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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치권에서 '사자방'이라는 단어가 핵심적인 키워드로 떠올랐다. 사자방이란 4대강 사업, 자원외교, 방위산업을 뜻하는 말이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자원외교와 방위산업 비리를 해결하고 관련자를 처벌해야 한다며 '사자방 국정조사'를 요구하면서 이슈가 됐다.

사자방 비리뿐만 아니라 허울뿐인 부동산 대책, 정부나 지자체가 경기를 부양하겠다며 내놓는 여러 토건 사업 등도 마찬가지다. 항상 야심차게 시작하지만 끝은 비리와 재정적자로 얼룩지는 게 대부분이다. 여러 개발 사업으로 서민 경제에 이바지하겠다는 정치인의 공약은 사실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 공약(空約)이거나 정치적 레토릭(rhetoric)에 불과하다.

정치인이나 많은 부를 축적한 이들, 즉 특권 계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사회에서 권력과는 상관없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이 같은 고민을 담은 책이 있다. 바로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다. <반란의 도시>에서 하비는 도시권, 즉 도시에 관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권계층에 의한 도시권의 전용(專用)

<반란의 도시>, 책 표지
 <반란의 도시>, 책 표지
ⓒ 에이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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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층의 부패를 논하면서 도시권이라는 생소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일견 이상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비에게 있어 도시권은 중요한 개념이다. 하비의 논의에 따르면 도시는 잉여자본의 해소, 요컨대 도시는 자본주의의 화장실로 기능해왔다.

"자본주의는 도시 공간의 형성에 필요한 잉여생산물을 끊임없이 생산해야 한다. 정반대의 관계도 성립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생산한 잉여생산물을 흡수하려면 도시 공간의 형성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본주의 발전과 도시화 사이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29쪽)인 것이다.

잉여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이는 자본가다. 다시 말하면 도시가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논리에 따라 발전해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뉴욕 시장인 억만장자 마이클 블룸버그는 개발업자와 월스트리트, 초국적 자본가계급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뉴욕을 재편"(58쪽)한 것만 봐도 도시가 얼마나 자본의 논리에 충실하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다. 뉴욕뿐만 아니라 미국 내 다수의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 4대강 사업이나 부동산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부동산 대책, 각 지역의 여러 토건 사업들은 도시권을 무분별하게 전용(專用)한 사례들이다. "특권적 부동산 소유자의 개인적 자산 가치를 증진하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쪽으로 공공 투자를 분배하려는 욕심"(146쪽)때문에 벌어진 참극인 것이다.

도시의 역사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권이 자본가에게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비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도시는 해당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구성해낸 결과물이고, 도시권은 자본가뿐만 아니라 도시의 구성원 모두가 누려야 하는 권리라고 말한다. 과거 특권적 계층에 의해 도시권이 전용(專用)되어 온 역사를 끊어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시권을 되찾으려면

도시권을 쟁취하기 위한 핵심은 먼저 도시의 구성원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착취당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대도시에서는 취약계층을 상대로 착취와 약탈이 끊이지 않고 자행된다. 노동자가 자본가와 싸워 실질임금을 얻어 냈다 해도 소비 영역에서 벌어지는 착취 활동이나 약탈 활동을 통해 자본가는 그만큼을, 아니 그 이상을 손쉽게 도로 가져간다. 도시 저소득층 대다수는 노동을 과도하게 착취당하는 것도 모자라 빈약한 자산마저 약탈당하고 있다"(108쪽)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다음 단계인 연대로 이행할 수조차 없다.

자본의 논리에 편승하려는 정부와 일부 특권 계층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도시 구성원 간의 연대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처럼 경제 민주주의 역시 시민의 조직된 힘이 가장 필요하다.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시권을 가지고 있지만 연대하고 조직하지 않으면 너무나 미미한 힘일 수밖에 없다.

도시는 파편화된 현대인을 묶을 수 있는 좋은 매개다. 같은 지역에 산다는 것은 동질감과 이해 관계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조직이라는 것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나서서 총대를 메야 한다. 도시의 구성원들을 묶어줄 구심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비는 이를 각 지역의 노동조합이 담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조합은 이미 조직된 단체이며, 도시 안에서 직접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역민들과의 연대도 용이하다.

"계급적 착취의 역학은 일터에만 한정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착취의 이차적 형태'는 주로 상인, 지주와 건물주, 금융업자가 조직적으로 저지른다. 그 영향은 공장뿐만 아니라 생활공간에서 주로 감지된다. 착취의 이차적 형태는 자본축적의 역동성을 유지하고 계급권력을 영속화하기 위해 언제나 필요한 것이었다. '약탈에 의한 축적', 지대와 임대료 갈취, 화폐와 이익의 부당한 착취 등은 일상생활의 질을 둘러싸고 대다수 주민들이 느끼는 수많은 불만의 핵심을 이룬다. 도시의 사회운동은 보통 이런 문제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노동은 물론 생활을 둘러싸고 계급권력의 영속화가 조직되는 데서 도시 사회 운동이 발생한다."(221쪽)

노동조합에서 시작해 도시 사회 운동까지 진화해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비의 전략이다. "수많은 노동 분업 안에서 뿔뿔이 흩어져 존재하는 사회적 공간과 장소의 엄청난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모색"(234쪽)함으로써 도시권을 쟁취하는 것이 하비의 궁극적인 목표다.

반란의 도시를 위하여

평소 우리나라 국민들은 도시권에 관한 인식이 아주 미비하다. 노동조합 조직률도 매우 낮다. 뿐만 아니라 정치인의 스캔들보다 연예인의 스캔들에 더 관심이 많다. 하지만 때로는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나 세월호 진상조사 촛불 시위처럼 폭발적인 정치참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이라는 것이다.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드는 것은 필요한 일이나 충분한 일은 아니다.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는 정부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지 모르나 그 다음부터는 면역이 생기기 마련이다.

촛불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과격해져야 한다. 촛불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모든 일을 다 해냈다고 자위해서도 안 된다. 참여를 넘어 촛불의 힘을 조직화하고, 한 목소리로 정부에게 요구해야만 한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반란의 도시로 진화하는 것. 그것이 하비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반란의 도시>(데이비드 하비 씀/ 에이도스/ 2014. 3/ 정가 18,000원)

이 기사는 본 기자의 블로그 picturewriter.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에이도스(2014)


태그:#도시권, #반란,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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