개선의 움직임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사회 자체가 민주화와 함께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 지 아직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기본권 침해에 민감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 세계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큰 피해지만 전 국민이 동일하게 부담한다는 성격 때문에 개개인이 받는 피해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측면도 있습니다. (안악희)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국민 통제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병역이 한국 사회에서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받아들여지는데, 한국 사회가 원하는 사람으로 길들이는 측면이 있습니다.(구로)"

- 한국사회에서 병역을 거부한 사람은 사회에서 차별하는데, 연애에는 지장이 없나요? 결혼은 할 수 있어요?
"연애 많이 하고 결혼도 합니다.(구로)"

확실히 일본인들이 징병제에 느끼는 온도차나 오해는 상당히 컸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다 보니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에게 "대외적으로" 자주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제 주변에도 군대를 다녀온 한국인이 있는데, 군대를 다녀와서 남자다워지고 좋았다. 책임감이 생겼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건 좋은 기능이 아닌가요?"

그러자 나와 양성택씨가 말했다.

"아 그러면 그분한테 '군대 한 번 더 가서 두 배로 강한 남자가 되서 나오면 어떠냐'라고 물어보세요. 분명히 화낼 겁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한국 예비역들이 제일 싫어하는 악몽이 군대 다시 가는 꿈이에요."

유럽인으로 보이는 한 외국인은 나에게 물었다.

"징병제가 심각한 문제인 것은 알겠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존폐 여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고, 이게 없어지면 큰일 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징병제가 없어지면 그 다음의 한국은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잠시 숨을 고르고, 나는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엇보다도. 지금처럼 사람 데려다가 고생시키고 제대로 보상도 안 해주는 비 인간적인 시스템은 사라지겠지요."

마가9학교가 끝났다. 모든 일정을 마쳤다. 우리는 마침 가까운 신오오쿠보로 향했다. 오랜 만에 한국 음식이라도 먹자는 모두의 의견을 따른 결정이었다. 간토오 지방 최대의 코리아 타운답게 정말 서울과 별 차이가 없었다. 최근에는 재특회가 욱일기를 들고 행패를 부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삼겹살에 막걸리를 마시며 짧지만 다사다난한 일정에 대한 회포를 풀었다. 프랑스에는 가라오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에, 양성택씨는 다같에 2차로 노래방에 가자는 제안했다. 우리는 코엔지의 한 가라오케로 향했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이예다씨는 블루하츠의 노래와 하가렌의 오프닝 송을 열창했다. 나는 예다씨의 밝은 모습을 보며 기쁘면서도 동시에 복잡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서울의 어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이다. 저녁이 되면 호프집에서 맥주나 마시고 닭이나 뜯을 것 같은 평범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왜 망명자일까. 한국의 시스템은 왜 아직도 제자리 걸음인걸까.'

어느덧 아침해가 밝았다. 코엔지 거리에는 상쾌한 공기가 가득했다. 예다링은 아침 비행기로 떠나야 했기에 모두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는 마치 오랜 친구들처럼 환하게 웃으며 헤어졌다.

신나는 뒷풀이가 끝난 아침, 코엔지의 거리에서 이예다씨가 숙소로 돌아가는 도중 포즈를 취해주었다. 그는 정말 밝고 건강한, 또한 평범한 젊은이었다.
▲ 자, 다시 파리로! 신나는 뒷풀이가 끝난 아침, 코엔지의 거리에서 이예다씨가 숙소로 돌아가는 도중 포즈를 취해주었다. 그는 정말 밝고 건강한, 또한 평범한 젊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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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아침의 도쿄 거리를 내려다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들에게 자유는 무슨 의미일까. 불합리한 처우에 대한 보상을 이제는 요구해도 되지 않을까. 왜 이런 상황까지 왔을까. 몇 세대가 지날 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바꾸려 했을까.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고민은 있었을까.

* 다음회에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앞서 기고한 부분에 나와있음.



태그:#징병제, #병역거부, #망명, #아마미야 카린, #이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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