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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가는 올해 2014년은 갑오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 되는 해다. 육십갑자가 두 번 겹치는 해라서 갑오동학농민학명은 올해 더욱 각별하게 조명되고 추념된다. 지역에서 동학정신 계승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나로서는 정말 각별한 해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지난해 10월 17∼18 양일간 충북 보은에서 있었던 갑오동학농민혁명 제119주년, 제9회 전국기념대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오마이뉴스>에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장에서 만난 일본인들'이라는 글을 쓰면서 2014년 제120주년에 대한 결의를 가슴 깊이 다졌다.

또 올해 1월 '2014 갑오년의 삶을 시작하며 다시 뜨겁게 세우는 결기'라는 글을 쓰면서 갑오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는 해에 동학정신의 창달을 위해 더욱 매진할 것을 스스로 뜨겁게 다짐했다.

갑오동학농민혁명 120주년, 당진 학술세미나에 참가하다 

10월 11일 오후 민통선에서 임진강과 북한 땅을 배경으로...
▲ 아내와 함께 10월 11일 오후 민통선에서 임진강과 북한 땅을 배경으로...
ⓒ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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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가을에 들면서 동학혁명 기념 쪽으로는 거의 몸을 쓰지 못했다. 지난 10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서울에서 열린 '갑오동학농민혁명 120주년 제10회 전국기념대회'에는 참가도 하지 못했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민통선' 견학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겹치게 된 두 가지 행사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동학 쪽은 내가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지만,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민통선' 견학은 처음이기 때문에 결국 민통선 견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행히 지역의 동학 동지들이 따뜻이 이해를 해주었다.    
                  
11월 10일 오후에는 충남도청 대회의실에서 '갑오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 충남 동학농민혁명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충남도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충남지역 동학농민혁명의 특성과 역사적 의미, 정신 등을 재조명하고, 계승과 발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대규모 학술세미나였다. 나는 이 행사에서 태안지역의 동학 운동에 관한 소개를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 행사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10일 오후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염원하는 천주교 130190인 선언식'에 참석하는 일 때문이었다. 나는 천주교인 서명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의 공동대표였다. 행사 당일까지 130936명이 서명한 서명용지가 담긴 13개의 상자를 세월호 유족들에게 전달하는 일도 있었다. 취지문 소개, 기자 회견, 선언문 낭독, 서명용지함 전달 등으로 진행된 이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나로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내 뜻을 지역의 동학 동지들이 또 따듯이 이해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무겁고 미안했다. 갑오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인 해에 동학 쪽으로는 별로 한 일이 없었다. 매년 10월 29일 오후 백화산 '교장(絞杖)바위' 아래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 앞에서 갖는 추모제 행사에 참석한 것이 고작이었다.

11월 10일 오후 광화문 농성장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염원하는 130936명 천주교인 선언식'이 있었다.
▲ 천주교인 선언 11월 10일 오후 광화문 농성장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염원하는 130936명 천주교인 선언식'이 있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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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0일의 충남도청 행사마저도 참석지 못해 면구스러움 마음을 피할 수가 없었는데, 뜻밖에도 '당진역사문화연구소'에서 동학 관련 학술세미나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4명의 향토학자들이 당진지역의 갑오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 논문을 써서 발표를 하는데, 합덕성당 김성태 신부의 '당진지역 농민항쟁 관련 역사자원의 활용'이라는 발제 원고를 읽고 토론자로 나서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기꺼이 수락했다. 내게 참가 부탁을 한 쪽보다도 내가 더욱 고마운 마음이었다. 나는 김성태 신부에게서 메일로 원고를 받아 세밀히 읽고 10분 분량의 원고 준비를 했다. 그리고 21일 오후 세 분의 태안지역 동학 동지들과 함께 당진문화원 바로 위에 있는 당진문화예술학교로 갔다. 내가 태안지역이 아닌 다른 고장의 동학 관련 학술세미나 행사에 참석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천주교 사제의 동학 관련 연구논문을 읽고

4명의 향토학자 중에서 김성태 신부는 맨 마지막으로 발표를 했고, 따라서 나도 맨 마지막으로 토론을 했다. 나는 우선 김성태 신부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했다. 천주교 성직자에 의한 동학 연구와 논문은 흔치 않은 일일 듯싶다. 세밀히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처음일지도 모를 일이다. 과거 가톨릭의 성직자나 학자들의 글에 동학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을 더러 본 적이 있으나 단편적인 기술일 뿐, 포괄적인 형태의 논문을 본 기억이 내겐 없다. 또 과거 여러 차례 '동학과 서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지만, 천주교 성직자가 발제자로 나선 것을 본 기억도 내게는 없다.
  
김성태 신부의 동학 관련 글은 필연적인 것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과거 당진시 합덕읍의 '신리성지' 담당사제로 오래 복무하면서 내포지역의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고, 지금은 합덕성당에 몸담고 있으므로 더욱 확장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도 생각된다.

신리나 합덕은 내포의 중심지역으로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이기도 하고, 동학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사목을 하고 있는 천주교 성직자로서, 서학과 동학의 관계를 살피는 포괄적 논문을 쓴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으로도 보인다. 앞으로 천주교 성직자나 신자 학자들의 동학에 대한 연구는 긍정적이고 탄력적인 형태로 발전해 나갈 수도 있으리라는 전망도 해보게 된다.

천주교 사제인 대전교구 합덕성당 주임 김성태 신부가 동학 관련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 김성태 신부 천주교 사제인 대전교구 합덕성당 주임 김성태 신부가 동학 관련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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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천주교 신자다. 천주교 신자로서 오래 전부터 동학운동, 또는 동학혁명 기념사업 쪽으로 많은 힘을 쏟아왔다. 동학정신이 민족정기를 추동해낼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태안은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북접 기포지로서 일찍부터 동학의 큰 역사가 마련되었으나, 천주교 전래는 1930년대부터 미미하게 시작되었다. 안면도 누동리에 1866년 병인대박해 전후로 신자들의 유입이 있었고 신자 촌이 형성되었으나, 너무 외진 곳이어서 세상에 드러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가 적을 두고 있는 태안성당도 1957년에 공소로 시작해서 1964년에야 사제가 상주하는 본당이 되었다.

그런 연유로 우리 태안 지역에는 천주교와 동학이 만나는 역사적 맥락이 없어서, 나로서는 동학과 서학의 관계를 고찰해보는 계기를 별로 가져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이번 김성태 신부의 글이 반가웠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동학은 서학, 즉 천주교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본다. 동학이라는 이름 자체가 서학, 즉 천주교를 의식해서 지어진 이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또 제3대 교주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로 이름을 바꿀 때도 천주교를 많이 의식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선생이 서학을 많이 공부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시천주'로 표현되는 동학의 경천사상과 평등사상은 천주교의 기본 교리와 부합하며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천주교의 제사 부정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외세'라는 사실 때문에 배격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천주교의 전파시기와 동학의 전파시기가 겹치지 않아서 일반사회에서의 충돌현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창시한 때는 1860년으로 천주교의 마지막 박해인 병인대박해가 일어나기 6년 전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가던 시기에 동학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경천사상과 평등사상 등 기본 교리는 같았지만, 동학이 서학과 다른 것은 사회개혁에 대한 의지였다. 천주교는 영혼 구원에 대한 사상으로 사회개혁에 대해서는 열의가 크지 않았던 반면 동학은 사회를 개혁하고 세상을 뒤엎으려는 열의가 충만하였다. 그런 연유로 천주교 박해가 끝난 이후 동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주교 박해의 현장, 즉 순교성지 등에서 관군과 동학군의 전투가 벌어진 것은 더욱 흥미로운 일일 수도 있다. 그 중첩의 의미를 고찰해보는 시선이 필요하리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김성태 신부의 글을 통해 천주교의 순교성지들에 동학군의 피도 어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현장이 후일 동학군이 피를 흘리고 묻힌 곳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알리고 새롭게 보존하는 방책도 모색되어야 한다고 본다.

11월 21일 오후 당진시 문화예술학교에서 당진지역 동학농민혁명 연구  추계 학술대회가 열렸다.
▲ 당진지역 동학연구 학술발표회 11월 21일 오후 당진시 문화예술학교에서 당진지역 동학농민혁명 연구 추계 학술대회가 열렸다.
ⓒ 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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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혹독한 100년 박해를 거쳤던 천주교는 영혼 구원 쪽으로만 경도되어 조국 광복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에는 미온적이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부터 천주교의 민주화 투쟁과 정의구현 운동은 뜨겁게 발화되어 왔다.

나 역시 평신도 신분이지만 천주교 신자로서 민주주의와 정의구현을 위한 일에 적극 투신하고 있다. 이 일은 일면 동학정신의 구현이라고 본다. 동학정신은 민족정기의 다른 이름이다. 동학정신의 구현이 이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갈 수 있다고 본다. 천주교에서는 평화가 정의의 열매임을 가르친다. 정의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천주교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노력은 동학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인 나는 동학정신의 구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동학혁명기념사업에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처지이기에, 천주교 사제로서 한국천주교와 동학의 역사적 관계를 조명하는 포괄적 시각의 훌륭한 연구 논문을 생산해 주신 김성태 신부께 갚은 감사와 존경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승전목' 전투현장을 보다

학술세미나를 마친 후 참가자들과 관계자들은 120년 전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 동학농민군의 최대 승리 전투 현장이었던 '승전목'으로 이동했다.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에 있는 골짜기였다. 깎아지른 듯한 산의 절벽 아래로 내가 흐르고, 너른 밭이 있었다.

승전목을 보는 순간 나는 면구스러움으로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승전목은 내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들어온 지명이었다. 태안지역에서 동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듣게 되는 이름이었다. 그렇게 무수히 들어온 이름이건만, 나는 그 이름을 듣기만  했을 뿐 한 번도 찾아보지를 않았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 동학농민군의 최대 승리 전투현장인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목'에서 처음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 승전목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 동학농민군의 최대 승리 전투현장인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목'에서 처음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 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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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승전목은 내가 과거에 수없이 지나다닌 길목이었다. 나는 40대 시절과 50대 시절 합덕여고에 문예담당 강사로 1∼2년씩 출강을 한 적이 있었다. 매주 하루씩 태안에서 합덕을 왕래했다. 태안에서 합덕을 가려면 당진읍 구룡리를 지나 면천면 사기소리를 지나야 하는데 바로 사기소리 길체에 승전목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무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탄식을 해야 했다.

승전목은 아무런 표지도 없었다. 북접 동학농민혁명군이 최대의 승리를 거둔 역사 현장이건만, 그것을 알려주는 표지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역사 현장이었다.

일행은 아직 건물들이 들어서지 않았고 너른 공터가 유지되고 있으니 충남도나 당진시가 의지를 갖고 '역사공원'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들을 내놓았다. 대부분의 땅이 오래 당진문화원장을 하다가 지금 충남도의원을 하고 있는 분의 소유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 승전목에 역사공원이 조성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역사를 사랑하는 국민과 당진시민이 될 수 있다는 말도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일행과 함께 천천히 주변을 들러보고 거닐면서 예산의 동학 사업을 이끌고 있는 박성묵 선생(예산군동학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설명을 귀담아 들었다. 120년 전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 동학농민군의 최대 승리 전투현장인 승전목에 표석과 기념탑이 세워지고, 궁극에는 역사공원이 조성되는 놀라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꿈을 새롭게 가슴에 지닐 수 있었다.
  
120년 전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 동학농민군의 최대 승리 전투 현장인 승전목을 둘러보았다. 역사 현장이 표석 하나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 승전목에서 120년 전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 동학농민군의 최대 승리 전투 현장인 승전목을 둘러보았다. 역사 현장이 표석 하나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 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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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갑오동학농민혁명,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민통선, #세월호 진상규명 천주교 선언, #서헉과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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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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