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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3일부터 21일까지 독일과 스페인 답사에 나섰다. DMZ 보존 실태, 도시 재생, 지역개발 성공 사례 견학이 목적이었다. 이 기사는 동행한 18명의 안전행정부 직원을 비롯한 지자체 공무원과의 토론 또는 대화를 토대로 작성했다. 도움을 준 윤광희, 이근행, 심창우, 이재연, 최숙자, 박광근, 문상규, 김규식, 양경종, 이재훈, 김선익, 고미경, 이상심, 김대성, 이유섭, 조광래, 김세학님께 감사드린다. - 기자말

독일 베를린 장벽 114개의 벽화 중 하나. 오른쪽이 호네커, 왼쪽이 브레즈네프다.
 독일 베를린 장벽 114개의 벽화 중 하나. 오른쪽이 호네커, 왼쪽이 브레즈네프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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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끼리 어쩌면 저렇게 리얼하게 키스할 수 있나. 114점의 베를린 장벽 벽화 중 유독 관심 깊게 본 그림이다.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낸 당시 동독의 최고 권력자 호네커이고, 또 다른 사람은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브레즈네프다. 1989년 통일 독일(아래 통독) 전 이 그림이 그려졌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이 벽화는 45.1km 규모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난 후 그려졌다.

두 남자의 키스, 의미가 뭘까?

"의미가 뭘까요?"

이 그림은 뭘 말하는 것일까. 다음날까지 이렇다 할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통독에 불만을 느끼던 동독 출신 사람의 표현이겠죠."

우리 일행을 안내한 가이드의 말이 정답인 듯했다. 통일은 독일 국민 모두의 축제였다는 선입견. 나는 너무 어려운 데서 이유를 찾으려 했다. 이 벽화는 실제 사건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란다.

1979년 동독 건립 30주년을 맞아 소련의 브레즈네프는 동독을 방문했다. 이에 호네커는 감사의 표시로 브레즈네프에게 도발적인 키스를 했다는 뉴스가 전 세계에 퍼졌다. 통독 이후 누군가 베를린 장벽에 그 사진을 그림으로 옮겼다. 동독 정권에 대한 그리움 내지는 회상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다.

베를린 장벽 벽화. 정확한 의미도 이해할 수 없는 114점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베를린 장벽 벽화. 정확한 의미도 이해할 수 없는 114점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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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그리움이 생긴 원인은 뭘까? 안내원은 설명을 덧붙였다.

"통독 후 독일은 화폐 통합을 시행했습니다. 휴지나 다름없던 동독 화폐(DDR-마르크) 대신 서독 화폐(D-마르크)를 벌기 위해 '동'에서 '서'로 노동 인구가 한꺼번에 몰리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화폐 통합과 더불어 동독 국민의 싼 임금과 토지 제공을 조건으로 외국 기업들을 (동독에) 유치했습니다. 

(기업 유치 이후) 차츰 서독과의 격차가 줄어들면서 기업들은 인근의 폴란드 등 (동독보다) 기업 운영에 유리한 지역으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동독 지역 내 실업자들이 대거 발생했지요."

독일이 통일된 지 20년이 지났다. 경제적 균형이 70%에 다다랐다지만, 동독과 서독의 불균형은 여전히 남아 있다. 

베를린, 서글픈 역사의 중심에 서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서독의 수도도 베를린이라 했고, 동독의 수도 또한 베를린이라고 말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서독과 동독에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각각 하나씩 있는 줄 알았다.

"서울이 북한 한가운데 있었다고 이해를 하시는 게 빠를 겁니다."

붉은색 가운데 노란부분이 베를린이다. 파란색은 서독, 붉은색은 동독영토다.
 붉은색 가운데 노란부분이 베를린이다. 파란색은 서독, 붉은색은 동독영토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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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관광객 다수가 '베를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유를 그렇게 했다. 베를린에는 국제공항이 없다. 그곳이 독일의 수도라는 것을 생각할 때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통독 이전) 베를린은 동독의 영토 내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국제공항을 건설하지 못했다.

1945년.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한 이후, 독일 영토는 나토(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즉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서독(도이치 연방공화국)과 소련의 동독(도이치 민주공화국)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동독 영토(소련 점령 지역)에 있는 베를린이었다. 결국 한 나라의 수도라는 정치적, 상징적 의미를 들어 소련 점령하의 베를린은 연합군과 소련이 분할 관리 한다는 데 합의했다. 891.85제곱킬로미터 면적의 베를린은 미·영·프 연합군과 소련이 각각 나누어 소유하게 된 것이다.

처음 동독권의 베를린은 특별한 경계 표시가 없었다. 누구나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오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거 서베를린으로 넘어오기 시작하면서 둥근 삼각형 형태의 베를린에 울타리가 만들어졌다. 이후 1961년 베를린에 길이 45.1km, 높이 3.6m의 장벽을 쌓았다. 연합군과 소련 관할을 경계로 한 베를린 장벽이다. 이후 장벽 상단에 철조망을 두르고 고압선을 연결했다. 동베를린 시민의 탈출 차단을 위해서였다.

마리엔보른은 동독과 서독을 가로막았던 국경선이 있던 자리다. 서베를린으로 가는 네 개의 검문소 중 가장 큰 규모였다. 베를린으로 왕래하는 사람들 절반 이상은 이곳을 이용했다. 서베를린까지 거리는 대략 170km. 처음 서베를린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 국경선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을 두고 동베를린과 대치하고 있다는 불안감과 불편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관광객들이 서베를린을 찾는 경우는 드물었다. 관광서, 군사시설 등 수도 유지를 위한 필수 시설이 다수였다. 서독 정부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서베를린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면서, 베를린 시민의 거주를 유도했다. 동베를린 시민을 자극하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설도 있다. 동베를린 시민에 대해 서베를린 시민의 생활이 비교 우위에 있다는 과시 효과를 위한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동독 체제 붕괴를 이끌어내는 데 한몫했다는 설도 설득력을 얻는다. 목숨을 걸고 베를린 장벽을 넘다 사살당하는 동베를린 시민이 부쩍 늘어나는 결과로 이어진 원인이 되기도 했단다.

마리엔보른 국경선의 궁극적인 목적은 서독에서 동독으로 들어가는 차량에 대한 검문 목적이 아니었다. 상주하는 1000여 명의 경찰과 세관 직원들 모두는 동독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가는 사람을 색출했다. 또 서베를린으로 왕래하는 서독 사람들에 대해 과속, 정차, 금지 물품 반입 등의 이유를 들어 과다한 세금을 부과했다. 동독 입장에선 이 검문소가 외화 벌이 역할도 했단다. 그곳 박물관에 전시된 '산속에서 망원경을 통해 감시하는 경찰', '은밀한 곳에 숨겨놓은 군견 사진'들이 당시 상황을 실감케 한다.

마리엔보른(Marienborn). 동독과 서독의 국경선이 있던 곳이다. 이곳 박물관에는 매일 수백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마리엔보른(Marienborn). 동독과 서독의 국경선이 있던 곳이다. 이곳 박물관에는 매일 수백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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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한국, 전후 대처의 차이

2차 세계대전의 원흉인 나치와 일본은 어떻게 다를까. 800여만 명 유대인 학살을 비롯해 55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2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1945년 히틀러의 자살로 막을 내렸다.

이후 독일은 나치와 전쟁을 벌인 4대 강국(미·영·소·프)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면서 수도인 베를린도 이들 나라에 의해 분할 관리되는 운명에 처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무기 수출을 통해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명목상 사회주의의 팽창 저지를 목적으로 서독을 방패 막이로 삼았다. 자본주의 붕괴는 자국에서 생산한 물품을 유럽에 판매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종전 후 미국이 서독에 집중적인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아끼지 않은 이유다.

전후 독일은 나치 협조자 색출에 나섰다. 관련 인물들의 처형을 비롯해 그 가족들에 대한 취업 기회도 박탈했다. 또한 나치와 독일의 차별화를 위해 베를린 시가지에 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된 유대인 추모를 위한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건립하고 지구 상에 다시는 이런 만행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언론에서는 연일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며 나치와 독일을 차별화 하는데 주력했다.

일본은 어떤가. 세계사는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일본과 나치의 닮은 점으로 군국주의,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 등을 꼽는다. 전쟁 패망 후 일본도 독일과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침략의 원흉인 도조히데키 또한 처형됐다. 그런데 그 뒤가 문제다. 전범 우상화를 넘어 정치인들까지 신사참배를 자행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역사 교과서 내용마저 왜곡하고 있다. 군국주의를 회상하는 분위기도 보인다.

광복 후 우리나라는 독일의 나치 배격과 크게 다른 정책을 폈다. 재건을 위한 기술이나 관료가 없다는 이유로 친일세력을 대거 등용했다.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한 인사를 배척했다는 말이 옳다. 일제 청산을 위한 국민의 의지가 부족했던 게 아니었다. 당장 의식주 해결이 시급했던 국민은 정치에 관여할 여력이 없었다. 일제를 등에 업고 부를 누리고 살던 친일파에 의해 국가의 틀이 만들어졌다.

내년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다. 이미 반세기를 훌쩍 넘었다. 완전한 친일 청산은 어려울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나 그들이 쓰고 있는 가면과 위선은 벗겨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이번 연수를 통해 배운 커다란 교훈이었다.

브란데브르크문, 과거 승전시 최초로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문이다. 동서독의 관문이었다.
 브란데브르크문, 과거 승전시 최초로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문이다. 동서독의 관문이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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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에스파냐의 또 다른 나라, 바르셀로나'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신광태 기자는 강원도 화천군청 기획담당입니다.



태그:#베를린, #베를린장벽, #브레즈네프, #호네커,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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