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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없는 삶을 바라지 마라
고난은 견딜 수 있을 만큼
주어지는 아픔이고
보람은 견뎌낸 만큼 얻어지는
기쁨이다

이채 시인의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의 한 구절이다. 고난과 아픔은 잘 연결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고난과 기쁨이 잘 연결되지는 않는다. 하긴 시인이니까 고난과 아픔을 보람으로 잇대고 기쁨까지 다다르게 하는 것이려니. 인생의 역경은 항상 능선 같다. 오르는가 하면 내려와야 한다. 내려가는가 하면 다시 올라야 한다.

인생의 능선에는 바람이 부는 법

<꽃산행 꽃시> 표지
 <꽃산행 꽃시> 표지
ⓒ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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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능선에 덧대 바람이 분다면 얼마나 아찔할까? 그러나 아찔함보다는 그 가혹함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내가 책에서 만난 사람이다. 이굴기, 그는 <꽃산행 꽃詩>에서 설악산 공룡능선을 오르내리며 만난 바람과 즐겁게 교우한다. 아주 심드렁하게, 하지만 즐겁게.

오늘은 가혹한 조건이 하나 추가되었다. 이곳 주민들한테는 물론 나그네인 나한테도 어김없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람이다. 바람은 잠시의 단절도 없이 불고 불었다. 어느 고갯마루에서 마지막 한 모금을 마저 털어 넣자 생수병은 빈병이 되었다. 그때 몰려오는 바람에 병의 주둥이를 슬쩍 갖다 대었다. 곡조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초보자가 내는 퉁소소리가 한 모금 났다.(170쪽)

어떻게 땀을 흘리며 걷는 능선의 오르내림에서 만난 가혹한 조건인 센 바람이 이토록 아름답게 그의 인생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차라리 퉁소소리를 만드는 바람, 단절 없이 내리 때리는 바람에게서도 노래를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랴.

우리의 녹록치 않은 세상은 항상 우리더러 능선에 서라 한다. 그러고도 모자라 바람을 단절 없이 퍼붓는다. 그러면 내남직 "아야!" 소릴 지르며 기겁을 한다. 그러니 우린 이토록 버거운 인생인가 보다. 저마다 아프다고 소리친다. 저마다 슬프다고 우짖는다. 그러면서 세월호처럼 바다 밑으로 침잠하곤 들숨날숨 언제 쉬었는지 묻는다.

망각하는 게 아니라 망각하고 싶은 인생이다. 차라리 "구름이 딸기밭에 가서 딸기를 몇 개 따 먹고는 '아직 맛이 덜 들었군!'"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관조하는 인생이랴. 저자는 김춘수의 <구름>을 인용하며 그렇게 관조어린 눈으로 산을 보고 강을 보고 꽃을 본다. 그리고 사람을 본다.

저자가 꽃을 보기 위해 공룡능선을 오르듯 우리는 행복을 건지기 위해 인생의 능선을 올라야 한다. "희운각에서 출발하여 능선에 오르기 위해서는 길게 늘어진 공룡의 꼬리를 따라가야 한다. 꼬리는 힘이 세고 꼬리를 밟는 나는 힘이 들었다" 그랬다. 저자도 힘이 들었다고 한다. 우리도 힘이 들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바람을 안고, 바람을 등에 업고, 바람과 친구하며 가야한다. 인생을.

꽃을 찾아 나선 게 아니라 삶을 힐링하러 나선 것

<꽃산행 꽃詩>는 산에 꽃을 찾아 나선 한 사내의 이야기다. 봄꽃을 찾으러 진도의 어느 산에서 시작하여 제주, 영월, 백두대간, 한계령을 누빈다. 여름꽃을 만나기 위해 울릉도에서 백두산, 한라산, 설악산을 주름잡는다. 가을꽃, 겨울꽃을 위해서도 백암산, 태백산, 유달산 심지어는 해병대 연병장까지 호되게 혼다.

그래서 만난 꽃 앞에서, 나무 앞에서, 풀 한포기 앞에서 시 한 수를 풀어헤친다. 참 멋지다. 풍요롭다. 저자가 찾아 나선 게 꽃 맞는가. 나무 맞는가. 아닌 것 같다. 식물다양성교육센터에서 식물에 대하여 공부하며 숙제로 꽃을 찾아 나섰다지만 그가 우리에게 소개해주는 것은 꽃이 아니라 행복의 단초였다.

고난을 기쁨으로 잇대던 이채 시인처럼, 이굴기 그는 우리 앞에 청진기를 들이대고 삶의 묘수를 처방하고 있다. 고난이 고난만이 아니라고. 꽃 한송이 보려고 험한 산을 오르내린다. 그게 그의 인생이지만 우리의 인생이어야 한다고 벼르고 말하려고 하지 않는가.

저자는 천마산에 올라 얼레지 군락을 만나 행복해 한다. 거기에는 손바닥만 한 산자고라고 하는 까치무릇, 보춘화도 있지만 흰얼레지를 보고 더 행복해 한다. 단 한 포기밖에 없는 흰얼레지, 희귀하여서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가 인용한 한시에서 알 수 있듯 그의 '그대'이기 때문이다.

渡水復渡水(도수부도수)
看花還看花(간화환간화)
春風江上路(춘풍강상로)
不覺到君家(불각도군가)

물 건너 다시 물을 건너
꽃을 보며 또 꽃을 보며
봄바람 부는 강 언덕길을 오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 집에 다다랐네(고계의 <삼호은자> 인용, 61쪽)

비 내리는 인생에 다보록한 행복 한 보시기

연변의 어느 둔덕에서는 개불알꽃에 맺힌 물방울을 보며 “빗방울에 풍경이 비치고 있다. 방울 속에 다른 세계가 있다”고 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엔 겐자부로를 생각한다.
 연변의 어느 둔덕에서는 개불알꽃에 맺힌 물방울을 보며 “빗방울에 풍경이 비치고 있다. 방울 속에 다른 세계가 있다”고 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엔 겐자부로를 생각한다.
ⓒ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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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에 비는 내린다. 누구나 인생은 자기가 산다. 우리 앞에 '그대'가 기다리고 있음을 짐짓 잊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걸 일깨워준다. 그는 꽃 앞에서 '그대'를 부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인생능선을 지나며 만나는 바람에게서도 '그대'의 노랠 들어야 한다.

언덕에 핀 갈마가지나무 꽃을 보며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라며 미당의 <동천>을 떠올린다. 배롱나무의 뚫어진 홈을 지나 작은 꽃을 보며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고은 <그 꽃>)을 떠올린다.

연변의 어느 둔덕에서는 개불알꽃에 맺힌 물방울을 보며 "빗방울에 풍경이 비치고 있다. 방울 속에 다른 세계가 있다"고 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엔 겐자부로를 생각한다. 저자는 그 때문에 시를 짓기 시작했다고 자신의 속내를 연다. 저자는 책 속에서 늘 이런 식이다. 그 무엇도 그 앞에 시가 아닌 게 없다. 시를 빙자하여 인생의 고난을 넘는 우리에게 그는 행복 한 보시기를 내민다.

참 행복했다. 이굴기, 당신 때문에. 꽃 마냥 아름다운 생각과 더 예쁜 글 솜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풀 한 포기 앞에서도 올곧고 향기로운 고난을 승화하는 능력 때문에 더 그랬다. 당신이 공룡능선을 넘을 때 우리네는 한없는 인생능선을 넘어야 하기에 당신이 내민 글 속의 따스한 손이 오래 채취로 남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꽃산행 꽃詩>(이굴기 지음 / 궁리 펴냄 / 2014. 11 / 299쪽 / 1만5000원)



꽃산행 꽃詩

이굴기 글.사진, 궁리(2014)


태그:#꽃산행 꽃詩, #이굴기, #시인, #새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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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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