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트>(감독 부지영)가 조용히 뜨거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매율은 2위를 달리고 있고, 관객 수는 50만 명을 훌쩍 넘겼다. 보기에 따라 불편할 수 있는 영화치고는 흥행 성적도 나쁘지 않다.

<카트>는 '더 마트'라는 이름의 대형마트가 주요 배경이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신산한 삶과 투쟁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칫 정치나 이념의 색안경으로 재단하기 쉬운 소재다. 영화에는 깨지고 쓰러지는 '을'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대다수가 '을'일 게 분명한 관객들에게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영화에 대한 평은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주변에서 들리는 입소문이 좋다.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도 따뜻해 보인다. 비정규직 문제라는 핫 이슈를 다뤘으면서도 가족애나 휴머니즘과 같은 메시지가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며 여기저기서 코를 훌쩍이는 이들이 많다. 어제 저녁, 군산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함께 마련한 '군산다큐영화제'의 네 번째 상영작으로 이 영화를 보았다. 안경을 벗어 눈물을 닦아낸 게 네 번쯤 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영화 어땠어요?"
"슬퍼서 혼났네. 눈물 흘리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 우리 이야기잖아."
"저도 주변을 보니까 다들 눈물 닦고 있더라고요."


중년의 남자 둘이 나눈 짤막한 대화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나와 들어간 화장실에서였다. 옆에 서서 일을 보던 내 입에서 '정말 슬펐어요'라는 말이 곧 튀어나올 같았다. 그들이 나눈 대화 내용에 그만큼 공감이 갔다. 눈물로 관객들을 하나 되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대박 난' 영화 아닌가. 그래서 묻는다. 화장실에 나란히 선 무뚝뚝한 중년 셋은 대체 무슨 이유로 짠 눈물을 흘렸을까.

주인공 '선희'(염정아 분)는 지방 건축 현장에 돈을 벌러 간 남편을 대신해 고등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여성이다. 정규직 전환의 꿈을 안고 수당 한 푼 안 나오는 잔업에도 기꺼이 참여하는, 정말 세상 물정 전혀 모르는 순진한 '아줌마'였다.

그런 그가 파업 과정에서 손해배상금 3억 원을 회사에 내라는 소장을 받는 노동조합 지도부 중 하나가 된다. 부당한 일에도 연신 "네, 네"만 읊조리던 겁 많던 그가 아들 '태영'(도경수 분)이 편의점 사장에게 떼이다시피 한두 달치 월급을 기어코 받아내는가 하면, 기습 시위를 시작하면서 확성기로 노조원들을 이끄는 용기와 당당함도 갖게 된다.

선희가 이렇게 변모하는 데에는 이혼녀로 아들 하나를 키우며 살아가는 '혜미'(문정희 분)가 큰 구실을 한다. 혜미는 과도한 회사 업무로 첫 아이를 유산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정규직이었으면서도 직장을 그만둬야 했던 기억 때문에 일터에서 겪는 부당함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정규직 전환을 몇 달 앞둔 선희는 수십 명의 동료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어느 날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받는다. 마트 매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외주화 한 뒤 회사를 통째로 팔아넘기려는 '더 마트' 경영진의 계획에 따른 일이었다. 선희와 그의 동료들은 절망에 빠진다. 그때 혜미가 노동조합 설립을 통해 정면 돌파하자는 의견을 낸다.

이때부터 선희의 변화가 시작된다. 그는 자신감 있게 상황을 주도해 나가는 혜미를 보면서 닫혀 있던 마음의 눈을 뜨기 시작한다. 처음에 서로를 무척 어색해하던 선희와 혜미는 본격적으로 파업과 점거 농성 투쟁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친밀한 사이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혜미의 아들이 용역들의 농성 천막 철거 과정에서 중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한 뒤 삐걱거린다. 말하자면 강경파였던 혜미가 아들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점거 농성장을 빠져나와 마트 계산대에 서게 된 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둘은 곧 온전한 관계를 회복한다. 그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서로를 '여사님'으로 불렀다. 표면적으로 '여사님'은 극존칭의 호칭어다. 하지만 그것은 무미건조하게 들리는 '씨'를 대체하기 위해 쓰인 말일 뿐이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타락한 말이자 가장 이율배반적인 단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여사님'은커녕 '씨'로조차도 불리기 힘든 처지와 관계 속에 있었다.

그런 둘은 서로에게 '언니'와 '동생'이 되어줌으로써 둘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줄여나간다. '언니'라는 호칭어를 매개로 인간적인 유대감을 키워나간다. '여사님'으로 위장된 '씨'의 건조한 관계가 '언니'와 '동생'이라는 인간적인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선희와 혜미가 맺는 관계의 절정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난다. 선희와 혜미는 경찰이 쏜 물대포를 온몸으로 맞아가면서 함께 카트를 민다. 진압 경찰을 향해 돌진하는 둘의 모습은, 그들이 '여사님'에서 '언니·동생'을 지나 마침내 서로가 '동지' 관계에 이르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함축적인 장면이 아닐까.

선희가 '언니·동생'을 지나 '동지'에 이르는 과정은 무척 인상적이다. 하나의 성장담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선희는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삶의 경계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꿈조차 꿀 수 없었던 평범하고 유약한 '을'이었다.

하지만 선희는 곧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순간이었을지라도 혜미의 '배신'에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허위와 냉혹함이 가득한 현실 세계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진실함과 진정성이 통하는 휴머니즘의 공간으로 도약했다. 그것은 마냥 초라한 '을'이었던 그가 자신과 세상에 대해 스스로 당당한 '갑'이 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카트>에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다. 10대 아이돌 도경수를 제외하면 눈에 띄게 대중을 견인하는 간판 스타가 눈에 띄지 않는다. 이야기 구성과 전개도 느슨하다. 일방적인 해고 통보 후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들은 인과적인 연결 관계가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는다. 극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이유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문제를 둘러싼 정치·사회적 배경 구조나 시스템에 대한 분석 역시 지나치게 소략하다. 이들 외적 요인이 영화에서 이야기 발단의 결정적인 계기 때문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비정규직과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차별받는 노동자들의 문제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 핵심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트>는 바로 그런 점 덕분에 관객들 한 명 한 명에게서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선희가 버는 돈은 누군가에게는 '반찬값'에 불과했다. 하지만 선희에게 그 돈은 절박한 삶을 간신히 지탱하게 해주는 피 같은 '생활비'다. 그가 온갖 힘든 상황들을 꿋꿋이 이겨내는 이유다.

그것은 최초 파업을 주도하는 혜미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종 당당하기만 하던 그는 자식을 위해 고객의 진상 짓을 감매한다. 평범한 '을'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렇지 않을까.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우리는 세상에 나가 기꺼이 무릎을 꿇는다!

그런 '을'들이 부당하게 해고되었다. 그 어떤 '을'이 논리적인 인과 관계를 따져가며 싸우겠는가. 선희와 혜미처럼 우리 모두는 평범하다. 그런 우리에게는 진실이 먼 곳에 있다. 어느 날 문득 비범한 사태가 눈 앞에 펼쳐진다.

우리는 점핑하듯 진실의 세계로 옮아간다. 처음 우리는 떨리는 긴장감을 안은 채 소심하게 튀어오른다. 우리의 점핑은 어느 순간 로켓을 단 발사체처럼 수직 상승한다. 그러므로 <카트>에서 보이는 극적 비약이나 일견 엉성해 보이는 이야기 구조는 가장 핍진한 현실 묘사에 다름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수백만 명의 '선희'와 '혜미'가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800만 명대의 비정규직인 살아가는 나라가 되어 있다. 최근 파업을 벌인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37만여 명에 이른다. 전체 교직원의 절반에 육박하는 비율이다. 대표적인 대형마트인 롯데마트에서는 전체의 66퍼센트에 가까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계산원과 상품 진열 업무를 맡고 있다.

카트의 가장 큰 미덕은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인사해 주시는 극장 직원분의 노동환경이 궁금해지고, 평소 같으면 휙 지나쳤을 청소원분께 두 손으로 공손히 빈 컵을 드리며 목례라도 하게 되는 것, 사실 이게 아닌가 싶다. '투명인간'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

며칠 전 <카트> 관련 기사를 훑다가 우연히 본 한 트위터리안의 글이다. '투명인간'으로 살아가는 '선희'와 '혜미'들이 800만 명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투명인간' 같은 타자가 아니다. '나'의 가족이자 친구이고, 누군가가 아끼고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는 실존(exist)들이다. 우리의 밖에(ex) 있는(ist) 그들을 모종의 관계망 속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나의 실존을 찾는 길이기도 하다. 나를 비롯한 무뚝뚝한 중년의 사내들이 짠 눈물을 흘린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주역> '계사전'에는 '길흉회린(吉凶悔吝)'이라는 말이 여러 곳에 나온다. 대개 인간 만사를 정리한 말로 해석되는 이 말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한다. 길하거나 흉함은 '회린'에 달려 있다는 식의 풀이도 그 하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찰하면 길하고, 인색하게 마음을 닫아두면 흉해진다는 것이다. 눈물은 연민과 공감의 증표다. 흉에서 벗어나 길로 향하는 첩경이 될 수 있다. <카트> 상영관으로 달려가야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근거가 여기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카트> 부지영 감독 공감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투명인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top