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와 <설국열차>.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SF 영화중에 그래도 인류의 미래에 관해 제법 심각하게 다룬 영화 중 최근의 영화들을 꼽으라면 이 둘을 뽑을 수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 남달리 인류의 미래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건 필자도 모르겠다. 필자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 두 영화가 다가올 암울한 미래에 대한 전망을 공유하면서도 거기에 대한 결론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설국열차>의 경우 환경 재난으로 꽁꽁 얼어버린 지구를 무한히 달리는 열차를 타고 있는 인류를 다루고 있다면, <인터스텔라>는 황사와 전염병으로 시달리는 미래의 인류를 다루고 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금방 알아챘겠지만, 같은 인류의 암울한 미래를 다루고 있어도, <설국열차>의 미래가 더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인터스텔라>의 미래의 인류는 바퀴벌레로 만들어진 바를 먹지는 않는다.  그리고 주인공이 한심하다고 비난하지만, 황사의 와중에도 가족들과 야외로 나가 프로 선수들에 비해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아마추어 야구 경기를 관전할 수도 있다.

그리고 두 영화의 결말이 암시하는 바는 더더욱 반대이다. <설국열차>의 경우 환경재난으로 동토 화된 지구에서도 생명의 기운을 포착하며 설국열차에서 살아남은 인류는 왜 진작 미친 듯이 폭주하던 설국열차를 버리지 않았던가 하는 후회를 하는 듯하다. 아마 감독이 이 영화의 결론으로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폭주하는 듯한 무한 경쟁의  물질문명을 넘어서는 자연친화적인 새로운 인류의 미래였던 듯하다. 즉 이 영화는 오늘날의 환경론자들이 내세우는 지속가능한 친 환경적 문명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

반대로, <인터스텔라>는 환경론자들이 제시하는 발전의 한계에 대한 인식, 즉 생태주의자내지 환경론자들이 강조하는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에 대해 슬쩍 슬쩍 불만을 내비치고 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지속가능한 성장론, 이른바 녹색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의 성장, 발전 위주의 정책에 대해서 끊임없이 비판을 해 왔고 그 중에 하나가 무모한 우주 개발에 대한 투자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은 전직 NASA의 우주 비행사이고 아마도 미래에 세계적으로 대세가 되어버린 듯한 지속가능한 성장 론에 밀려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농부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농부가 되어버린 것도 맘에 안 들고, 아내가 암에 걸렸음에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은 것도 이 지속가능한 성장 론의 탓으로 돌리는 듯하다. 이러한 주인공의 불만에 대해 딸을 잃고 같이 사는 장인은 당면한 어려움을 자신의 세대가 자원을 너무 낭비한 탓으로 돌리고 주인공은 장인의 이러한 반성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는 유령을 봤음직한 딸에게도 과학주의적인 사고를 강조하고 미래 인류가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개척자, 탐험가 정신을 상실한 것을 한탄한다. 그리고 마침내 개척자, 탐험가 정신을 발휘하여, 우주에 정거장을 마련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여 주고 자신은 100여 살이 넘는 나이에도 새로운 미지의 식민지 개척과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그 우주정거장을 떠난다.

이 핵심 줄거리 외에도 이 영화의 수많은 복선과, 암시적 메시지와, 물리학 이론의 설파가 이 핵심 줄거리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언제든지 만들어 주기는 하지만, 영화의 핵심 줄거리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서사기법을 따르고 있고, 환경주의자들에 의해 요즘  대세가 되어버린 지속가능한 성장 이론에 대한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영화는 노년기에 죽음에 이르러도 끝까지 저항하라는 딜런 토마스의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의 시구들을 끝없이 되뇌고 있다. 필자도 노년을 앞둔지라 이 시구에 많은 공감을 하였고 이 영화를 본 장년층은 필자와 마찬가지로 이 시에 공감하였으리라.

놀란 감독은 고령화 세대의 관객들을 위해서 영화에서 이 시를 반복해서 들려 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미국 건국 초기부터 개척자 정신과 무한 발전, 진보 론으로 오늘날의 세계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환경주의자들의 지속가능한 성장 론에 밀려 불굴의 개척자, 탐험가 정신을 포기하고 노쇠화하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에 대한 조심스런 경계로써 이 시를 라이트모티브 (Leitmotiv)로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가속적으로 계속 발전할 것인가 아니면, 환경을 고려하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할 것인가의 선택은 비단 미국 사람이나 놀란 감독만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봉준호 감독도 고민했을 것이고 필자도 고민하고 있고,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인터스텔라>나 <설국열차>를 본 관객들 중 상당수도 그런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인터스텔라>를 보기 며칠 전에 필자는 모 대학에서 열린 중남미 영화 페스티벌에 참석했다. 이른바 미국식 무한 경쟁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경제를 삶의 최고 가치로 두지 않겠다는 기치 아래 모인 이른바 "여명(ALBA)"의 중남미 회원국들인 에콰도르,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영화들을 감상하는 페스티벌이었다. 필자는 중남미학 교수이기 때문에 "여명(ALBA)"의 기치에 한껏 공감했지만 이틀 동안 이들의 영화를 보면서 지루한 감을 떨쳐 버리기는 어려웠다.

필자가 이 영화들을 보았던 심정은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이 황사의 기운이 감돌던 야외구장에서 아마추어 선수들의 야구경기를 보았을 때의 심정과 비슷했으리라. 같이 영화를 보았던 필자의 제자들이 실소를 터트리기에 제자들에게 거대 자본이 투자된 할리우드 영화들과 비교하지 말라고 충고는 하였으나 필자 자신도 물질문명의 풍요가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미래에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기치아래 소박한 영화와 아마추어 야구 경기를 보며 살아야 할까? 아니면 불굴의 탐험가 및 과학자 정신으로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우주정거장을 건설하여 거기에 이주하여 살아야할까? 그러나 국내의 어느 과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그 우주정거장에 60억 인구가 다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100살 이상의 나이를 먹은 주인공이 찾아 떠난 미지의 행성에 또 다른 식민지 신화를 이룩하며 살아가야 할까?

인터스텔라 설국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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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국립대 중남미 지역학 박사학위 소지자로 상기 대학 스페인어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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