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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매일 아침이면 할 말이 있든 없든 친정부모님께 전화를 겁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출근해서 출근 잘했다고 전화했고, 지방에 발령받아 가 있을 때는 출근 잘하고 있다고 회사로 걸어가는 길목에 전화를 했습니다. 휴직 중인 지금은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까지 학교에 보낸 후 한숨을 돌리며 전화합니다. 대부분 친정엄마가 받으시는데 엊그제 아침에는 아버지가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여보세용~."

코에 잔뜩 바람을 채운 코맹맹이 소리로 전화를 받으시는 아버지. 웃음을 겨우 참으며 물었습니다.

"엄마는요? 아빠, 엄마 어디 가셨어요?"
"아니, 이것들은 죄다 전화하면 엄마만 찾네. 아부지 좀 찾아봐라. 니 엄만 미장원에 갔지."

기분이 좋으시면 누가 전화를 하든 받아서 이런저런 본인이 하고 싶은 얘기들을 다 하시고야 끊으시는 아버지, 오늘도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합니다.

"낼 모래 우리 구심회(시골동네 전현직 이장단 모임)에서 놀러 가잖아. 그래서 엄마는 오늘 머리 하구, 난 내일 이발하러 갈꺼야."

낼모래 '놀이'를 가시는데 맘은 이미 관광버스에 타신 듯했습니다.

늘 봐온 모습입니다.
▲ 흥이 나신 아버지 늘 봐온 모습입니다.
ⓒ 김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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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미리부터 머리도 하고 준비도 하신 두 분, 아침 일찍부터 관광버스를 타고 태안으로 바람 쐬러 다녀오셨습니다. 여행 가시는 날 아침에도 자식들마다 전화해서 잘 다녀오시라 하고, 손자들까지 '할아버지 잘 다녀오세요'라며 여행의 흥을 더한 탓인지 관광버스 안에서도 큰 목청으로 노래 부르고 떠드시느라 목이 쉴 정도였다고 하십니다.

"아이고, 항상 그래요. 나이 들면 좀 덜할까 했는데, 뭐 더해요 더해. 술 좋아하는 니네 아부지 술 고주망태가 되서 떠들지. 하루 꼬박 걸려 다녀도 사람들 니 아부지 구경에 심심하지 않았을 거다."

친정아버지의 모습,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늘 봐온 모습이니까요.

"얼마나 좋아요? 모두 쳐다보는 남편이랑 다녀서."
"니가 살아봐라. 하루도 못 산다고 할 거다. 아이구."

웃으시는 친정엄마, 평생을 함께하신 목청 큰 고주망태 남편을 반쯤은 자랑스러워 하시는 듯합니다. 그러고는 한마디 하십니다.

"전에는 육칠십 명쯤 됐나? 부부동반으로 모이면 차가 몇 대는 있어야 했는데, 죽은 사람도 있고 아파서 못 온 사람도 있고, 그리고 마누라가 먼저 가서 혼자 온 사람도 있고. 이제는 차 한 대에 다 되더라. 다들 나이 들구 늙었어. 그런 거 보면 기운 있을 때 부지런히 다녀야 해."

딴 사람은 하루도 못 살고 도망 갈 남편이랍니다.
▲ 고주망태 남편과 함께 딴 사람은 하루도 못 살고 도망 갈 남편이랍니다.
ⓒ 김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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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힘주어 덧붙이셨습니다.

"야, 그래서 말인데, 나 내년에 칠순 잔치는 안 해먹을 거야. 그리고 가까운 데든 먼 데든 여행으루 갈 거다. 다들 말해서 그렇게 하자구!"

그날 아침엔 전날 고성방가 및 음주가무로 지치신 아버지는 아침 드시고 잠시 쪽잠을 주무셔 통화가 불가했습니다. 대신 구이장단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나신 동년배들 사이에서, 잠시 잊고 지내셨던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고 오신 친정엄마의 여행후기 및 다짐을 듣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전화기 저 편에서 들려오는 친정엄마의 목소리에서는 너무도 빨리 흘러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 아쉬움 속에 선언하신 내년 여행, 차질 없도록 형제들에게 문자와 전화를 돌렸습니다.

"자, 내년에 엄마 여행 가고 싶으시답니다. 회비 준비들 하시게나~."

연세 드셨어도 여행 가야겠다고 생각하시는 건강한 부모님이 계셔서 참 다행이다 싶은 든든한 아침이었습니다. 육아휴직 후에 가끔 아침에 전화드리는 걸 거른 날이면, 다른 형제들에게 '오늘은 얘가 아직 전화를 안하네. 뭐하나?' 하시며 전화를 기다리신다고 합니다. 자주 전화드려야겠습니다.


태그:#노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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