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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난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풍문여고의 한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막바지 점검을 하고 있다.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난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풍문여고의 한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막바지 점검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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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고 중경외시'로 시작하는 대학 '서열도'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흡사 역술인의 주문과도 같은 이 '서열도'는 대체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점수를 기준으로 그 순서가 정해진다. 유독 '인서울' 대학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게 널리 알려져 있다. 이유가 있다. '인서울' 대학과 수도권 소재 일부 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대학들은 대체로 '지잡대(지방에 소재하는 잡스러운 대학의 줄임말)'로 뭉뚱그려지기 때문이다.

대형 입시 학원에서 만들어 배포하는 수능 배치표는 '서열도'의 실체와 힘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물이다. 고3 입시생에게 서열도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냉혹하게 각인하는 구실을 한다. 20대 대학생들은 수능 점수를 따라 결정되는 서열도를 기준으로 자신의 역량과 한계를 지레 가늠한다. 그들 모두에게 수능 점수는 '진리' 그 자체다. 안타깝지만 무모하게 수능에 집착한다.

서연고 중경외시... 주문 만들어낸 수능, 오류 투성이

그 수능이 중대한 기로에 놓였다. 2년 연속 발생한 출제 오류 '사건' 때문이다. 그렇다. 사건, 그것도 아주 중대한 사건이다. 전국의 모든 대학과 학과, 혹은 전공은 수능 점수에 따라 그 서열이 결정된다. 이 나라의 청춘들은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들의 능력과 정체성을 결정한다. 자신의 최초이자 최대의 스펙이 될 그 절대 요소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신뢰성에 커다란 금이 갔다. 누군들 분개하지 않으랴.

애초 수능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 그것은 말 그대로 '대학에서 학문을 닦는 데 필요한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시험이다. 진정한 의미의 학문 탐구에는 오지선다형이 거의 필요 없다. 수능의 주요 목표로 강조되곤 하는 변별력 확보 문제도 대학에서 학문을 하는 일과는 별다른 상관이 없다. 시험을 통한 평가가 변별력을 통해서만 그 의의를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시험이나 평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학습자 진단이다.

오류로 밝혀져 복수정답으로 인정된 2015학년도 수학능력시험 외국어영역 25번
 오류로 밝혀져 복수정답으로 인정된 2015학년도 수학능력시험 외국어영역 25번
ⓒ 한국교육과정평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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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은 처음부터 오지선다형으로 출발했다. 시험의 공정성과 객관성 확보 명목으로 변별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뒤따랐다. 학문을 하는 데에는 창의적인 사고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태도가 중요하다. 하나의 발문과 다섯 개의 선택지로 구성되는 문항에서 정답지 하나를 선택하는 일 따위로는 쉽게 길러질 수 없는 것들이다.

오지선다형 문항으로 대학 수학 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고 본 최초의 수능 제도 입안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정직하지 못했다. 오지선다형 문항으로는 학문 탐구 능력을 평가하기 힘들다. 그것은 기껏 문제 풀기 기술이나 감각을 길러줄 뿐이다. 문항 발문이나 선택지들의 구성 원리와 방식을 꼼꼼하게 익히면 정답을 찾기도 쉽다. 학문에는 정답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정답을 찾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 가망없는 짓을 21년간이나 해 왔다. 왜 해야 했는지,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차분하게 분석하고 성찰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해마다 우리는 동네북이 된 수능을 물끄러미 보면서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날 선 말들을 들어야 했다. 출제 오류, 난이도 조절 실패, 변별력 상실, 물수능, 학교교육과정 파행 등등. 그러다 이번에 제대로 큰일을 당한 것이다.

변별력,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변별력 문제도 그렇다. 시험을 통해 수험생들 간 변별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는 비단 수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변별력 확보 문제는 수능 이전의 학력고사를 비롯한 모든 대학 입학 시험의 주요 요건 중 하나였다. 난이도 조절이나 물수능이 거론되는 배경에도 결국은 변별력 확보 문제가 얽혀 있다.

이제는 솔직해져야 한다. 이렇게 물어보자. 변별력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은 언론에서 '서울 시내 주요 대학'으로 통칭되는 '인서울' 대학 진학 희망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가. 매년 수능 직후에 상투적으로 나오는 비판, 가령 '물수능'이니 '난이도 조절 실패'니 하는 것들 때문에 변별력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상위권' 수험생들이 한 문제만 틀려도 원하는 대학이나 학과에 도전하지 못하게 됐다는 논리가 그 전형적인 증거다.

현재 서열도 상의 상위 10여 개 대학 입학정원은 대략 3만 명이 조금 넘는다. 올해 전체 수능 응시생 수가 65만 명 정도이니 5퍼센트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 변별력 논란을 포함한 대학 입시 담론에서 그 나머지 95퍼센트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이 5퍼센트들간의 변별력 확보 싸움에 들러리를 서고 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대학 입시에서 이들 95퍼센트는 '을'이자 '투명인간'일 뿐이다.

몰매를 맞고 있는 수능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갖가지 해법과 대안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수능 문제를 바라보는 입각이 서로 다르니 모두가 딴소리를 한다. 교육부는 12월 중 가칭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 및 운영체제 개선위원회'를 구성해 내년 3월 최종 개선안을 낼 예정이라고 한다. 두고 봐야겠으나 출제·검토 시스템 개선 정도의 결과물을 내놓지 않을까 싶다.

문제은행,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나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다음날인 14일 오전 서울 서초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가채점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이야기하는 수험생들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다음날인 14일 오전 서울 서초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가채점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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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별력 확보 문제의 대안으로 문제은행 방식을 제안하는 이들이 많다. 문제은행 방식은 연중 문항을 공모해 모은 뒤 그중에서 골라 출제하는 방식이다. 현재의 폐쇄적이고 단기적인 문항 출제 시스템에 대한 보완책으로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문제은행식 문항들에 대한 암기식 학습, 문항 유출 가능성 등의 문제가 있다.

나는 교육부가 중점을 두고 있는 출제·검토 시스템 개선 작업이 좋은 성과를 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일부에서 제안하는 문제은행 방식에도 눈여겨볼 점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단기적이거나 임시방편적인 성격이 강한 것들이다. 수능의 미래, 나아가 우리나라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중·장기적으로 고민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나는 우리 교육당국이 단기적으로 수능을 자격고사화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수능을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명칭에 걸맞은 형태로 전환하는 작업을 적극 추진했으면 한다.

수능 자격고사화는 수능을 절대평가화해 '합격'과 '불합격'으로만 처리하는 방식이다. 수능 자격고사화의 배경은 이미 무르익어 있는 상태다. 무엇보다 수능 점수의 영향력이 정시 전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시전형 비중이 거의 7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다. 70퍼센트가 넘는 입학 정원을 수시 전형으로 뽑는 대학들도 꽤 된다. 많은 '주요 대학'에서 수능 점수는 최소 자격 요건과 같이 제한적으로 쓰인다. 수능 점수를 아예 보지 않는 곳도 수두룩하다.

수능 자격고사화 성패의 열쇠는 '서열도'의 상위권에 자리매김한 이른바 '주요 대학'들에게 있다. 이들 대학에서는 대체로 수시전형 1차 합격자들의 최종 합격 요건으로 수능 몇몇 과목의 최저 등급(의 합)을 제시해 놓고 있다. 그 등급 요건을 지금보다 크게 완화한다면 해마다 수능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과잉' 열기는 한풀 꺾일 것이다.

대학의 '전형 실력'부터 키워야 한다

이 지점에서 다시 변별력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나 논술 같은 다른 전형 요소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학들은 학생부에 대한 불신감이 높다. 논술 형태를 빌린 실질적인 대학별 본고사가 부활할 가능성이 커질 수도 있다.

그런데 논의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그것은 대학 입시판을 고치지 말자는 것과 다름없다. 왜 그런가. 최근 학생부 전형을 실시하는 대학들이 많아졌다. 학생부 전형은 학생부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자는 것이다. 믿지 못할 구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상호간 기본적인 신뢰 관계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대학이 학생부를 통해 학생들을 좀 더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일이다. 좋은 인재를 뽑고 싶어하는 대학이 코를 쉽게 풀려고 해서는 안 된다.

대학들이 전형 실력을 키우면서 수능 자격고사화가 성공적으로 안착하게 되면 수능을 그 본래의 위상에 걸맞은 형태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대학에서 하는 공부와 시험은 직접 사고하고 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오지선다형 문제 풀이 실력으로는 대개 발표로 진행되는 대학 수업이나 논술·서술식으로 진행되는 시험 등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힘들다.

수능 각 과목별로 논술·서술식 문항을 도입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준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꺼번에 안 되면 현재 중고등학교 정기고사에서처럼 일정 비율을 정해 일부 문항 형식으로라도 도입하면 된다. 논술·서술식 시험에 효과적으로 대비하려면 평소 토론 협력 수업을 통해 내공을 길러야 한다. 이렇게 되면 수능이 중고등학교 수업의 정상화를 자연스럽게 이끄는 구실도 할 수 있다.

변별력 문제 생기자 '평가학' 연구하는 프랑스

이와 관련 프랑스의 대학입학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칼로레아를 치르는 프랑스 학생들은 시험을 치르는 15개 과목 전부를 논술식으로 치른다. 20점 만점에 10점을 받으면 시험에 통과한다. 수험생의 80퍼센트 이상이 합격자라고 하니 논술이라고 해도 부담감이 덜할 게 분명해 보인다.

바칼로레아의 전통은 전 먼 나폴레옹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서 깊은 시험이다.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물론 문제가 없지 않다. 우리는 '시험' 소리를 들으면 거의 본능적으로 변별력 문제를 떠올린다. 그간 바칼로레아에 대해서는 그런 변별력 문제가 별로 제기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대학평준화시스템을 꾸려가고 있는 프랑스의 고등교육 정책도 한 몫 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상황이 바뀌고 있다. 바칼로레아가 최소한의 변별력을 확보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교육 당국은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전통의 바칼로레아 방식을 고수하되, '평가학'으로 불릴 만한 연구 분야를 신설해 많은 교사와 연구자들로 하여금 바칼로레아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인 것이다. 몇 년 전 프랑스 파리의 한국문화원에서 들은 얘기들이다.

바칼로레아는 1808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200살을 훌쩍 넘겼다. 우리나라 수능은 이제 고작 21살이다. 200살 선배에 비하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고 할까. 모자라고 성에 차지 않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쉽게 없애고 뜯어고치는 방식으로는 악순환만 불러올 뿐이다.

흔히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한다. 해마다 바뀌는 대입 전형에 비하면 비교적 한결같이 유지돼 온 21년 역사의 수능은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가 심각하다. 대학 입시의 판을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번에 문제가 크게 불거진 수능을 디딤돌 삼으면 된다. 2년 연속 수능 출제 오류 사태가, 시험이나 평가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이루고 진정한 실력주의에 따라 인재를 선발하는 풍토를 마련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태그:#대학수학능력시험, #물수능, #변별력, #바칼로레아, #수능 자격고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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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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