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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2014년 11월 7일)

'항일렬사를 잊지 말고 혁명전통을 계승하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동만항일 영웅렬사 기념 문구앞에서 '항일렬사를 잊지 말고 혁명전통을 계승하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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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감옥 옛터는 어제 보기로 계획되었으나 어둠이 깊어져 아침 식사를 하고 봤다. 이 옛터는 연변 예술 극장 자리다. 예술극장 오른쪽에 2000년 6월 7일에 세운 <연길감옥 항일투쟁기념비>가 있다. 1924년에 세워진 이 감옥은 독립투사와 백성들을 투옥시켰던 곳이다. 1931년 반역자의 밀고에 의해 연길 감옥에 다수의 독립투사들이 투옥된다.

김명주, 리태근, 김영춘의 탈옥 지휘부를 설립하고 17명으로 구성된 탈옥 결사대를 모았다.1935년 6월 8일, 대부분 간수들이 단오절 운동회 구경을 간 틈을 타 드디어 행동이 개시됐다.

당시 <간도신보>에서 이 사건을 보도했다. 그 기사를 보면 "감옥장, 간수장을 학살, 수인 49명이 탈옥, 무기 탄약을 탈취하고 도주, 연길 감옥이 전률"이라고 대서 특필했다. 탈옥에 성공한 30여 명의 옥중 전우들은 천신만고 끝에 인민 혁명군 제2군 련락원을 찾아 혁명 부대에 참가하였다.

연길 감옥에서의  탈출성공은 당시 항일 대오와 대중들을 크게 고무하였으며 그 성공적인 탈옥은 항일사화는 전설처럼 전해 내려왔다. 1980년대 말, 연변 텔레비젼 방송국에서는<동틀 무렵>(시나리오 진설홍)이라는 제목으로 다부작 드라마를 제작, 연길 감옥 탈옥 사건을 드라마화하기도 했다. 다음은 봉오동 전투 지역을 보기 위해서 버스를 타고 갔다. 지금은 댐을 막아서 격전지 호수만 볼 수 있었다.

아카데미회원들의 기념사진.감옥투쟁사에서 유일하게 탈옥에 성공한 경우이다.기념비 뒤에는 '연길감옥가'가 있다. 바람 세찬 남북만주 광막한 들에/붉은 기에 폭탄차고 싸우던 몸이/연길 감옥 갇힌 뒤에 몸은 여웨도/혁명으로 끓는 피야 어찌 식으랴.
▲ 연길감옥항일투쟁 기념비앞에서 아카데미회원들의 기념사진.감옥투쟁사에서 유일하게 탈옥에 성공한 경우이다.기념비 뒤에는 '연길감옥가'가 있다. 바람 세찬 남북만주 광막한 들에/붉은 기에 폭탄차고 싸우던 몸이/연길 감옥 갇힌 뒤에 몸은 여웨도/혁명으로 끓는 피야 어찌 식으랴.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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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장군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일본군을 최초로 크게 참패시킨 봉오동전투 대첩지역이다.
▲ 봉오골 반일 전적비 앞에서 조합원들과 함께 홍범도장군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일본군을 최초로 크게 참패시킨 봉오동전투 대첩지역이다.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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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1920년 6월 7일 항일 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한 대한북로독군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부대를 결성한 군단)부대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부대를 참패시킨 우리나라 독립 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최초의 대첩지이다.

두만강 도문대교로 향하면서 버스 안에서 <눈물젖은 두만강>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합창했다. 이 노래가 조선족의 이민사를 듣고 나니 더욱 서글퍼졌다. 고향을 등지고 가는 이주민들의 가슴은 얼마나 미어졌을까.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은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실고
떠나간 그 배에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두만강을 1킬로 정도 뗏목타기를 체험하였다.뒤로 보이는 다리가 도문대교이다. 두만강 가운데로 경계로 북측과중국의 국경선이다.그런데 수심이 깊은 곳이 무릎밖에 되지 않아서 좌우로 오가면서 타다.
▲ 두만강에서 뗏목 체험 두만강을 1킬로 정도 뗏목타기를 체험하였다.뒤로 보이는 다리가 도문대교이다. 두만강 가운데로 경계로 북측과중국의 국경선이다.그런데 수심이 깊은 곳이 무릎밖에 되지 않아서 좌우로 오가면서 타다.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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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에 잠긴 봉오동 대첩지역에서 회원들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선현들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경의를 묵념으로 대신하고 있다.
▲ 저수지에 잠긴 봉오동 대첩지역에서 회원들이 묵념 저수지에 잠긴 봉오동 대첩지역에서 회원들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선현들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경의를 묵념으로 대신하고 있다.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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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우의교인 도문대교를 갔다. 가기 전 두만강을 유람하는 대나무 뗏목을 타고 올라가는데 바로 강 관목 숲이 있는 언덕에서 북측 초병 2명이 앳된 표정으로 지켜(감시)보고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초소에 한 초병이 지키고 있다가 우리가 손을 흔드니 고맙게도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강의 깊이가 수심이 제일 깊은 곳이 무릎 정도 밖에 안 된다. 도강하면서 익사한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도문대교는 길이가 약 100m다. 도문대교는 북측과 중국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다리의 중간까지만 중국 영토이고, 나머지는 북한 영토에 속한다. 다리 중간에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국경선이 칠해져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간 날은 다리 공사중이라서 중국 쪽으로도 갈 수가 없게 입구문이 잠겨 있어서 옆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바로 다리 너머로 있는 남양시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자주 통과하지 않은 기차인데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

이 화물기차를 보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 일행은 운이 좋아서 왕복하는 기차를 보았다.
▲ 함경북도 남경시로 오가는 화물기차 이 화물기차를 보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 일행은 운이 좋아서 왕복하는 기차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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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에는 영생불멸하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조.중.러 연합투쟁 지역은 연변민족작가회의에서 다녀온 이후 우리가 최대 규모 답사인원으로 체험하였다.
▲ 동만 항일 영웅렬사 기념비 '기념비에는 영생불멸하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조.중.러 연합투쟁 지역은 연변민족작가회의에서 다녀온 이후 우리가 최대 규모 답사인원으로 체험하였다.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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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주 독립운동 대첩 중 하나인 대전 자령 전투 지역을 답사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사정상 소왕청으로 가기로 하였다.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고 연변에서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 거의 가보지 않는 유적지다. 현지 안내원도 가보지 않았던 곳이어서 현지 여행 관계자가 전에 연변민족작가회의에서 간 적이 있어 이를 바탕으로 소왕청 항일 유격 근거지를 찾을 수 있었다. 답사 인원으로 우리 일행이 최대였단다.

이 유격대는 조·중·러 연합군으로서 왕청현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제는 봉오동 전투 등에서 패배한 후 보복 차원에서 1933년 3월에 대량의 병력을 출동시켜 유격 근거지를 미친듯이 토벌하였다. 유격대는 뾰족산과 마반산 일대에서 적을 매복 습격하여 적의 진공을 물리쳤다. 또한 아군은 적의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일제 침략자는 또 다시  천여 명의 병력과 비행기, 대포의 협력 하에 공격하였다. 적의 토벌은 40일간이나 지속되어 근거지 군민들은 피흘려 싸워 적의 토벌을 막아냈다. 그러나 적의 토벌로 말미암아 원래 1500명이나 되는 군중이 400여 명밖에 남지 않아 근거지는 더는 존재할 수 없게 되어 1934년 봄에 라자지구로 이동하였다.

양심적인 일본의 이다스께는 세계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조국인 일제와 싸우다 희생된 지역이다.
▲ 위대한 국제주의 전사 이다스께 희생자 옛터 양심적인 일본의 이다스께는 세계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조국인 일제와 싸우다 희생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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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현 쏘베트 유격대를 지휘한 정부이다.
▲ 왕청현 제2구 쏘베트 정부 막사 왕청현 쏘베트 유격대를 지휘한 정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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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련군장병 순국 기념비이다. 이 지역의 투쟁은 북측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소왕청 항일유격 근거지 옛터 항일련군장병 순국 기념비이다. 이 지역의 투쟁은 북측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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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이상 지속된 토벌에 지속된 투쟁에서 군민들은 자체로 소금, 식량, 의류를 조달할 수 있게끔 되었다. 그러나 긴 투쟁에서 군민들은 초목근피로 생활을 이어가는 것도 다반사였다.

답사가 끝난 후 연변대학에서 조선어를 연구하는 교수와 제자들이 어려운 발걸음을 하여 조선족의 이민사와 유래 등에서 이야기해주셨다. 질의. 응답 시간에 대한민국에서는 뒤늦게나마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등 편찬사업을 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교수님이 사전 편찬에 동참하였다고 하니 더욱 반가웠다.

저녁 식사로 삼겹살로 하였다. 호텔로 와서 짐을 풀고 시내로 택시타고 나갔다. 왜냐하면 같이 간 후배 동료가 광주에서부터 꼬치 구이를 노래하다시피 하여 "내가 책임지마"하고 나갔다. 안내원이 잘하는 음식점을 소개해주어서 그 곳을 갔더니 인산인해였다. 택시 2대로 가서 다양한 꼬치구이에 술 한 잔씩을 겯 들이면서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를 돌아가면서 불렀다.


태그:#연길감옥항일투쟁, #봉오동대첩, #도문대교, #소왕청항일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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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에 몸담으면서 교사.교육활동은 현장단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에서도 변혁이 되어야만 참교육에 이른다고 봅니다.그래서 짧은 소견을 대중적인 전자공간을 담보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전달하고 합니다. 저서로 [자본론노트],[청소년을위한백두선생경제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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