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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동물을 가까이에서 보다.
▲ 칼라윗야생동물보호구역 야생동물을 가까이에서 보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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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저기... 기린 보여요?"

핼린이 손가락으로 동쪽 끝을 가리켰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전방을 살폈다. 아침 햇살이 눈부신 마른 초원이었다. 목이 긴 짐승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역광 때문에 긴 목이 공중에서 검은 그림자처럼 흔들렸다.

"정말 기린이네! 와우~!"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냅다 뛰었다. 내 반응이 재밌는지 아니면 뛰는 폼이 웃겼는지, 핼린, 미셀, 메이아, 제인, 그레이스가 까르르 웃으며 내 뒤를 쫓았다.

칼라윗 야생 사파리 보호구역이었다. 어제 도착해 하룻밤 묵은 칼라우이트 섬 서쪽 해변의 바랑가이(마을)에서 동쪽으로 30여 분 걸어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평평하고 넓은 초원이었다. 건기라 마른 풀들이 밟혔다. 군데군데 큰 나무들이 서 있고, 초원 끝으로 덤불 숲이 이어졌다.

코코넛나무 숲 마을
▲ 칼라윗 섬 코코넛나무 숲 마을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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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칼라윗야생보호구역으로 가는 길
 이른 아침 칼라윗야생보호구역으로 가는 길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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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한가운데서 기린 네 마리가 서성였다. 앞에선 얼룩말 무리가 무슨 나무 열매인가를 주워 먹고 있었다. 사슴도 몇 마리 오고 갔다. 종이 다른 초식 동물들이 무리무리 평화로워 보였다. 아프리카 사바나의 풍경이 이럴까. 

고양이, 강아지, 닭 같은 인간과 가까운 동물 말고, 진짜 아프리카 야생 동물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살짝 흥분했다. 게다가 열 발짝쯤 떨어진 동물들과 나 사이엔 쇠창살이나 우리, 담 같은 게 없었다.

아름다운 그물 무늬와 얼룩 무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싶었다. 촉각을 통해 접선해야 잘 알 것 같고, 통할 것 같은 대상을 만날 때가 있다. 아프리카의 야생동물과 대화를 하는 아이 티피처럼. 나 또한 이런 야생의 환경에선 동물들과 다정하게 교감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기시감 같은 이 느낌은 뭐지?

기린과 교감하려다 멈칫...

기린
 기린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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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듯, 어떤 장면이 벼락처럼 뇌리를 스쳤다. 30여 년 전,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혼자 제주도에서 배낭 여행을 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집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이 제주도였다. 한국에서 해외 여행이 자유화되기 전이었으니.

1983년, 어느 봄날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성산 일출봉 분화구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가파른 바위 절벽을 내려가 풀밭 오솔길을 따라갔다. 사발 모양의 분화구 안은 깊고 너른 초원이었다. 뾰족뾰족 깎아지른 바위 봉우리들로 빙 둘러쳐진, 적막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나말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국적인 경치와 풀 냄새, 아침 햇살과 미풍에 취했다. 풀밭을 걸으며 반쯤 넋이 나갔다. 자연 속으로 그냥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갈색 말 두 마리를 만났다. 방목 말인가, 야생 말인가? 풍광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멋진 생명체였다. 야생에서 말을 보긴 또 처음이었다. 말들에게 다가갔다. 반가운 동료를 만난 것 마냥 서슴없이.

말 목덜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히이잉~!" 말이 날카롭게 콧김을 뿜어냈다. 앞발 두 개를 높이 쳐들고 일어섰다. 나는 너무나 놀라 도망쳤다.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풀밭을 벗어나 바위 절벽을 네 발로 기어 올라갔다.

겁에 질린 데다 숨이 목까지 차, 딱 죽을 것만 같았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말들이 내 뒤를 쫓아오지 않았을까? 분명 말 발자국 소리가 내내 나를 쫓았는데. 저 멀리... 말들은 아까 그 자리에서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나는 망연자실 바위 틈에 주저앉았다. 바위에 긁히고 찢겼는지 손바닥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엉엉 큰소리로 울었다. 사는 게 뭔가 굉장히 억울하고 허무하고 슬펐다.

기린 먹이주기
 기린 먹이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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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기린이나 얼룩말에게 다가가 스킨십을 시도하는 건 단념해야겠다. 대신 야생동물들이랑 어슬렁어슬렁 초원을 걸어도 좋겠다. '털 없는 원숭이' 한 마리로. 이곳에 정말 잘 왔다 싶었다. 물론 그때까지는 그 후 내가 느끼게 될 실망감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목격한 철창 우리... 기분을 잡쳤다

아침밥을 먹을 때 핼린이 야생 동물 사파리에 가자고 제안했다. 난 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내 형편엔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며... 자기들이랑 같이 가면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핼린이 말했다.

핼린은 내게 좋은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 역시 지인들이 지리산 산골 마을에 있는 내 집에 찾아오면 그러지 않았나. 집 근처 둘레길을 걷게 하고, 뱀사골로 이끌고, 와운마을 천년송으로 끌고 가고, 실상사로 데려가고, 계곡물에 집어넣고, 야생화 하나라도 더 이름을 알려주려 나대고... 지리산 풍광과 생물과 꽃들이 다 내 것인 양, 호들갑을 떨며 자랑하지 않았나. 상대가 조금이라도 흡족해하면, 나는 행복했다.

"그래, 가자. 아침밥을 든든히 먹어둬야겠다. 가겠다"고 말하며, 나는 밥 한 덩어리를 내 접시에 더 덜어왔다. 어제 부수앙가 섬 코론 시에서 이곳 바랑가이까지 동행한 미셀, 메이나, 핼린, 세 아가씨들과 아침밥을 먹는 중이었다. 생선 한 토막이 반찬이었다. 새콤한 칼라만시즙과 간장을 섞어 만든 소스에 찍어 먹었다. 입맛에 맞았다.

밥을 먹는 동안 누렁개 한 마리와 닭 한 마리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식탁 주변을 맴돌았다. 마당에선 암퇘지가 꿀꿀거렸다. "꼬끼오~!" 바랑가이 여기저기서 닭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목청을 뽑았다. 그 소리 때문에 새벽 3시에 깨, 잠을 설쳤다.  

오전 6시 50분, 드디어 칼라윗 야생 사파리 보호 구역을 향해 출발했다. 집주인인 제인이랑 일곱 살 딸, 그레이스도 같이 떠났다. 가족소풍을 떠나는 양 들떠서. 

가는 길에 미넬바 할머니 집에 들러 아침 인사를 드렸다. 어제 오후 이 섬에 도착해 제일 먼저 들렀던 오두막 집이었다. 이곳에서 10여 명의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50여 가구의 친인척들로 이루어진 이 바랑가이는 씨족마을이었다. 사람들은 조용하고 순박하고 수줍음이 많아 보였다. 다행히 내게 호의적이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몸 냄새 걱정은 접었다. (관련 기사 : 몸 냄새 때문에... '마을 출입' 거부당했습니다)

미넬바 할머니 집에서 달달한 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침 햇살은 벌써 대기를 뜨겁게 달궈 놓았다. 길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숲을 통과했다. 황무지 벌판을 지났다. 집이 몇 채 모여 있는 마을을 통과했다. 커다란 망고나무들이 빽빽이 서 있는 평지를 걸었다. 망고나무 그늘을 벗어나자 너른 초원이 펼쳐졌다. 마침내 기린과 얼룩말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기린 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있는데, 미셀이 다가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 옆에 사파리 관리인으로 보이는 필리핀 남자가 서 있었다. 

칼라윗 야생보호구역으로 나를 안내하는 내 친구들.  카메라를 들이대면 무지 어색해한다.
 칼라윗 야생보호구역으로 나를 안내하는 내 친구들. 카메라를 들이대면 무지 어색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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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강은... 입장료를 내야 한데요."

나는 단박에 상황을 파악했다. 미셀이 더 곤란해지지 않도록,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남자를 따라 사파리 관리 사무실로 갔다. 외국인 여행객이라 내국인보다 4배나 더 비싼 입장료를 내야 했다. 게다가 나는 한 무리 단체 관광객과 합류해야 했다. 사파리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관광 상품 프로그램을 따라가야 했다. 노란색 유니폼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칼라윗 야생 사파리 보호 구역은, 1975년 아프리카 케냐에서 8종 400여 마리의 야생 동물을 들여와 조성됐다. 체계적으로 사육 시스템 매뉴얼을 가동했지만, 지금은 5종 100여 마리만 남았다. 아열대의 아프리카 초원에 서식하는 동물이 열대의 필리핀 섬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토종 사슴인 칼라미아 사슴이 가장 많은 개체 수로 번성했다. 섬 전체에 고루 퍼졌다. 기린은 지금 2세대째다..."

'기린 먹이주기' 이벤트가 있었다. 가이드가 나무 울타리를 두른 정자로 사람들을 몰아 넣었다. 푸르고 싱싱한 이파리가 달린 '바카완 구밧'이라는 나뭇가지 한 아름이랑. 근처에서 서성이던 기린 네 마리가 겅중겅중 알아서 모였다. 긴 목을 울타리 안으로 디밀었다. 사람들이 내미는 이파리를 긴 혀로 채어 뜯어먹었다. 식욕이 왕성했다. 

그리고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됐다. 그것 때문에 기분을 완전히 망쳐 버렸다. 그동안 내 동행인들은 정자에 앉아서 나를 기다렸다. 정오가 되려면 멀었지만 열대의 태양은 도가니 속처럼 달아올랐다. 가이드를 따라 뜨거운 초원을 지나 덤불 숲 쪽으로 들어갔다. 그 숲 곳곳에 크고 작은 철창 우리들이 있었던 것이다. 

원숭이 철창우리
 원숭이 철창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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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동물을 우리 속에?

동물원에 관한 나의 첫 기억은 '창경원'이다. 창경원의 역사를 전혀 모르고 있던 나이였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니 가물가물 기억나는 건, 서울 외가댁 근처, 분홍색 한복을 차려입은 엄마, 인파, 흐드러지게 핀 벚꽃, 코끼리, 그 정도다. 창경원의 벚꽃도 코끼리도 그 많은 사람도, 시골아이의 눈에는 그저 신기하고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 후로 아마 한두 번 더 동물원에 갔을 게다. 커서는 간 기억이 없다. 동물원은 정말이지 자발적으로는 가고 싶지 않은 장소였다. '동물원은 동물을 인간처럼 보이게 하는 동시에 인간을 동물처럼 보이게 하여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인간이 동물과 동일시되는 어지러운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어지러운 마음이야 오히려 환영할 만한 마음이다.

내 거부감은 더 본능적이고 부정적이었다. 니겔 로스펠스의 <동물원의 탄생>을 읽기 전부터 그랬다. 어쨌든 동물원은 사람 마음을 참 불편하게 만드는 장소다. 그러니 칼라윗 야생 사파리 보호 구역에서 팔라완 긴꼬리원숭이 20여 마리가 매달려 있는 철창 우리 앞에 섰을 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애써 평정심을 찾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이드에게 말했다.

"얘들은 왜 여기 있나요?"
"보호하고 있는 겁니다."
"얘들 원래 여기 토종인데, 나오면 죽나요?"
"하하핫!"
"에이, 솔직히 관광 상품으로 전시해 놓은 거잖아요?"

철창우리 속의 눈망울
 철창우리 속의 눈망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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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는 그냥 웃었다. 철창 우리가 열 개쯤 됐다. 고슴도치, 멧돼지, 자라, 곰고양이, 다람쥐, 뱀, 악어들이 갇혀 있었다. 나는 쉬지 않고 종알종알대며 가이드 옆에 집요하게 붙어 다녔다.

"우~! 저, 표정... 정말 슬퍼 보여요. 그렇죠?... 답답하겠어요. 문 열어 줄까요?... 아저씨, 오늘 밤 우리 여기서 만나요. 아무도 모르게 둘이서 얘들 다 풀어줘요. 멋지겠죠? 네? 얘들이 살기 딱 좋은 곳이잖아요. 야생 동물 보호구역인데... 아저씨, 문 닫지 말아요!"

또 한무리의 사람들이 '사파리 투어 트럭'을 타고 다니며 '동물 우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가이드는 내 말에 계속 웃기만 했다. 기분이 완전히 잡쳤다. 해는 뜨겁고 날은 덥고, 나는 토할 것 같았다.

한가로이 마당에서 풀 뜯는 얼룩말... 마음이 가라앉았다

집 마당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얼룩말
 집 마당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얼룩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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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리 투어 아니, 동물원 관람에서 빠져나왔다. 귀가를 재촉했다. 바랑가이로 돌아오는 길, 앨린부터 다들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골이 잔뜩 난 사람처럼 얼굴이 굳어 있었다. 갈증과 더위도 못 참겠다. 결국, 한 집에 무작정 들어가 물을 구걸했다. 얼룩말 한 마리가 그 집 마당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거기서 한참 동안 노닥거리며 물을 마시며 얼룩말을 구경했다.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불쑥, 내가 물었다. 어디서 들었던 질문이었다.

"저 얼룩말 무늬 말이야. 흰색 바탕에 검은색 무늬일까, 검은색 바탕에 흰색 무늬일까?"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냐는 듯, 핼린과 미셀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룩말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잘 봐."

잠시 후, 핼린이 먼저 대답했다. "흰색 바탕에 검은색 무늬!" 미셀이 곧이어 말했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무늬 같은데..." 내가 웃으며 말했다. "둘 다 맞아요!" 우리는 깔깔거리며 다시 귀갓길에 올랐다. 

얼룩말
 얼룩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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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칼라윗, #야생동물, #사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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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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