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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 <416기록단> PD
 이승구 <416기록단> PD
ⓒ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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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실종자 수색 중단을 요청했다. 고 황지현양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수색 중단은 뜻밖이었다. 정부는 수색 중단 요청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가족들이 수색 중단을 요청하자마자 '범정부사고대책본부'(아래 범대본)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일주일 만에 철수되었다. '마지막 한 명까지 다 찾겠다'던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의 말은 결국 빈말이 되어버렸다.

그럼 진도는 모두 떠나왔을까? 아니다. 아직도 진도엔 3명의 실종자 가족들과 유가족들 그리고 시민단체와 '416기록단'란 이름으로 모인 독립 PD들이 남아 있다. 특히 416기록단은 참사가 일어난 4월 16일부터 진도에 상주하며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왜 지금도 진도에 남아 있는지 궁금하여 416기록단 멤버인 이승구 PD를 지난 24일 서울 청량리역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다. 다음은 이 PD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했다.

"비용문제로 국민 수습 않겠다는 것, 국가의 모습 아니다"


- 현재 진도는 어떤 상황인지 궁금합니다.
"수색 종료 선언과 함께 모든 것이 마무리된 상황이고 범대본도 해체식을 했어요. 모든 시설도 철수했고 체육관도 비웠어요. 남은 가족은 3가족 정도 되는데 그들은 안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팽목항에서 끝까지 인양을 요구하면서 힘을 모으겠다고 해서 유가족과 일반 시민단체 분들이 내려오셔서 함께 인양에 힘쓰자고 말씀하고 계세요."

- 그럼 어디서 지내나요?
"팽목항에 컨테이너 숙소가 있어요. 컨테이너 마을이 조성되어 있거든요. 의료시설도 있었지만 범대본 철수와 함께 모든 것이 떠났어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가족 숙소, 자원봉사자 숙소, 식당과 세탁실이에요. 그리고 자원봉사자들 중에 오랫동안 계시던 분들이 다시 와서 봉사를 하시고, '잊혀져가지 않도록 팽목항을 지키자, 그리고 세월호 인양을 국가에 계속 건의하고 시민단체도 힘을 모아서 이야기해달라'고 말씀하세요."

- 지난주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이 범대본 해체 중단을 요구했는데.
"그렇게 했지만 이주영 장관은 '더 이상 범대본에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진 국민안전처에서 국민 여론과 세월호 상태를 점검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인양문제를 결정할 것'이라고 선을 긋고 해체한 거죠. 그래서 더 이상 범대본에 인양을 요구할 수도 없게 되었어요.

가장 큰 건 실종자 가족들 스스로가 수색 중단을 요구했다는 건데, 그 결정도 사실 어려운 과정이었죠. 전문가들은 12월 초까지는 잠수가 가능하다고 하는데도 실종자 가족들이 수색 중단을 요구했고, 그러니 범대본은 가족들을 설득해야 하는 부담감을 덜게 된 거죠."

- 가족들 스스로 결정한 건가요?
"지금 가족들은 후회하세요. 수색 중단 요구가 너무 빨랐다는 것과 함께, 인양을 요구해야 하는데 그것에 대한 약속도 없이 수색 중단을 했다는 걸 이제 와서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가족들은 충격을 받으셨지만 그렇다고 팽목항을 떠날 수도 없죠. 물론 떠난 가족도 있어요. 그분들은 정부에서 인양할 것으로 생각하고 올라갔지만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 인양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인양이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세월호가 침몰한 '맹골수도'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물살이 거세다고 합니다. 잠수사들의 안전문제와 비용문제로 인양에 대한 찬반 여론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바다를 터전으로 삶을 살고 계신 해남 지역 어민들께서는 인양을 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계세요.

인양에 비용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비용문제를 넘어 그 이면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는 국민 한 사람까지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죠. 국가의 3요소는 국민, 주권, 영토잖아요. 그런데 지금 비용문제를 들어서 국민을 끝까지 수습하지 않겠다는 것은 국가의 모습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기업은 비용을 따져요. 근데 국가는 기업이 아니잖아요. 국민 한 사람이 국가이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만약 세월호 같은 사건이 다시 발생했을 때 또 국민을 포기하는 일이 생긴다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모든 국민들에게 한 점 의혹도 없이 진실을 밝혀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배에서 몸 흔들며 '파도 세다' 연기하는 기자... 부모들 경악"

- 어떻게 해서 취재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사고 당일부터 동료 PD들은 현장에서 촬영하고 있었고 저는 17일 새벽에 친구에게 전화를 받았어요. (친구의) 조카가 세월호에 갇혀 있는데 구조되지 못했다는 거예요. 이어서 '구조 의지도 없는데 언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너는 독립 PD이니까 진실을 밝히는 보도를 해줘'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 마음을 갖고 함께 모인 PD들이 416기록단이란 이름하에 참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끝까지 기록해야 되겠다, 우리가 어느 편이나 어떤 색깔론이 아니라 중립적인 기록자의 입장에서 이걸 기록해 나가자, 진실은 그 현장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진실을 놓치지 않게 현장을 지키자'는 논의 후에 직접 현장에 뛰어들게 되었죠."

- 진도에 처음 내려가셨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상황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죠. 저는 진도 체육관에 6월 2일에 갔어요. 동료 PD들은 초기부터 진도 현장에서 기록하고, 저는 안산합동분향소에서 촬영하고 있었어요. 진도로 가보니 그땐 많은 희생자들이 수습된 상황이고 10명 정도 실종자가 남았을 때예요. 체육관에 계신 실종자 아버님들이 술을 드시면서 '마지막 한 명까지 찾아서 가겠다'고 하셨어요. 수색이 보름이면 끝난다고 하니 그걸 믿고 계셨어요. 근데 수색이 길어졌죠."

- 수색이 왜 길어진 거죠?
"88수중개발 잠수사가 세월호 선미를 작업할 때 산소아크절단을 하다가 절단 부위가 폭발되고 잠수사는 사망했는데, 배 안의 구조물이 폭발과 함께 무너졌죠. 그러다보니 잔해물들이 많아서 그걸 꺼내는 데 시간을 다 썼어요. 안 그랬다면 수습이 쉽게 끝났겠죠. 가족들은 수색이 제대로 안 이뤄졌다고 생각하세요.

왜냐면 마지막에 나온 황지현양의 경우는, 지현이를 화장실에서 봤다는 생존자의 증언을 듣고 지현이 아버님이 여자 화장실 수색 요청을 했어요. 하지만 여러 번 수색했다는 이유로 해경에 묵살당했어요. 화장실을 14번이나 들어갔다고요. 근데 결국 거기서 (황양의 시신이) 나왔잖아요. 때문에 실종자 가족들은 수색이 제대로 안 이뤄졌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죠."

-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특히 참사 초기에 실종자 가족들의 언론에 대한 불신이 컸잖아요. 독립 PD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언론에 대한 불신이 커요. 초기에 언론이 해경은 수색을 안 하는데 하고 있다는 보도를 냈고, 한 방송사 기자가 흔들리지도 않는 배에 서서 몸을 흔들며 파도가 심하다는 듯이 방송하는 현장을 부모님들이 보고 경악했다고 해요. 언론이 왜곡하는 걸 직접 희생자 가족들이 본 거죠. 그러다 보니 불신이 컸고 그 이후에 일부 방송사들이 팽목항을 떠나야 했던 상황이 있었어요. 몇몇 방송사들만 남았죠.

저의 경우, 부모님들을 만나서 촬영하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을 기다렸어요. 바로 카메라를 들고 촬영한 게 아니라 2주 정도는 가족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까지 항상 카메라는 들고 있었지만 촬영은 안 했고 그분들이 저희를 믿고 촬영을 허락해주실 때까지 기다렸죠."

"계절이 두 번 바뀐 시간... 가족들은 아직도 4월 16일에 산다"

이승구 <416기록단> PD
 이승구 <416기록단>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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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냥 기다리기만 한다고 되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렇죠. 저희가 가진 생각들과 지금까지 해온 일들 등 저희가 누구인지부터 가족 분들께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서서히 의심을 푸시고 오히려 (가족들이 있는 체육관) 1층에서 같이 자자고 하셨어요."

- 1층으로 내려오니 어땠어요?
"(기자들이 있는) 2층은 사실 가족들을 멀리서 보기만 할뿐 그분들의 이야기, 표정, 상황들을 살피기엔 불편해요. 1층에서는 가족들을 직접 보거나 이야기 나눌 수 있고,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보니 저희가 기록을 담기 좋았죠. 그리고 아침부터 밤까지 가족 분들과 함께 생활하는 느낌이라 그분의 감정 하나하나 알 수 있었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 분들께서 '이승구 PD는 오랫동안 같이 있던 우리 가족 같아요'라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어느 언론도 믿지 않고 계실 때 저를 가족이라 말씀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더욱더 진실된 기록에 힘쓰자'라고 다짐을 했죠."

- 봄부터 늦가을인 지금까지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어요.
"세월호 침몰 현장이 바다 가운데다 보니 아침 점심 저녁 날씨가 다 다른 것 같아요. 특히 봄에 사고 이후 여름, 늦가을까지 수색을 진행했는데, 바다의 날씨가 변덕스럽고 계절을 탄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한여름 수색은 바지선 바닥이 철판이라 프라이팬처럼 달궈져 있는 그 위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죠.

그리고 그 사이에 진도실내체육관과 팽목항을 오가는 길에 논밭의 풍경이 바뀌었죠. 초기엔 보리가 자라더니 어느새 밭을 갈며 모내기를 하고 모가 자라서 황금물결을 이루고 지금은 벼가 추수되어 빈 들판만 남아 있죠.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계절이 바뀌는데 실종자 가족들은 아직도 4월 16일에 살고 있단 거죠."

- 가족들을 옆에서 지켜보셨을 텐데 어땠어요?
"그분들의 하루하루가 매일 같은 일정의 반복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정부의 대책 없는 대책, 반복되는 설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초기엔 상상이 안 되더라고요. '이렇게 매일 녹음기처럼 똑같이 반복되는 상황과 내용을 몇 달째 들으며 점점 지쳐가고 무뎌져가는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가족 분들과 얘기를 하면서 그분들의 잃어버린 가족의 모습을 봐요. 그분들 하는 말이 '이렇게 빨리 사고로 헤어질 줄은 몰랐다. 가족이란 같이 밥 먹고 같이 웃고 같이 자고 함께하는 것인데, 그런 소소함마저도 정말 소중하고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없기 때문에 매순간 순간마다 기억난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희생된 가족과 연관된 일상이에요. 그러다 보니 그 추억 속에 계속해서 끝까지 찾고 싶다는 간절함이 더한 거예요."

- 많이 우셨을 거 같아요.
"아니요. 사고 초기에는 많이 울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철저히 기록자 입장에서 기록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분들의 감정은 이해하지만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슬퍼하는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최대한 담담히 진실을 기록하려고 하고 있어요."

"생존자 사회 복귀, 정부가 책임지고 지원해야"

- 어떻게 재난 전문 PD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MBC에서 <생존>이란 다큐멘터리를 기획하면서 대구 지하철 참사 생존자들을 취재했거든요. 그때부터 시작하게 되었어요. 사실 재난 현장은 아무나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재난 현장을 취재하는 것은 PD로서의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 재난 전문 PD로 대구 지하철 참사나 일본 후쿠시마 대지진 등 국내외 재난 현장을 취재해오셨는데, 그것들과 세월호 참사를 비교해보면 어떤가요?
"세월호 참사도 재난이거든요.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충분히 막을 수 있던 인재였다는 거죠. 그래서 더 안타까워요. 시간이 지나면서 참사의 현장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흔적도 없고 금세 잊히겠죠.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부분은 거기서 살아난 생존자들의 삶이 쉽지 않고 사회에 복귀하는 데 어려운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들에게 어떤 긴급한 조치나 지원이 안 된다면 사회 복귀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돼요.

정부가 책임지고 지원해야 합니다. 그 한 사람의 회복이 주는 의미는 우리 사회에 매우 크다고 생각해요. 만약 이들이 사회에 건강히 복귀되지 못하고 방치된다면 우리 사회에 계속된 불안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연환경 파괴와 오염, 인간 윤리 파괴 등으로 앞으로 여러 형태의 재난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라 생각되거든요."

- 독립 PD로서 제작비도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 어떻게 충당하나요?
"저희가 처음 시작할 때는 416기록단의 전체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박봉남 PD가 자신이 생각한 다음 다큐멘터리를 위해 준비한 비용을 세월호 기록을 위해 먼저 깨셨죠. 그걸로 한동안 사용했고 지금은 대출도 받고 하면서 재정 면에서는 어려움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이제 한국PD연합회와 독립PD협회에서 세월호 사고를 끝까지 기록해야 한다는 입장에 동의해주시고 언론의 책임을 가지고 동료 PD들이 모금을 한다고 얘기 들었어요.

그러나 국민을 상대로 하는 공동모금은 안 하려고 해요. 그것보다는 저희를 알고 함께할 수 있는 분들이 동료의 마음을 가지고 하면 좋겠어요. 앞으로 후반작업 제작비가 많이 드는데 그건 고민해야 할 숙제예요."

- 참사는 죽음을 취재하는 것이잖아요. 특히 세월호는 피해자가 대다수 학생들이라서 취재가 더 고통스러웠을 것 같은데.
"안산 분향소에 걸린 사진을 보면 앳되고 밝고 아름답고 멋진데, 그 모습을 보며 많이 울었어요. 학생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안산 분향소를 3주 정도 왔다 갔다 했어요.

3주 동안 아이들 사진 하나하나 보며 이름을 기억하려 노력하고 눈을 하나하나 맞추면서 속으로 아이들에게 '얘들아 PD로서 너희들의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을 끝까지 밝힐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라고 다짐했어요. 지금까지 잘 버텨온 것 보니까 아이들이 저를 격려하는 것 같아요(웃음)."

- 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
"처음 세월호 기록의 기간을 1년으로 예상했어요. 숫자적 의미도 있지만 1년 정도 기록하면 왜곡된 시선 없이 기록자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저희는 어떤 색깔을 나타내지 않고 정치적으로 어느 한쪽에 편중되어 있지도 않고 중립을 지키며 정확히 기록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어요.

사실을 기록하는 것에 일단은 힘을 쏟고 싶고요. 그런 기록으로 만들어질 결과물이 후에 우리 모두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서 앞으로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모든 국민이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일조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주에 다시 팽목항으로 돌아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영광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영광의 언론, 그리고 방송이야기'(http://blog.daum.net/lightsorikwan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구, #416기록단,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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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세월호' 침몰사고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와 이영광의 '온에어'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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